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6 [得水之魚(득수지어)~亡者還債(망자환채)]

efootprint 2022. 9. 21. 21:42

 

得水之魚(득수지어)
得:얻을 득, 水:물 수, 之:의(어조사) 지, 魚:고기 어.
어의: 물을 만난 물고기라는 말로, 어떤 일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681)은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이고, 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660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유신과 함께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삼국 통일의 유업을 계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나당이 연합하여 고구려 정복에 나섰으나 당의 군대가 전멸당함으로써 제1차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668년 재차 나당 연합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674년 당(唐)으로부터 받아온 연력(年歷)을 신라의 신력(新曆)으로 바꾸어 썼다.
  문무왕 13년, 이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자주 일어나 왕이 근심하자 김유신이 말했다.
  “지금의 이변은 그 화가 소신에게 있는 것으로서 국가의 재앙은 아니오니 대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그렇다면 내 근심이 더욱 크구려.”
  문무왕이 점술가에게 명해 국가의 안녕과 기유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게 하자 기도를 마친 점술가가 말했다.
  “수십 명의 무장 병사들이 김유신 장군의 집에서 울며 나왔는데 갑자기 없어졌나이다.”
  김유신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들은 필시 나를 보호해 주던 신병(神兵)들일 것이다. 그들이 나의 명이 다함을 알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김유신이 병으로 눕게 되자 왕이 몸소 왕림하여 문병하니, 김유신이 말했다.
  “신이 대왕의 팔다리가 되어 섬기고자 했사오나 명이 다하여 다시 용안을 뵙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동안 과인은 경이 있어 득수지어(得水之魚)인 듯 좋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은 어찌하며, 사직은 어찌하란 말인가?”
  “어리석고 불초한 소신이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다만 자애롭고 밝으신 전하께서 저를 믿고 일을 맡겨 주셨기 때문에 적게나마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으니 곧 태평이 오리라 믿습니다. 신이 보건대 왕실이 처음에는 잘하지만 끝까지 잘하는 일이 적으니 그 점이 염려되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소인배들을 멀리 하시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십시오. 위로는 조정이 화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시어 국가의 위엄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문무왕은 아직도 김유신이 할 일이 태산 같다면서 안타까워하였다.
  김유신은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들과 협력하여 667년 당나라 세력을 끝내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문무왕은 681년, 죽음에 임박하자 ‘내 유골을 화장한 후에 동해에 묻어주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 고 유언하여 세계에서도 유일한 수중릉에 안치되었다.
  이 수중릉은 1967년,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大王岩)에 있음이 확인되어 현재는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왕암에 오르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어 마치 수로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안쪽의 공간은 비교적 넓고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문무왕의 유골은 그 돌 밑에 안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은 우리 후손들이 본받아야 할 교훈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得魚忘筌(득어망전)
得:얻을 득, 魚:고기 어, 忘:잊을 망, 筌:통발 전.
어의: 물고기를 잡으면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했던 통발은 버린다. 즉 필요한 것을 얻고 나면 불필요한 것은
거추장스러워 버리게 된다는 뜻.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의미이다.
문헌: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조선 중종(中宗), 인종(仁宗) 연간에 진묵당(震默堂. 속명:일옥.一玉.1562~1633) 스님이 있었다.
  그는 전북 만경 불거촌(佛居村)에서 출생하여 일곱 살 때 전주의 서쪽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했는데 머리가 영특하고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전주에는 유교학자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잘 통하여 절친했다. 그래서 봉곡은 진묵당을 참 도인(道人)이라 하고, 진묵당은 봉곡을 거유(巨儒)라 불렀다.
  하루는 변산의 월명암에 있던 진묵당이 봉곡을 찾아가 <통감(通鑑)>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봉곡은 진묵당의 부탁이라 빌려주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한번 읽은 책은 찢어버리는 그의 괴팍한 행실이 못미더워 제자 한 사람을 몰래 딸려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진묵당은 봉서사로 가는 사이에 빌려간 통감을 한 권 읽고 나면 찢어 버리고, 두 번째 것을 읽고 나면 역시 또 버리는 것이었다. 뒤따라가던 봉곡의 제자가 그것을 모두 주워 가지고 돌아온 것은 물론이다.
  그 뒤 진묵당이 다시 봉곡을 찾아오자 봉곡이 그를 나무랐다.
  “남의 책을 빌려 갔으면 마땅히 반환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길거리에 모두 버리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그러자 진목당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득어자망전(如得魚者忘筌)이오.”
  이 말은 물고기를 얻은 자가 통발(물고기를 잡는데 쓰는 대나무로 만든 용기)을 버리는 것과 같다. 즉 물고기를 얻었는데 무엇하러 통발을 챙기겠느냐는 뜻이다.
  약이 오른 봉곡이 시험 삼아 <통감>의 각 대목을 낱낱이 물으니 진묵당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정확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진묵당은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술이라고 부르면 마시지 않고,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시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는 1633년 72세로 입적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麻衣太子(마의태자)
麻:삼 마, 衣:옷 의, 太:클 태, 子:아들 자.
어의: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왕자가 마의(麻衣)를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여생을 마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을 비유한다.
