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사성어7 [買夢得華(매몽득화)~無蝶無香(무접무향)]
買夢得華(매몽득화)
買:살 매, 夢:꿈 몽, 得:얻을 득, 華:빛날 화.
어의: 꿈을 팔아 영화를 얻는다는 말로, 신라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태종무열왕의 왕후가 된 고사에서 유래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비유해서 쓴다.
문헌: 신라사화(新羅史話)
신라의 김유신(金庾信.595~673)은 가야국(伽倻國) 사람으로 서현(舒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 김유신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김유신에게는 보희(寶姬)와 문희(文姬)라는 두 명의 누이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의 선도산(仙桃山)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그 양이 엄청나 서라벌이 모두 오줌물에 잠겨버렸다. 그래서 동생 문희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자 문희는 그 꿈을 팔라고 졸라 비단옷감 한 벌을 주고 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정월 어느 날, 김유신이 김춘추를 데리고 와서 자기 집 앞에서 공차기를 하고 놀았다. 그러다가 짐짓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떼어놓고는 자기 집에 들어가 꿰매자고 권했다. 춘추는 유신을 따라 들어갔다. 유신은 누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고름을 달아 주도록 권했다.
“오라버니, 남녀가 유별하온데 어찌 그런 일로 남의 남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보희는 양갓집 처녀로서 책잡힐 짓을 걱정하여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문희가 자청하여 떨어진 옷고름을 달아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문희는 춘추와 깊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유신이 알게 되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잉태를 하다니, 이는 우리 가문을 더럽힌 것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유신은 문희를 짐짓 크게 꾸짖으면서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선덕여왕의 남산 행차에 맞추어 자기 집 뜰에다 장작과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가 치솟게 했다.
왕이 고을 복판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웬일이냐고 묻자 신하들이 아뢰었다.
“김유신 공의 누이가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임신하였기로 그 죄를 물어 화형에 처한다 하옵니다.”
“그럼 임신시킨 남자는 누구라 하더냐?”
그러자 왕을 모시고 있던 김춘추의 얼굴색이 검게 변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여왕은 조카 춘추의 소행임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한 짓이로구나. 빨리 가서 구해주도록 해라.”
일이 이렇게 되자 김춘추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문희와 혼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에 이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문희는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어 삼국 통일을 내조했고, 오남오녀를 낳았으며 득화(得華)한 생활을 하였다. 꿈을 판 보희는 평범한 무명의 여성으로 일생을 마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妹好妹夫樂(매호매부락)
妹:누이 매, 好:좋을 호, 夫:지아비 부, 樂:즐거울 락.
어의: 누이 좋고 매부 좋다. 조선 숙종 때 한 능참봉에게서 유래한 말로, 한 가지 일로 여러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숙종(肅宗) 때 안동의 선비 권도온(權道溫)은 천품이 어질고 집안도 넉넉해서 춘궁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새로 부임한 부사(府使)는 그가 선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학(經學)에도 밝은 것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양주의 능참봉(陵參奉)으로 임명받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이 60의 노구를 이끌고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권 참봉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상처를 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러한 그를 두고 하늘도 무심하다면서 동정했다.
권 참봉은 양주에 부임하여 별검(別檢) 김우항(金宇杭)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능을 지키는 사람들이 허름한 차림의 총각 하나를 끌고 왔다. 권 침봉이 그 곡절을 묻자 총각이 대답했다.
“소인은 70이 넘은 어머니와 35세의 미혼 누님을 모시고 나무를 해다가 팔아 연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와서 나무를 할 수 없어 능 안까지 들어가 나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총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권 참봉은 총각의 처지가 안타까워 김 별검에게 벌하지 말고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김 별검 역시 그를 가엾게 여겨 잘 타이른 다음 가여운 생각에 밥상을 차려주니 총각은 국과 김치만 개 눈 감추듯 먹고 밥은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어머니와 누님에게 갖다 드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권 참봉은 그 밥을 다 먹게 하고 따로 쌀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주어 어머니를 봉양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추위는 더욱 심해져 가는데 그 총각이 또 붙들려 왔다.
권 참봉이 화가 나서 물었다.
“왜 또 그랬느냐?”
“참봉 어른을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만 능 밖에 있는 삭정이(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려고 나무에 올랐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능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김 별검이 말했다.
“또 용서해 준다 해도 총각의 형편이 나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김 별검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지금 참봉이 홀로 사는데 총각의 누이가 35세 노처녀라고 하니 두 사람이 혼인을 하면 처가도 돌보아 주게 되고, 권 참봉도 일신이 평안해질 터이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권 참봉은 김 별검의 제안이 싫지 않아 총각에게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오게 했다. 물론 총각의 집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60세의 신랑과 35세 신부의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妹好妹夫樂.매호매부락) 경사였다.
세월이 흘러 그 사이 별검 김우항은 부사로 승진하여 안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권 참봉이 찾아와 말했다.
