알아야 면장을 한다?
학습 동아리 회원님들께 알립니다. 다음 주 예정이었던 교육실 개방이 코로나 19의 산발적 재발/확산에 의한 방역강화 지침으로 다시 연기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만남을 후일로 미뤄야 하겠네요. 사정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학습은 근학(勤學)편 7조(條)로 본문과 풀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徽宗皇帝(휘종황제) 曰(왈) 學者(학자)는 如禾如稻(여화여도)하고 不學者(불학자)는 如蒿如草(여호여초)로다 如禾如稻兮(여화여도혜)여 國之精糧(국지정량)이요 世之大寶(세지대보)로다 如蒿如草兮(여호여초혜)여 耕者憎嫌(경자증혐)하고 鋤者煩惱(서자번뇌)이니라 他日面墻(타일면장)에 悔之已老(회지이로)로다.
휘종황제가 말하기를, "배운 사람은 곡식 같고 벼 같으며, 배우지 않은 사람은 쑥 같고 풀 같도다. 곡식 같고, 벼 같음이여! 나라의 좋은 양식이요, 세상의 큰 보배로다. 쑥 같고, 풀 같음이여! 밭가는 자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김매는 자가 번거롭고 괴로워하느니라. 뒷 날에 담벼락을 마주하여 (답답함에) 이를 뉘우쳐도 이미 늙었도다."고 하였다.
오늘은 본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면장(面墻)'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됐다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을 소재로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그런데 이 속담의 '면장'이 면장(免牆)인지 아니면 면장(面長)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3가지 한자어의 사전적인 풀이를 소개합니다.
▷ 면장(面牆/面墻): ① 집의 정면에 쌓은 담 ②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선 것 같이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견문이 좁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面牆과 面墻은 같은 뜻임.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免牆(면할 면, 담 장) : 담벼락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을 벗어남. 단 사전에 免牆(면장)은 나와 있지 않음
▷ 面長(낯 면, 길/어른 장) : 면(面)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직위에 있는 사람. 또는 그 직위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앞서 언급한 대로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속담의 '면장'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 본문의 면장(面墻)과 연관시켜 ‘담장을 면한다’는 뜻의 면장(免牆 혹은 免墻)으로, 다른 하나는 지방의 자치단체장인 면장(面長)으로 풀이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논자(論者)들은 전자(前者)인 면장(免牆)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후자(後者)인 면장(面長)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틀렸다고 한마디로 일축(一蹴)하지요.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조심스럽지만 두 가지가 다 가(可)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
면장(免牆)은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면장(面牆)에서 유래했으며, 이 말의 용례는 논어(論語) 양화(陽貨)편 10장(章)에 보입니다. 원문과 풀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 而立也輿
(자위백어왈 여위주남소남의호? 인이불위주남소남 기유정장면 이립야여)”
"공자가 백어에게 이르기를 너는 주남과 소남을 배웠느냐? 사람이 되어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바로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 풀이를 한 구절씩 나눠서 조금은 구체적으로 풀겠습니다.
子謂伯魚曰 :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 이름은 공리: 孔鯉)에게 묻기를
女爲周南召南矣乎? : 너는 주남(朱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 '주남'과 '소남'은 시경(詩經)의 첫 머리에 나오는 편명(篇名)입니다. 시경은 모두 30편, 305개의 시로 되어 있으니 시경 모두를 배워서 알고 있느냐"라는 물음입니다.
人而不爲周南召南 :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 즉 시경을 읽고 배우지 않으면
其猶正牆面 而立也輿 : 그것은 마치 담벼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과 같이 답답한 상태로 세상을 사는 것과 같다
→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시경을 배워 알지 못하고서는 '낫 놓고 기역(ㄱ)자를 모르는 것'이며, 한글을 읽고 쓸 줄을 모르며 사는 문맹자와 같다는 꾸지람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왜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담벼락 앞에 서 있는 면장(面牆) 상태가 된다고 했을까요? 공자는 시경을 배우면 갖게 되는 장점을 여섯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양화편 9장)
① 가이흥(加以興) 감수성이 풍부해진다
② 가이관(加以觀) (골고루 살펴서) 정치를 잘하게 된다
③ 가이군(加以群)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된다
④ 가이원(加以怨) 잘못된 일을 빨리 알아차려 고치게 된다
⑤ 이지사부 원지사군(邇之事父 遠之事君 ) 사람의 올바른 도리(가깝게는 부모, 멀리는 임금)를 알아 실천한다
⑥ 다식어조수초목지명(多識於鳥獸草木之名) 부수적(예: 동식물의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
이처럼 시경(詩經) 한 권으로 인생사(人生事)를 통달할 수 있기에 공자(孔子)는 아들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시경을 읽을 것을 수시로 강조하고 (위정편 2장, 술이편 17장, 태백편 8장, 계씨편 13장, 양화편 9장과 10장), 그렇지 않으면 담을 마주하는 면장(面牆)의 처지가 된다고 다그칩니다.
