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8 [文金生員(문금생원) ~覆椀之功(복완지공)]

efootprint 2022. 9. 22. 08:55

文金生員(문김생원)
文:글 문, 金:성 김, 生:날 생, 員:관원 원.
어의: 문 생원과 김 생원, 즉 평범한 사람이란 뜻으로, 조선 영조 때 몸가짐과 집안관리를 잘했던 한 선비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자기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거나 가명을 쓰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5) 때 자기의 성(姓), 문(文)자에다 어머니의 성, 김(金)자를 넣어서 문김생원(文金生員)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가 못생기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그의 여조카는 용모가 잘생겨서 내명부 종4품(從四品)의 숙원(淑媛) 품계를 받았다. 그 바람에 가문 전체가 혜택을 입어 벼락부자에 벼락감투를 쓰게 되었고, 숙원의 아우 문성국(文聖國)은 상궁을 돌보는 소감(小監)이 되었다.
  성국은 무식한 데다가 사람이 교활하여 주색과 사치를 좋아했다. 외출할 때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권세를 뽐내고, 집안에서는 하인을 수십 명씩 거느렸으며, 문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무뢰한 식객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그러나 숙원의 백부(伯父) 문김생원은 숙원이 벼슬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결코 응하지 않았다. 특히 조카 성국이 보내오는 돈이나 물건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아예 거래를 끊고 지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성국은 집안을 망칠 위험한 인물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성국이란 놈이 저 모양인데 그 권세가 얼마나 가겠소. 졸부귀불상(猝富貴不詳)이란 말대로 벼락부귀는 얼마 못가는 법이오. 한번 뒤집히는 날에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니 처신을 조심해서 하고, 나는 아예 1년에 한 차례씩만 집에 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나 버렸다. 그리고 본성을 감추고 김씨로 행세하며 섣달 그믐 캄캄한 밤에야 한 번씩 집에 들러 성묘를 하고, 처자를 만났다.
  몇 해 후, 아니나 다를까 숙원 동생 성국이 모반의 죄를 범해 사사(賜死)를 당하고, 그에 따라 문씨(文氏) 일문(一門)도 멸망했다. 그러나 문김생원의 집안만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머니의 성까지 넣어서 행동을 조심한 것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文德之略(문덕지략)
文:글 문, 德큰 덕, 之:어조사 지, 略:꾀 략.
어의: 문덕의 지략이라는 말로, 조그만 힘으로 엄청난 큰 힘을 깨뜨린 을지문덕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4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 사람으로 그의 가계보는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잘 알고, 잘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기 612년,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고구려를 치게 했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적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황제의 밀지를 받고 을지문덕을 억류시키려 했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상서도성에 속한 관리)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기 위해 온 적장을 억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굳이 말리므로 그냥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더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속지 않았다.
  을지문덕을 놓친 우문술운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회군하려 했으나 정예부대로 추격하면 성과를 이룰 것이라는 우문중의 주장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가 굶주리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지치게 하고자 싸움마다 패하는 척하니, 우문술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자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마침내 살수(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되는 지점에까지 좇아오니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우롱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마다 이겨 공이 높아졌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만 그침이 어떠한가?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했다.
  “군사를 돌려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황제나 왕이 행차할 때 머무는 임시 거소)로 찾아가겠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쳐있어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을지문덕의 항복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 위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후미를 공격하니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들이 돌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하루 낮 하룻밤 동안이었고, 그 거리는 450리였다. 또 처음 요하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개 부대의 군대가 30만 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되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다. 고구려가 그 많은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의 지략 때문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文宣衣民(문선의민)
文:글 문, 宣:베풀 선, 衣:옷 의, 民:백성 민.
어의: 문씨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다. 즉 고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보급시킴으로써 백성들
이 따뜻하게 지내게 해준 것을 말한다. 여러 사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

 