“부사 나리의 배려로 지금은 23세와 24세의 두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그 아들들이 올해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동시급제라는 경사를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김 부사는 권 참봉의 인사를 받고 그를 백마에 태워 고향 마을로 가게 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환영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賣畵買樂(매화매락)
賣:팔 매, 畵:그림 화, 買:살 매, 樂:즐거울 락.
어의: 그림을 팔아 즐거움을 샀다는 말로, 정조 때의 풍속화가 김홍도가 그림을 팔아 풍류를 즐긴 일화에서 유래했다. 자기가 즐기는 일을 호기롭게 해내는 것을 비유한다.
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홍제전서(弘濟全書).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조선 정조(正祖.1752~1800) 때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는 풍속화의 대가였다. 그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현감 대우를 받았지만 가정생활은 돌보지 않고 그림과 풍류에만 젖아 살았다.
그가 어느 말, 한 마을을 지나다가 울타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매화나무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이 나무를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팔 거요?”
“나도 매우 아끼는 건데. 정히 사시려면 2백 냥만 주십시오.”
“2백 냥이라…….”
김홍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끼니를 이어 가기도 힘든 형편에 2백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매화나무를 살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매화나무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며칠 후, 큰 부자로부터 그림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홍도는 서둘러서 불과 며칠 만에 그림을 완성해 주고 3백 냥을 받았다.
돈을 받은 그는 2백 냥을 주고 예전 집주인과 흥정했던 그 매화나무를 샀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성대한 술잔치를 마련하여 친구들을 대접했다.
김홍도는 아름다운 매화를 감상하면서 가까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무척이나 흡족했다. 친구들도 흥겹게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겼다.
“여보게, 단원! 자네가 이런 자리를 마련할 때도 있으니 세상 많이 좋아졌구먼. 그런데 자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훌륭한 매화나무도 사고, 이렇게 푸짐한 음식을 마련했는가?”
김홍도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그림을 그려 주고 3백 냥을 받았네. 그 중에서 2백 냥으로는 매화를 샀고, 8천 냥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는 데 썼네. 그리고 2백 냥은 쌀과 땔나무를 샀지. 어떤가? 이만하면 사나이 생활이 괜찮지?”
“아암. 역시 자네답네.”
끼니도 이어 가기 힘든 생활이었지만 아름다움과 풍류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진 모든 재물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김홍도였다.
그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등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화를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麥飯政丞(맥반정승)
麥:보리 맥, 飯:밥 반, 政:정사 정, 丞:도울 승.
어의: 보리밥 정승이라는 말로, 조선 정종 때의 정승 김종수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사회적 신분이나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근검절약하는 것을 비유하여 쓴다.
문헌: 정조실록 몽오집(正祖實錄 夢悟集)
조선 正宗 때의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는 매우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관습으로 지방관이 새로 임명되면 부임하기 전에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전직 대신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김종수는 신임 지방관들이 찾아오면 허름한 베옷에 나막신을 끌고 나와서 반가이 맞이하며 인사를 받은 후에 굳이 붙들어 앉히고 밥 한 끼를 대접했다.
그러면 그들은 노재상이 권하는 것이라 사양을 못하고 황송해하며 밥상을 받게 되는데, 밥상에는 언제나 꽁보리밥에 김치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잔이 전부였다.
지방관들로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험한 음식을 먹어 본 일이 없고, 또 장차 부임하면 호의호식할 터라 그런 음식이 목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작 겸상하고 있는 김 정승이 맛있게 먹는지라 억지로라도 아니 먹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고역 중의 상고역이었다. 김 정승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어떤가? 이 밥 먹기가 어렵지? 자네가 부임하면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데, 그때마다 이 밥상을 생각하게. 자네가 먹는 진수성찬은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할 자네들만 잘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앞으로 부디 이 늙은이 말을 잊지 말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괴롭히지 말게.”
그의 충고를 들은 지방관들은 큰 깨달음을 얻고 백성을 잘 보살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面鬼心水(면귀심수)
面:낯 면, 鬼:귀신 귀, 心:마음 심, 水:물 수.
어의: 얼굴은 귀신처럼 추하지만 마음은 물처럼 맑다. 즉 겉보기는 나빠 보이지만 속마음은 더없이 고우니. 겉만 보고 그 사람의 마음까지 속단하지 말라는 뜻.
문헌: 마산의 혼(馬山의 魂).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고종(高宗. 1192~1259) 때 주열(朱悅)은 첨의부사를 지냈다. 그는 치적이 쌓이자 관찰사로 승진했고, 그에 따른 위엄과 명성이 높아져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가 맨 처음 추천되어 사람들은 그를 전문 봉명사신(奉命使臣)이라고 불렀다.
주열은 도량이 컸다.