문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 재위927~935) 때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의 잦은 침공으로 국력이 극도로 악화되고, 변방도 야금야금 약탈당해 영토가 좁아졌다. 거기에다가 고려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순왕은 대신들과 태자에게 피폐한 백성들을 그냥 둘 수 없으니 고려에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태자가 비분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천년사직(千年社稷)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내어주려 하십니까?”
  경순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외적으로는 백제의 침공이 잦고, 내적으로는 군웅이 할거하여 나라의 위태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죄 없는 백성들을 전쟁터에 내몰아 피를 흘리게 하는 짓은 차마 못 하겠다.”
  결국 군신회의(君臣會議)에서 찬반토론 끝에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태자는 부왕에게 통곡으로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 : 겨울금강산의 이름)에 들어가 바위를 지붕삼아 평생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으면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태자가 삼베옷을 입고 절개와 위신을 지켰다고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불렀다.
  경순왕은 고려의 태조로부터 유화궁(宥和宮)을 하사받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맞아 정승(政丞)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그리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莫非天運(막비천운)
莫:없을 막, 非:아닐 비, 天:하늘 천, 運:운수 운.
어의: 하늘의 운은 막지 못한다는 말로,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태종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다.
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둘째 아들 방과(芳果.정종.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이 되었다. 1400년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1367~1422)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어 함흥으로 은거해 버렸다. 태종은 태상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성석린(成石璘), 박순(朴淳) 등을 태상왕이 은거하고 있는 함흥으로 보냈으나 모두 죽임을 당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 함흥차사(咸興差使)이다. 태종은 마지막으로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불러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아버지를 꼭 모셔 오도록 간곡히 부탁했다.
  이성계와 가깝게 지냈던 무학대사는 석왕사에서 이성계를 만나 그간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태종에 대해 말했다.
  “금상에게 비록 과실이 있다 하나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이제 인륜을 끊어버리신다면 금상은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위가 불안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이 동요되고,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를 통찰하시어 하늘이 맡기신 왕업을 보전케 하시옵소서.”
  이렇게 무학대사의 간절한 설득으로 이성계는 함흥을 떠나 한양(漢陽)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태종은 심복 하륜(河崙) 이하 백관들을 거느리고 친히 의정부까지 출영했다. 구름 같은 차일을 치고 환영 준비를 서두를 때, 하륜이 태종에게 아뢰었다.
  “차일(遮日)의 기둥을 아름드리 나무로 해야 하옵니다.”
  “왜 그래야 되오?”
  태종은 물론 다른 여러 신하들도 괴이하게 여길 뿐, 하륜의 저의를 아는 이가 없었다.
  “차차 아시게 될 테니 꼭 큰 기둥을 써야 되옵니다.”
  워낙에 지혜 주머니인 하륜이요, 또 누구보다도 신임이 두터운 그인지라 태종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리하게 했다.
  이윽고 태상왕의 환도식(還都式)이 엄숙하고도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고 있었다. 이성계는 마련된 상좌에 앉아 태종이 들어와 배알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태종이 곤룡포와 익선관에 위의도 당당하게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가 늠름하게 들어오는 양을 굽어보고 있던 이성계의 얼굴에는 순간 노기의 빛이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돌리려 했던 그였으나 생각이 돌변하여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고얀놈! 네가 무슨 면목으로 그리도 화려하게 내 앞에 나타난단 말이냐?”
  순간 그는 옆에 놓인 활을 들어 태종을 향하여 시위를 당겼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 태종은 날쌔게 기둥 뒤로 몸을 피했고, 화살은 푸르르 날아가 차일의 큰 기둥에 꽂혔다.
  이성계는 화살을 내던지면서 탄식했다.
  “천운은 어쩔 수가 없구나.(莫非天運.막비천운)”
  이어서 헌주(獻酒) 의식이 진행되었다. 물론 태종이 손수 술을 따라 부왕에게 올려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하륜이 태종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아직도 태상왕의 노기를 측량키 어렵사오니 시관(侍官)으로 하여금 잔을 대신 드리게 하옵소서.”
  이에 태종이 술은 자기가 손수 따랐지만 그 잔은 시관을 시켜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긴 한숨과 함께 소매 속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던져버리고, 잔을 받으며 말했다.
  “어찌하랴! 하늘이 정한 운수로다.”
  그제야 옥새를 태종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옛다. 이놈! 탐내던 게 바로 이것이지?”
  태종은 세 번 사양하는 척하다가 그것을 받았다.
  이성계는 왕위에서 7년, 상왕으로 10년 만인 춘추 74세에 승하했다.
  한편, 태종으로 하여금 위기를 모면케 했던 하륜은 실로 태종의 명참모요, 팔과 다리와 같은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많은 공로를 세웠으나 이성계로서는 얄밉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하륜은 꿈에 이성계의 노기 찬 꾸지람을 듣고 병을 얻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태종은 구파세력의 거물인 정몽주를 암살하고, 여덟째 아우 방석에 이어 일곱째 아우 방번(芳蕃)도 죽였다. 나중에는 바로 위 형인 방간(芳軒)마저 평정했다. 그러니까 왕위를 승계하기 위해서 형과 아우 셋을 죽인 것이다.
  그는 억불숭유 정책을 펴고, 사병(私兵)을 혁파했으며, 호패법(號牌法) 실시, 주자소(鑄字所) 설치, <고려사(高麗史)> 편찬, 신문고 설치 등 많은 치적을 남긴 후 셋째 아들 세종(世宗)에게 선위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萬德慈善(만덕자선)
萬:일만 만, 德:큰 덕, 慈:사랑할 자, 善:착할 선.
어의: 만덕이 베푼 자비로움이라는 말로, 어렵게 돈을 모아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경우를 비유하여 쓴다. 제주도
의 기녀 김만덕의 선행에서 유래했다.
문헌: 조선사의 여인들(朝鮮史의 女人들)