  고려 말기의 학자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그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사신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고려의 왕족 덕흥군(德興君)이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가 고려를 쳐들어오자 최유(崔濡)와 더불어 원나라에 협조했다. 원나라의 왕이 문익점에게도 그 덕흥군을 따르라고 명했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교지(交趾. 월남의 북부 하노이 지방)에 삼 년간 유배를 보냈다.
  문익점은 그곳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목화를 재배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본국에 가져가 국민의 의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반출이 금지된 탓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목화씨 세 개를 붓대롱(筆管.필관) 속에 숨겨서 몰래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 경남 산청에서 밭에 뿌렸으나 재배법을 몰라 겨우 한 개만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으로 번식을 거듭했다. 계속해서 목화로 솜 타는 법과 실을 뽑는 방법, 그리고 베짜는 것까지 개발하니 마침내 온 나라 방방곡곡의 백성들이 따뜻한 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제7대 세조(世祖) 때 그의 사당이 세워졌으며, 만인을 따뜻하게 입힌 공로로 충선공(忠宣公) 시호도 받았다.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이이(李珥)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찬양한 글을 지었다.

     神農敎民耕(신농교민경)  옛적에 신농이 백성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后稷敎民稼(후직교민가)  후직이 백성들에게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忠宣衣我民(충선의아민)  문 충선공은 만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혀주었으니
     豐功倍前昔(풍공배전석)  그 충성한 공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勿言我死(물언아사)
勿:말 물, 言:말씀 언, 我:나 아, 死:죽을 사.
어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즉 어떤 사실이 상대에게 알려지면 자신이 불리해지므로 그 사실을 숨기고자
할 때에 쓴다.
문헌: 선조실록(先祖實錄), 고금청담(古今淸談)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은 본관이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국가의 문서와 장부를 담당하고 말과 가마에 대한 일을 맡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종4품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정읍현감 등을 두루 거쳤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용감함과 재능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당시 조야에서는 왜란에 대비하지 않았는데, 장군만은 거북선을 만들고 군비 확충에 힘을 다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북선으로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한 것을 비롯하여, 사천에서 13척을, 당포에서20여 척을,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한산도에서 70여 척을, 부산 앞바다에서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거의 소탕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승진시켰다. 그러자 상급자였던 원균(元均)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데 대하여 반감을 품고 그를 모함했다. 그로 인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정탁(鄭琢)의 변호와 그간의 전공이 참작되어 사면을 받고,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이 배를 몰고 나가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이 싸우다가 남긴 13척의 배와 빈약한 병력으로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했다. 그의 전략이 뛰어났음을 또다시 입증한 것이다. 또 명나라 원병과 합세하여,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왜선 500여척과 싸워 200척을 불 태웠다. 그때 불행하게도 적의 총알에 가슴을 맞았다. 그러자 그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싸움이 위급한 상태다. 그러니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말하지 말라.”
  당부를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니 조카 이완(弛緩)이 그의 유언대로 장군의 전사 사실을 숨기고 여전히 용맹하게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은 4형제 중 셋째였는데 첫째가 희신(羲臣), 둘째가 요신(堯臣), 셋째가 순신(舜臣), 넷째가 우신(禹臣)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 황제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또 장군은 차를 좋아하여 아들과 조카들 이름까지도 모두 초두艸변을 붙여지었다.
  문장에도 능하여 시조와 <난중일기> 같은 좋은 글도 많이 남겼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勿謂母過(물위모과)
勿:말 물, 謂:이를 위, 母:어미 모, 過:허물 과.
어의: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말로, 상대편이 자기의 의사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를 비
유하여 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11대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은 백천 사람으로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율곡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모시고자 외직을 자청, 보은현감을 지냈다.
  다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정자에서 천자문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자 모든 아이들이 책을 덮고 구경하였으나 유독 조헌만이 홀로 책 읽기를 계속했다. 이를 본 훈장이 기특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책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책 읽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부모님에 대한 공경이 남달랐다.
  선조 때 일본 사신이 와 명나라를 치고자 길을 빌려 달라고, 즉 가도공명(假途攻明)을 요청했다. 옥천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일본 사신을  차단할 것과, 왜란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돌기둥에 쳤다.
  이듬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700명을 규합하고, 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수복했다. 또 금산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맞아 영규와 아들 완기(完基) 등 의병 700명과 함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을 만들어 숭앙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에게서 자랐다.
  한 번은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를 뵈었더니 외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계모에게서 학대를 받는다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 말을 들은 조헌은 한동안 외가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외가에 가니 외할머니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했느냐?”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다시는 그에게 계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계모한테도 효심이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라에서는 영의정(領議政)을 추중하고, 옥천에 표충사(表忠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美菊佳客(미국가객)
美:아름다울 미, 菊:국화 국, 佳:아름다울 가, 客:손 객.
어의: 아름다운 국화가 좋은 손님이다. 즉 국화의 아름다움을 손님에 비유하여 예찬하는 말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신용개(申用漑.1463~1519)는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때 문신으로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다 본관(本貫)은 고령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으로 성종(成宗)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김종직의 문하였던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한 번 술을 미시기 시작하면 만취가 되어야 그만두었다.
  그는 유난히 국화꽃을 탐하여 해마다 여덟 개의 화분에 국화를 심어 길렀는데 가을이 되면 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웠다.
  하루는 그가 식구들에게 일렀다.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놓도록 하여라.”
  하여 온 집안이 요란스럽게 음식을 차려 놓고 해가 저물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손님은 오지 않았다. 부인이 이상히 여겨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달이 떠서 달빛이 집안까지 곱게 비추고, 국화꽃 향기가 가득하니 이것이 귀한 손님이 아니오.”
  그러고는 여덟 화분의 국화꽃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었다.
  그가 성종(成宗)을 4년간이나 모셔 깊은 신임을 얻고,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직제학과 도승지를 지낸 것도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호가 이요정(二樂亭)이었듯이 늘 두 가지의 즐거움을 안고 산 사람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美溢到去(미일도거)
美:아름다울 미, 溢:넘칠 일, 到:이를 도, 去:버릴(갈) 거.
어의: 너무 아름다우면 쫓겨난다는 말, 재상 이덕형이 그의 애인이 죄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영리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봐 쫓아낸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해동야사(海東野史) 