한번은 어느 고을에 가서 유숙을 하는데 방바닥이 갈라져 있어 그 틈으로 불씨가 들어와 소지품을 다 태워버렸다. 아전들은 불호령이 내릴 것이라 예상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는 잠잠했다. 큰 태풍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미풍도 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또 한번은 어느 고을 수령이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는 ‘탐욕스런 무부가 조그만 뇌물을 받은 것은 개가 음식 찌꺼기를 먹는 것과 같으니 들춰서 문제 삼을 가치가 없다.’ 하고 불문에 부치니, 그 수령은 다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어떤 자리에서 재상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자세가 공손하지 않은 지라 그것을 거만하게 본 한 아전이 과잉 충성하여 말했다.
“재상이 말씀하시니 마땅히 땅에 엎드려 들으시오.”
그러자 주연이 말했다.
“재상의 말을 엎드려 들어야 한다면 임금님의 말씀은 땅을 파고 들어가서 들어야 된단 말입니까?”
하니 그 아전은 아무말도 못했다.
그가 능력 있는 관리요, 훌륭한 외교관이었으나 얼굴이 못생기고, 코가 귤과 같았다. 때문에 한 연회장에서 그가 공주에게 술을 헌수하자 공주가 외면하며 말했다.
“왜 늙고 더러운 귀신같은 사람이 술을 따르는가?”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이 늙은이는 얼굴이 추하기는 귀신같으나 마음이 맑기는 물과 같으니라.”
이에 공주는 무한하여 곧 사과하고 소중히 잔을 받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棉授花衣(면수화의)
棉:목화 면, 授:받을 수, 花:꽃 화, 衣:옷 의.
어의: 목화는 꽃과 옷을 제공하여 준다는 말. 두 가지를 다 이롭게 해주는 경우를 뜻한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韓國人의 智慧). 조선오백년야사(朝鮮五百年野史)
조선 영조(英祖)의 비(妃) 정성황후(貞聖皇后)가 별세하여 3년상을 치자 영조가 직접 새로운 중전을 간택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기라성 같은 사대부의 규수들을 차례로 둘러보는데, 한 규수가 방석을 피해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영조가 물었다.
“어찌하여 방석에 앉지 않고 그리 앉아 있는가?”
“네, 비록 종이라고는 하오나 아버지의 존함이 맨땅 위에 있는데 제가 감히 방석 위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왕비를 간택할 때는 그 규수가 뉘 댁의 딸인지 알아보기 쉽도록 저마다의 방석머리에 아버지의 명패를 두었는데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영조는 그 규수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탄했다.
영조가 다시 여러 규수들에게 시험하여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가?”
어떤 규수는 산골자기가 가장 깊다 하고, 어떤 규수는 물이 가장 깊을 것이라 하는 등 대답이 구구했으나 유독 조금 전의 그 규수만이 다르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사물의 깊이는 자로 잴 수가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조가 또 물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꽃은 무엇인가?”
어떤 규수는 복숭아꽃이 좋다 하고, 혹은 모란꽃이 좋다 하고, 혹은 해당화가 좋다고 하는데, 그 규수만은 또 달랐다.
“목화꽃이 가장 좋습니다.”
영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다른 꽃은 한때만 보기 좋으나 목화꽃은 피었을 때에는 꽃이 좋고, 나중에는 솜이 되거나 무명베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좋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지혜로운 대답을 들은 영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중전으로 맞으니 바로 정순황후(貞純皇后)였다.
훗날 정조가 이 일을 상기하여 조관들에게 화부화(花復花)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채제공(蔡濟恭) 한 사람만이 맞혔다 한다.
그 규수가 대궐로 들어가니 그녀의 의상을 만들기 위하여 상궁이 나인에게 치수를 재라 했다. 그러자 상궁에게 무례함을 지적하여 말하였다.
“내가 이제 중전이 될 몸이니 상궁이 직접 재어야 되지 않는가?”
그녀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命如牛蝨(명여우슬)
命:목숨 명, 如:같을 여, 牛:소 우, 蝨:이 슬.
어의: 소의 목숨이나 이의 목숨은 같다. 즉 큰 동물이나 작은 미물이나 그 생명의 가치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
문헌: 이야기 한국역사(이야기 韓國歷史), 한국인물사(韓國人物史)
고려 고종(高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서 말했다.
“엊저녁에 어떤 사람이 큰 소를 죽이는 것을 보았네. 그 광경이 너무 참혹하여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더군. 앞으로는 맹세코 쇠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동물의 고기는 먹지 않으려고 하네.”
이규보가 말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화로를 끼고 앉아 옷의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측은해서 못 견디겠더군. 그래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작정했네.”
“아니 그건 미물이 아닌가. 나는 큰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비참한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인데, 그대는 하찮은 미물을 들먹여 딴청을 부리니 이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화를 내자 이규보가 말했다.