이후 공부를 함으로서 요행히 ‘담벼락을 마주보는 처지는 면했다’는 의미의 ‘면장면(免牆面)’ 또는 줄여서 '면장(免牆)'이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구당서(舊唐書) 염립덕전(閻立德傳)에는 “내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요행히도 담벼락을 마주보는 처지는 면하였고, 지필묵과 인연을 맺어 겨우 여러분들 틈에 낄 수가 있었다(吾少好讀書,幸免牆面緣情染翰,頗及儕流)”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송(宋) 나라의 주자(朱子)의 영개창(詠開窓: 창문을 열고)이라는 시(詩)에는 “어제는 흙담을 향해 서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해를 향해 창을 연다.(昨日土墻當面立, 今朝竹牖向陽開)”라는 구절도 보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깨우침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아서 산사(山寺)와 승방(僧房) 등의 주련(柱聯)이나 편액(扁額)에 자주 인용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고 할 때의 ‘앎’은 인생사의 기본적 지식이며 도리(道理)이고, 그것을 모르면 담 벼락에 이마를 붙이고 서있는 것과 같은 면장(面牆)의 상태가 되며, 그 상태를 면(免)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논어, 양화편)으로부터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는 속담(俗談)이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 알아야 면장(面長)을 한다
지금부터는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속담에서의 '면장'은 '면장(面長)'이라는 주장을 알아 보겠습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적어도 1910년대 이전에 이 속담이 사용되었다면 면장(免牆)이 맞고 면장(面長)이 틀립니다. 왜냐하면 시군(市郡)의 하급 행정단위로서의 면(面) 제도는 1917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행정 명칭으로서 면리(面里)제도는 조선 초부터 있었지만 당시의 면(面)은 방향을 가리키는 '어디어디 방면(方面)'으로 쓰였고, 당연히 책임자를 의미하는 면장(面長)이라는 벼슬은 없었습니다.
해당 속담의 실제 사용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방법으로 1920년 이전에 나온 속담을 소개한 책들을 알아 보았습니다. '순오지(旬五志, 1678년)', '열상방언(冽上方言,?)', '이담속찬(耳談續纂, 1820년)', 그리고 '조선이야기집과 속담(1914년)'이 있는데 필자의 불찰(不察)일 수 있으나 해당되는 속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즉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속담의 사용은 적어도 1917년 이후이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면장(面長)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론합니다.
둘째는 이 속담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말을 "윗 사람 노릇을 하려면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식자(識者)들이 면장(免牆)의 유래를 내세워도 그 속담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면장(面長)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올바른 어법(語法)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나 속담 중에서 본래의 뜻과 달리 쓰이는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정말 쉽다는 뜻으로 쓰고 있는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초에는 누워서 떡을 먹으면 콩고물이 떨어져 더러우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해버린 속담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속담 이야기(엄윤숙 지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누워서 떡 먹기'의 원뜻이 쉽다는 것이 아니니 처음의 뜻으로 바꿔 쓰자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도 먾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면장(面長)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면장(面長)으로 쓴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몇몇 속담 사전에서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에 대한 풀이를 "어떤 일을 하려면 그에 맞는 학식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해당 속담을 검색하면 한결 같이 면장(免牆)만이 올바른 것이고 면장(面長)은 잘못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내용에 따라서는 면장(面長)의 뜻으로 사용함을 무지(無知)의 탓으로 꾸짖는(?) 경우도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면장(面長)의 뜻으로 쓰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속담을 사용하는 사람이 '면장'의 한자어를 면장(免牆)과 면장(面長)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의미상의 차이가 생길 뿐이지요. 즉 '면장(免牆)"은 '몰랐을 때는 깜깜하고 답답하지만 알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고 밝아진다'는 뜻이고, '면장(面長)'은 어떤 일을 맡으려면 필요한 조건(지식, 경험 등의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결국 어떤 의미로 해당 속담을 말하고 싶은가에 따라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도 가능하고, "알아야 면장(面長)을 한다"도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글을 마칩니다.
※ 후기(後記)
자료 조사 중에 알아 낸 소소한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 "알아야 면장을 한다"에서 면장은 면장(面長)이라는데 그 이유가 엉뚱(?)합니다. 면리(面里) 제도의 시행으로 너도 나도 면장이 되려고 했는데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해서 생긴 속담이랍니다, 소위 빽과 연고가 있어야 면장 감투를 차지하기 쉬웠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속담의 유래로는 무리가 있습니다.
▷ "알아야 면장(免葬)을 한다"는 쓰임도 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장(葬 장사 장)은 시체를 매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아야 면장(免葬)을 한다"는 말은 "학식이 있어야 죽음을 면한다"거나 "아는 사람이 있어야 사형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면장(免葬)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등재(登載)되어 있지 않으며, 거의 쓰이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