 

  조선 정조(正祖.1752~1800) 때 김만덕(金萬德)은 제주도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라도 나주에 왕복하면서 특산물인 미역과 전복, 귤 등을 파는 상인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보리와 밀을 경작하여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꾸러나갔다.
  그러나 김만덕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산이 기울어 기녀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점차 나이가 들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자 자신이 양인의 신분임을 내세워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장사를 시작, 객주집을 차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은 돈을 밑천으로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역을 시작하였는데 쌀과 옷감과 약재 등 육지에 귀한 것을 제주도에서 보내 30여 년의 노력 끝에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었다.
  그때 제주도에는 몇 년째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곳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하늘의 일이니 인력으로는 어절 수 없는 일이라며 방관만 하고 있었다.
  김만덕에게는 이웃들의 고통이 결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구나. 풀뿌리, 나무뿌리까지 캐 먹으면서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니, 저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인데 어찌 외면만 하겠는가.”
  김만덕은 조정에서도 손을 쓸 수 없었던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구제하고자 고생하여 모은 돈을 떨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여 나누어 주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자선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조는 김만덕을 궁에 불러들여 ‘내의원 의녀반수(內醫院 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리고, 칭찬하였다.
  “네가 여자의 몸으로 천여 명의 귀중한 목숨을 살려냈으니 참으로 갸륵한 일이다. 남을 위해 자기 재산을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거늘 주저 없이 자선을 베푼 것은 너의 마음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까닭인 것이다.”
  정조는 그녀를 격려하는 뜻으로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후, 그녀는 평범한 촌부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현종 6년,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그녀의 행적에 크게 감동하여 ‘은광세(恩光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 라고 쓴 편액을 써서 그녀의 후손에게 보냈다. 정승 체제공은 만덕의 행실을 기록한 전기를 쓰기도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忙僧渡水(망승도수)
忙:바쁠 망, 僧:중 승, 渡:건널 도, 水:물 수.
어의: 바쁜 스님의 물 건너기란 말로, 되는 일이 없이 이리저리 모이기만 하는 것을 뜻한다.
문헌: 용제총화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관계로 스님에 대한 항설이 많았다. 이 이야기도 그런 배경에서 유래했다.
  한 스님이 과부에게 장가를 가려 하자 마땅찮게 생각한 상좌가 남녀가 화합할 때에는 생콩가루를 먹고 물을 마시면 최고로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스님은 상좌의 말대로 생콩가루를 물에 타 먹고 과부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생콩가루를 먹고 물을 마시면 설사가 나기 마련이다. 신방에 들어간 스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과부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뱃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뒤가 급해서 겨우 참고 막 변소로 가려 하는데 눈치 없는 과부가 들어와 툭 쳤다. 그러자 새 이불에 배설물이 쏟아져 악취가 진동했다. 과부는 질겁을 하고 스님을 내쫓아버렸다.
  스님이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하얀 메밀꽃이 달빛에 비쳐 개울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스님은 그곳이 냇물인 줄 알고 옷을 벗고 들어가니 밭이었다.
  다음에 또 하얀 물이 나타나니 이번에는 속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걸어가니 그건 진짜 물이어서 옷이 모두 젖어 버렸다. 물속에서 기어 나와 할 수 없이 옷을 말리느라 다리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동네 부인들이 와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있는 스님을 발견하고는 ‘우’ 하고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팼다.
  스님은 실컷 얻어맞고 옷을 벗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나가던 행인이 스님의 음경은 약에 좋다며 자르려고 달려들었다. 혼비백산한 스님이 줄행랑 끝에 겨우 절로 돌아와 문을 열라고 했으나 대답이 없자,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자 상좌가 ‘이놈의 개가 어제 밤에 와서 기름을 훔쳐 먹더니 오늘 또 왔다.’ 고 하며 몽둥이로 내리쳤다. 스님은 급한 나머지 ‘나일세! 나란 말이야!’ 하며 쓰러지자 그때서야 상좌가 업고 들어갔다.
  이때부터 무슨 일을 하다가 거듭 낭패하는 일을 가리켜 망승도수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亡者還債(망자환채)
亡:죽을 망, 者:놈 자, 還:돌아올 환, 債:빚질 채.
어의: 죽은 자가 빚을 갚아주었다는 말로, 채무자가 죽은 사람을 핑계로 빚을 탕감받은 고사에서 유래했다. 터
무니없는 일을 끌어대어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용제총화 잡기(傭齊叢話 雜記)