“그게 아닐세! 사람은 물론 소, 말, 돼지, 염소 같은 축생과 하찮은 벌레까지 피를 가진 모든 생물은 죽기를 원치 않네. 그런데 어찌 큰 것만 대수이겠는가. 소의 죽음이나 이의 죽음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일세. 그래서 예로 들어 말한 것이니 노여워하지 말게. 내 말을 납득하지 못하겠으면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안 아플까? 한 몸에 있는 것은 크건 작건 모두 피와 살로 되어 있기에 그 아픔은 같은 것일세. 더구나 소와 이는 독립된 생명체인데 어떤 생물은 죽음을 싫어하고, 어떤 생물은 죽음을 좋아하겠는가? 돌아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게나. 그래서 달팽이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봉황처럼 볼 수 있는 마음을 기르게. 그런 뒤에 다시 도(道)를 논하기로 하세.”
이규보는 걸출한 시호(詩豪)로서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그는 시와 거문고와 술을 즐겨 자칭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했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貌比智德(모비지덕)
貌:모양 모, 比:견줄 비, 智:지혜 지, 德:큰 덕.
어의: 외모보다는 지혜와 덕이 우선이라는 말로, 고려시대의 장수 강감찬을 두고 이루어진 말이다. 사람은 못생긴 외모보다는 지혜와 덕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문헌: 이야기 한국사(韓國史),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고려시대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명장 강감찬(姜邯贊.948~1031)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태어날 때를 비롯해서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는 한양의 남쪽 관악산 근처에서 태어났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곳을 낙성대(落星臺)라 이름 지었는데.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내려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고려의 정세는 매우 어지러웠다. 인접해 있는 거란(契丹)이라는 나라가 호시탐탐 침략을 일삼아 고려 사람들은 뛰어난 장수가나타나 그들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네, 어젯밤에 우리 동네로 큰 별 하나가 내려오는 것 봤나?”
“그랬어? 뛰어난 장수라도 태어나려나?”
어느 날, 관악산 아래 한 마을 사람들은 별이 내려앉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한편 강궁진의 집안에서도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젯밤 꿈에 별이 제 품 속에 와서 안겼어요.”
“그래요? 그건 틀림없이 태몽이오. 당신이 드디어 훌륭한 아이를 낳을 모양이구려.”
이렇게 해서 강감찬이 태어났는데 아이는 못생긴 얼굴에 키가 작아 동네 아이들이 놀리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았다.
“야. 쟤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 얼굴이 그물망보다 더 얽었잖아.”
강감찬은 이렇게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 자라야 했다. 마음속으로는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처지를 안타깝게도 여겼다.
어머니는 그런 강감찬의 마음을 읽고 따뜻이 다독여 주었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었다.
“은천아,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못할 일이 무엇이며, 또 잘났다 한들 기쁠 것이 무엇이겠느냐? 중요한 것은 지혜가 있고, 지식이 만ㄹ아야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고 남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란다. 지급부터는 얼굴이 못생겨 창피하다 생각하지 말고 덕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하여라.”
“어머니, 그럼 어떻게 하면 지혜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학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지혜가 깊어지고, 마음을 넓게 써야 덕이 쌓이는 것이며,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네 자신을 두고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면 자만심이고, 남이 너를 높게 봐야 진실로 높은 사람일 것이니라. 외모의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야.”
어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은 은천은 그대부터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못생겼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노력하여 학식과 지혜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강감찬은 유학(儒學)은 물론, 불경(不經)과 병서(兵書)까지 통달하여 고려 성종 때에는 과거에서 갑과(甲科)에 일등으로 뽑혀 예부시랑(禮部侍郞) 등 요직을 지냈다. 또 1018년, 거란의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에는 많은 군사들이 항복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맞서 싸워 큰 공훈을 세움으로서 왕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꽃을 여덟 송이나 하사받는 영광도 얻었다. 그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훈 때문이었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도 못생긴 강감찬이 오히려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은 모두 어머니의 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母心之釘(모심지정)
母:어미 모, 心:마음 심, 之:어조사 지. 釘:못 정.
어의: 어머니 마음에 박힌 못이라는 말로, 자식이 잘못할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에 생기는 상처를 이르는 말이다. 효도할 것을 훈육할 때 쓰인다.
문헌: 정봉채한담(鄭鳳采閑談)
한 홀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애지중지하면서 정성들여 키웠다. 아들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어딘지 점점 버릇이 나빠졌다.
어느덧 나이 열다섯 살의 애티를 벗어나 웬만큼 세상 물정을 알 때가 되었는데도 천방지축이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어르고 타일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든 눌러 앉혀 제자리를 잡도록 해주어야 할텐데 하며 속만 태웠다. 그래서 그날부터 아들이 속을 석일 때마다 마루 가운데 서 있는 기둥에다 못을 하나씩 박았다.
십여 년이 지나자 더 이상 박을 수 없을 정도로 못이 다닥다닥 박혔다.
어느 날, 아들이 기둥에 박힌 못을 보고 물었다.
“어머니! 여기에 왜 못을 이렇게 박아 놓으셨습니까?”
어머니가 눈물 젖은 얼굴로 아들을 보며 말했다.
“그건 네가 나를 속상하게 할 때마다 그 표식으로 박아 놓은 것이니라.”
어머니의 울음 섞인 말을 듣고 아들은 생각했다.
‘아, 내가 그간 어머니께 못 할 일을 너무 많이 했구나.’
그 후부터 아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날마다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힘든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때마다 기둥에 박힌 못을 하나씩 빼내었다. 그렇게 하기를 십여 년. 드디어 박혔던 못이 모두 빠지고 없었다. 기쁘게 해 드린 횟수가 마음을 아프게 한 횟수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불렀다. 그리고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기둥을 보거라. 처음에는 네가 나를 실망시켜 못을 박았는데 어느 때부턴가 네가 나를 기쁘게 해주기에 그때마다 하나씩 뽑아냈다. 이제 못이 다 뽑히고 하나도 남지 않았구나. 고맙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하여 칭찬했다.
아들은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을 보고 나서 기둥에 뚫린 못자국을 보더니 엉엉 울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이 기둥을 보니 벌집과 같이 상처투성이군요. 어머니의 마음도 이 기둥과 같이 상처투성이일 것을 생각하니 ……. 흑!흑! 이제부터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안하게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가슴에 꼭 안고 눈물을 흘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木中無花(목중무화)
木:나무 목, 中:가운데 중, 無:없을 무, 花:꽃 화.
어의: 나무속에는 꽃이 들어 있지 않다. 즉 꽃은 나무속에 있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모든 일은 억지로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되고 순리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고금청담(古今淸談)
치악산(雉岳山)의 뒤편 계곡에 도둑들의 소굴이 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상원사(上元寺)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뭐. 스님이면 다야? 너희들은 편히 앉아서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돈으로 먹고 살고 있으니 무위도식하기는 우리와 다를 바 없잖아, 어차피 너희들도 땀 흘려 번 것이 아닌데 조금 나눠 먹자는 것이 뭐가 나쁘냐?”
도둑들이 윽박지르면 스님들은 저항 한 번 못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주어야 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몇몇 스님들은 관가에 알리자고 했으나 주지 스님은 한사코 허락하지 않았다.
“저들이 미혹(迷惑)하여 그런 것이니 원한을 사서는 안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 주지 스님의 방에 도적이 칼을 들고 들어 왔다. 주지 스님은 손님을 맞이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히 마주 앉았다.
“그 칼을 버리시오.”
“헛소리 하지 말라. 이 칼이야말로 내 수호신이다.
“칼을 든 자는 칼로 죽게 되는 법이오.”
그러나 도적은 코웃음을 치면서 쏘아 보았다.
“너희들은 불법(佛法)이니 무어니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해괴한 말들을 주절거리는데, 우리 같은 도적들은 주린 창자를 채우는 게 급하단 말이야!”
“불법을 올바로 깨달으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소.”
“도대체 불법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
“당신들의 가슴속에 있소. 다만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오.”
“그럼 네 가슴에도 있겠구나?”
“그렇소.”
“거. 잘됐다. 내가 보고 싶으니 어디 네 가슴 좀 열어보자.”
도둑은 시퍼렇게 날선 칼을 주지 스님의 가슴에 겨누었다. 주지 스님은 낄낄 웃으며 말하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고 그 나무를 쪼개면 그 속에 꽃이 들어 있더이까? 꽃은 나무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 그 칼로 불법을 범하지 마시오.”
그 말에 한참 생각하던 도둑은 그제야 자기가 한 짓을 깨우친 듯 칼을 내던지고 주지 스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木枕絞首(목침교수)
木:나무 목, 枕:베개 침. 絞:목맬 교, 首:머리 수.
어의: 목침을 교수형에 처하다. 조선시대의 문인 임형수가 정쟁에 휘말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목침을 교수형에 처하게 해 희롱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는 여유를 이른다.
문헌: 한국기인열전(韓國奇人列傳), 한국인의 해학(韓國人의 諧謔)
조선 11대 중종(中宗) 때의 문인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04~1547)는 쾌활한 성격에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그는 명종 때 부제학에까지 올랐으나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 후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약을 받던 날,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였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내려놓자 하인이 울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안주를 가져왔다. 그는 하인이 가져온 안주를 물리치면서 말했다.
“치워라! 술도 말로 마실 때에는 안주가 없는 법인데, 사약에 무슨 안주란 말이냐!”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 처자와 작별을 하고 나오면서 열 살 난 아들을 불러 일렀다.
“너는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마라. 아니,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인간이 될 터이니 배우기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마라.”
그가 밖으로 나오자 금부도사가 물었다.
“이제 사약 받을 준비가 다 되었습니까?”
임형수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나는 약을 마시고 고통스럽게 죽느니 목을 졸려 빨리 죽는 것이 좋은데 그리해도 되겠는가?”
그러자 금부도사는 어차피 마지막인데 그만한 뜻 하나 못 들어주랴 싶어 허락했다.
허락을 받은 그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벽에 구멍을 뚫고 노끈을 그곳으로 내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노끈을 내 목에 걸었으니 힘껏 잡아당겨라!”