 

  예산(禮山)의 고리대금업자 김장득(金長得)은 우직하면서도 인색하기 짝이 없어 빚을 주면 독촉이 불같았다. 때문에 그에게서 돈을 빌린 강진해(姜鎭海)라는 사람도 그에게 톡톡히 당했다. 그래서 그에게 골탕을 먹여주려고 꾀를 내어 아내에게 말했다.
  “장득이가 내일 틀림없이 종놈을 보내 빚을 독촉할 텐데, 그러면 당신ㅁ은 지금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오. 속닥속닥!”
  이튿날, 그는 혿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시킨 대로 머리를 풀고 슬피 울었다. 그때 아니니 다를까 김장득의 종이 찾아왔는데, 그 광경을 보고는 웬일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어제 저녁 늦게 돌아와 식은 밥 몇 숟갈을 뜨고는 밤중에 가슴을 치더니 별안간 죽었지 뭐예요. 이제 어린 것들하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흑!흑!흑!”
  종이 급히 돌아가 보고 들은 대로 고하자 장득은 돈을 떼이는가싶어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데 며칠 후, 뜻밖에 죽었다던 강진해가 찾아왔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소인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행히 다시 살아나 이제야 겨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네. 그럼 자네는 저승 구경도 했겠구먼?”
  “예. 저승도 이승과 비슷하던걸요.”
  “그래? 어디 저승 얘기 좀 들어보세.”
  “예. 얼굴이 흉악한 차사가 소인을 끌고 가는데 꼭 이승과 같더라고요. 염라국에 들어서니 큰 궁전에 귀신 졸개들이 늘어서 있고, 한 험상궂게 생긴 자가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이가 바로 염라대왕이라고 하더군요. 그 염라대왕이 책을 들추어 보더니 ‘이자는 아직 오지 않을 사람이니 당장 돌려보내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차사를 따라 나오는데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소인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기에 자세히 보니 바로 어르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돌아가신 우리 선친을 뵈었단 말이냐?”
  “예. 그런데 어르신이 워낙 남루한 모습이어서 처음에는 몰라뵈었다가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지금은 거지 신세가 되었다지 뭡니까? 댁의 소식을 물으시기에 자세히 여쭈었더니 눈물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마침 소인의 주머니에 돈이 한 푼 있어서 그것을 드려 외상 술값을 갚게 했는데, 소인의 마음도 매우 슬펐습니다.”
  “그럼 혹시 모친은 못 만나 뵈었느냐?”
  “왜요 뵈었지요. 그런데 황송해서 감히 여쭙기 어렵습니다.”
  “괜찮다. 우리 둘뿐인데 뭘 망설이느냐?”
  “물으시니 부득이 실상을 말씀 드릴 수밖에 없군요. 사실은 소인이 차사와 한 객주 집에 들렀더니 그 집 안주인이 바로 어르신의 모친이 아니겠습니까? 모친께서 반가워하시며 좋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주시기에 잘 먹고 나왔습니다.”
  “그럼 우리 모친께서는 어떻게 살고 계시던가?”
  “불행히도 어르신의 모친은 어르신의 선친과 의가 맞지 않아 헤어지고, 소인의 아버지와 함께 사시는데 아주 정이 깊다고 했습니다.”
  김장득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사실이 누설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게. 그 대신 자네가 빌려간 돈은 모두 탕감해 주겠네.”
  그 후부터 강진해는 김장득의 집을 뻔질나게 찾아가서 밥과 술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금전도 마음대로 빌려 썼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