금부 나졸들은 힘껏 노끈을 잡아 당겼다.
얼마 후, 이만하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임형수는 노끈에다 목침을 걸어놓고 그 곁에 누워서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평생 해학을 즐겨 왔는데,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니 섭섭하여 마지막으로 한번 해본 것이니 그리 노여워 말게.”
그러고 나서 임형수는 폐하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큰절을 올리고 사약을 들이켰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해학을 잃지 않은 큰 그릇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夢負三椽(몽부삼연)
夢:꿈 몽, 負:질 부, 三:석 삼, 椽:서까래 연.
어의: 꿈에 서까래 석 장을 짊어졌다는 말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기 전 꾼 꿈에서 유래했다. 소망했던 일을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물사(韓國人物史)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말을 타고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원(元)나라 유인우(柳仁雨)가 공민왕 5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침공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대응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동북면 여진 출신의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막아냈으며, 원(元)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납함출)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함흥평야에서 물리쳐 나라를 구했다. 또 명나라의 힘을 입은 여진의 추장 호바투(胡拔都.호발도)가 침입하자 길주(吉州)에서 물리쳐 함경도 땅을 수복했다.
우왕 14년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는 문제로 최영에 의해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신진 유학자와 이성계가 반대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되어 요동을 향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켜 돌아와서 최영 일파를 숙청하고, 1392년 조선을 개국하였다. 그리고 1394년에는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안변에 머무를 때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괴이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즉, 온 동네 닭이 일시에 울고,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 석 장을 짊어지고 나오는데 피었던 꽃들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파자점(破字占)을 잘 친다는 도승을 찾아갔다. 그가 바로 무학대사(無學大師)였는데 그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무학대사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하례 드립니다. 닭 울음소리는 꼬끼오이니, 이는 고귀한 분이 될 것이라는 말이고, 서까래 석 장을 짊어진 모습은 바로 왕(王)자를 뜻하는 것이니, 장차 군왕이 될 것을 뜻하는 꿈입니다.”
“하하! 설마요…….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지요. 또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계획하고 있는 왕업의 결실을 의미하고, 소리가 난다는 것은 국위가 사방에 떨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이성계는 전기한 바와 같이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그는 훗날 무학대사를 만난 곳에 큰 절을 짓고, 왕의 꿈을 해석했다하여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猫脚裁判(묘각재판)
猫:고양이 묘, 脚:다리 각, 裁:마를(판결) 재, 判:판가름 판.
어의: 고양이 다리의 재판이라는 말로, 고양이에 의해서 화재가 나자 송사를 벌였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이든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문헌: 한국인의 야담(韓國人의 野談)
목화 장사를 하기 위해 네 사람이 똑같이 투자하여 목화 값이 살 때에 많은 목화를 사들였다. 목화 값이 오르면 내다 팔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화를 창고에 쌓아두다 보니 쥐가 여기저기에 오줌을 사는 바람에 목화가 누렇게 되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논한 끝에 고양이를 한 마리 공동으로 사다 놓고 넷이서 다리 하나씩을 맡아 책임지고 보살피기로 했다.
그 후부터 창고에 쥐가 들어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잘못하여 왼쪽 앞발을 다치게 되었다. 그 발을 맡은 친구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헝겊으로 감아 주니 고양이는 절름거리면서도 나머지 세 발로 곧잘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불 때는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그만 아픈 다리에 감긴 헝겊에 불이 붙었다. 당황한 고양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목화 창고로 뛰어 들어가 이곳저곳으로 마구 뛰어다녔다. 그러자 불이 여기저기에 옮겨 붙어 창고는 순식간에 불더미에 휩싸이고 말았다. 물론 고양이도 그 안에서 타 죽었다.
큰 손해를 보게 된 세 사람들은 고양이의 다친 다리를 맡은 친구에게 책임이 있다고 따졌다.
“자네의 잘못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이대로 손해를 보고 있을 수는 없네. 그러니 배상을 해주게.”
고양이 발에 난 상처를 치료해준 친구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보게들, 창고에 불을 낸 건 내가 아니라 우리가 공동으로 산 고양이 아닌가. 게다가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 역시 자네들과 똑같이 손해를 보았고……. 그런데 나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니,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세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소리 지르며 싸워도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마침내 고을 사또를 찾아가서 판정을 받기로 했다. 사또를 찾아간 네 친구가 저마다 자기주장을 폈다.
“그러니까 애초에 저 친구가 맡은 고양이 다리를 잘 보살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처에 헝겊을 감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거구요.”
“그래서 손해배상을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저 친구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가 열을 올리는 동안 상처를 치료해준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또의 판결을 기다렸다. 이야기를 경청한 사또가 엄숙하게 말했다.
“듣거라! 목화 값을 물어낼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너희들 세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 세 사람은 돈을 모아서 저 사람에게 목화 값을 물어주도록 해라.”
사또의 판결에 세 친구는 놀라서 물었다.
“사또나리,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저 친구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들이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사또 나리께서 무언가 잘못 생각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판결을 반대로 내린 것 같사옵니다.”
세 친구가 일시에 사또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항의하자 사또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허, 버릇없는지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판결의 근거를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라. 고양이가 다리를 다쳤든, 거기에 헝겊을 감아 불이 붙었던 간에 고양이가 창고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불이 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고양이는 헝겊에 불이 붙자 목화창고로 달려간 것이고, 그 결과 불이 났으니 목화 값은 당연히 그 다리의 주인인 저 친구가 물어내야 합니다.”
사또는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설명했다.
“답답하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그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목화창고로 달려갈 때 어떤 다리를 이용했겠느냐?”
“그야 물론 성한 다리로 달려갔겠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 세 사람이 보살피던 성한 다리가 아니었다면 고양이가 목화창고로 달려갈 수 있었겠느냐? 결국 목화 창고에 불이 붙게 한 건 성한 세 다리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 셋이 저 사람에게 목화 값을 물어 주는 것이 당연하다.”
사또의 설명을 들은 세 친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猫項懸鈴(묘항현령)
猫:고양이 묘, 項:목 항, 懸:매달 현, 鈴:방울 령.
어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다. 방법은 그럴 듯한데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을 일컫는다.
문헌: 순오지(旬五志)
고양이(묘.猫)에게 몹시 시달리는 쥐들이 생존을 위해 상의했다.
“고양이만 없다면 우리들의 생활도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꼭 우리들의 먹을 것이 있을만한 데에 고양이가 있어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대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그러자 한 쥐가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만약 고양이 목에 방울만 매달 수 있다면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쥐들이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 늙은 쥐 한 마리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네 말이 옳네. 그렇게만 되면 두려울게 없겠지.”
늙은 쥐는 좌중을 쭉 둘러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그러자 쥐들은 고개를 숙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오지(旬五志)>는 조선시대 때 평론집이다. 효종 때 학자이며 비평가인 현묵자(玄黙子) 홍만종(洪萬宗)과 정철(鄭澈), 송순(宋純) 등이 1678년 숙종 때 <십오지(十五志)>라고도 한다. 부록에는 130여 종의 속담(俗談)이 실려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無國之王(무국지왕)
無:없을 무, 國:나라 국. 之:어조사 지, 王:임금 왕.
어의: 나라가 없는 왕이라는 말로, 허울만 그럴듯할 뿐 실세가 없음을 이른다.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야기 한국사(新增東國輿地勝覽 이야기 韓國史)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979)의 이름은 부(傅)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그는 927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자 견훤에 의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경순왕 4년(930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의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투항하니 태조 왕건(王建)은 후한 예로 대접하고 상부(尙父)라는 직위를 주었다. 이듬해 2월에 왕건은 기마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경기(京畿)에 이르러 경순왕에게 만나기를 청하므로, 경순왕은 백관과 더불어 임해전(臨海殿)에서 그를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란이 자주 일어나고, 또 견훤이 우리나라를 자주 침해하니 얼마나 분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왕건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다.
왕건이 그렇게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려고 하니 경순왕은 혈성에까지 전송해주며 아우 유렴(裕廉)을 인질로 딸려 보냈다.
왕건 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엄정하여 머무는 동안 일체의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이에 서라벌의 부녀자들이 기뻐하며 말했다.
“전일에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호(豺虎. 승냥이와 호랑이, 사납고 악독한 사람을 이르기도 함)를 만난 것과 같더니, 왕공(王公)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구나.”
왕건은 신라의 왕에게는 금채 비단 말안장을, 관료와 장병들에게는 포백(布帛.옷감)을 선물로 보냈다.
왕건의 즉위 9년(935년) 10월, 경순왕은 강토를 거의 다 빼앗기고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 그래서 군신들과 더불어 왕건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는데, 의견이 분분하자 왕자(마의태자)가 말했다.
“국가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굳게 지키다가 최후에 힘이 다하면 그때 의논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천년사직을 허수로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태자의 간곡한 말에 왕이 말했다.
“이처럼 위태로운 형세로 시간만 끌어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명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문을 보냈다. 그러자 왕자는 통곡하면서 허름한 마로 만든 옷을 입고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
왕건은 경순왕의 글을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어 융숭하게 영접하게 한 후, 신하들을 거느리고 직접 교외까지 마중 나와 위로했다. 왕건의 행렬은 향차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연하여 도로가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둘러싼 듯했다.
태조는 동쪽의 좋은 집 한 채를 경순왕에게 주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정승(正承)으로 봉하니 그 지위는 태자의 윗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나라도 백성도 없는 무국지왕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無影無愛(무영무애)
無:없을 무, 影:그림자 영, 愛:사랑 애.
어의: 그림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무영탑을 만든 이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사랑한다는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듯으로 쓴다.
문헌: 현진건 무영탑(無影塔)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540) 22년에 창건되었다. 그리고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2) 10년에 개수되었다. 그때 뜰에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을 세우게 되었다.
광대한 불국사 경내에 축성된 다보탑과 석가탑은 구조의 절륜(絶倫)함을 보여주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를 축성한 김대성(金大城)은 모양리(牟梁里)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김대성이 낳아주신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또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石佛寺), 석굴암(石窟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우기 위해 마땅한 석공이 없어 애를 태우던 중 백제의 석공 아사달의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초청했다.
그대 아사달에게는 갓 결혼한 아사녀(阿斯女)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다. 아사녀는 남편 아사달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남편의 예술에 대한 욕심을 아는지라 울며 배웅했다. 아사달은 신라로 와 불국사 뜰에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축조하면서도 틈만 나면 고향에 있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 왕의 행차에 따라왔던 구슬아기가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하여 연모하게 되었다. 그녀는 날마다 아사달을 찾아왔다. 아사달은 그렇잖아도 쓸쓸하던 참이라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아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볼 때마다 아내가 더 그리워졌다.
아사달에게는 팽개라는 연적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이 신라에 가고 없음을 기회로 아사녀에게 접근하여 치근거렸다. 견디다 못한 아사녀는 아사달이 있는 신라로 왔다. 그리고 불국사의 주지를 찾아가 남편에 대해서 물었다.
주지 스님은 탑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데 아내가 왔으니 작업이 늦어질까봐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낭군께서는 탑을 거의 다 만들어 가고 있소, 이제 며칠만 참고 있으면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전해질 훌륭한 탑이 완성될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절 아래에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탑이 완성되면 그 연못에 탑의 모습이 비칠 것이니 그때 그것을 확인하고 올라오면 만나게 해드리리다.”
아사녀는 주지 스님의 말대로 영지(影池)로 가서 매일 영지의 수면에 탑의 모습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탑의 모습은 좀처럼 비치지 않았다. 아사달이 구슬아기와 사랑에 빠져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탑의 준공이 늦어졌던 것이다. 애가 닳은 아사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영지에 비칠 탑만을 기다리다가 기진하여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영지(影池)에 모습이 비쳐져야 할 탑이 비쳐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탑을 그림자 없는 탑 즉, 무영탑(無影塔)이라 하고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이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無蝶無香(무접무향)
無:없을 무, 蝶:나비 접, 香:향기 향.
어의: 나비가 없음으로 미루어 향기가 없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어렸을 적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일에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요건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진평왕(眞平王)의 맏딸로서 본명은 김덕만(金德曼)이고, 선덕(善德)은 시호이며,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다
그녀는 지혜가 많아 세 가지 앞일을 예측하여 적중시켰다.
그 첫 번째는 모란꽃에 관한 이야기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진평왕에게 붉은 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 세 되를 보내 오자 왕이 덕만에게 보이니 그녀가 말했다.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왕이 묻자 덕만이 대답했다.
“이 꽃 그림에 봉접(蜂蝶.벌과 나비)이 없음으로 미루어 알았나이다. 대저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봉접이 따르는 법 아닙니까? 그런데 이 꽃 그림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봉접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향기가 없음이 분명하나이다.”
그래서 그 씨앗을 뜰에 심게 했더니 과연 꽃은 탐스럽게 피었으나 향기가 없었다.
두 번째는 백제 군사를 물리친 이야기다.
날씨가 싸늘한 겨울에 영묘사(靈廟寺. 선덕여왕 때 경주에 창건한 절)아래의 옥문지(玉門池)에 난데없는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울어댔다.
그러자 사람들이 해괴한 일이라 생각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선덕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군사 2천 명을 뽑아 서라벌의 서남변(西南邊)에 있는 옥문곡(玉門谷. 여자의 생식기를 닮은 계곡)을 찾아가서 잠복해 있는 백제의 병사들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두 각간이 왕명대로 찾아가니 한 작은 산 계곡에 과연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군사 오백 명을 거느리고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잠복해 있어 일망타진했다.
세 번째는 자기의 죽음을 미리 예언한 일이다.
여왕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거든 낭산 남쪽 비탈의 도리천(忉利天) 안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날이 되자 예언대로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은 왕의 당부에 따라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선덕여왕의 능 아래에다 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 섬부주, 승신주, 우화주, 구로주를 일컫는다)를 창건했다. 사람들은 불경에서 사천왕천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고, 그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 말을 상기하고, 그때서야 선덕여왕의 예언이 맞아 떨어짐을 알았다.
선덕여왕이 살아 있을 때 신하들이 개구리에 관한 예언을 두고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묻자 선덕여왕이 설명했다.
“개구리의 불거져 나온 눈으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고, 옥문(玉門)은 여근(女根. 여자 생식기)이고, 여자는 음과 양 중에 음에 속하며, 그 빛깔은 흰 것인 바, 흰 빛은 서쪽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적의 병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 남자의 생식기)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명을 듣고 난 신하들은 모두 감탄해마지 않았다.
선덕여왕은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고, 첨성대(瞻星臺)와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건립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