 

  조선 선조(宣祖) 때 문신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본관이 경기도 광주(廣州)이고, 호는 한음(漢陰)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그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는 중임을 맡았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나라의 존망이 너무 위급하여 잠시도 대궐을 떠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궐 문밖에 소실(小室)을 두고, 거기에서 숙식을 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그가 상감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밤늦게야 소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할 기운도 없어 입만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소실은 미리 제호탕(醍醐湯.더위를 풀어주고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는 탕약)을 준비해 두었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탕약을 달게 받아 마시지 않고 소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 하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대로 살 곳을 찾아가시오.”
  말을 마친 한음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실은 갑자기 소박을 당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밤새워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가장 친한 이항복(李恒福)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항복도 역시 의아해하면서 한음을 쫓아가 물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소실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차버린 까닭이 무엇인가?”
  한음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네. 내가 지난번 상감과 국사를 의논하고 늦게 돌아와 목이 몹시 말라 말도 못하고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네. 그때 그 사람이 미리 제호탕을 준비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 그 영리하고 총명함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물사발을 받고 보니 사랑스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뭐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왜란으로 온 나라가 혼란지경인데 소실에게만 빠져 있다면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는 나로서 어디 가당찮은 일인가? 소실의 사랑스러움은 나를 미혹에 빠지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국사를 그르치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국사에 전념하고자 취한 행동이라네.”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이항복이 말했다.
  “공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대장부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군! 나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일이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未八當三(미팔당삼)
未:아닐 미, 八:어덟 팔, 當:마땅 당, 三:석 삼.
어의: 여덟이 아니라 셋으로도 충분하다. 즉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 중심이 되는 부분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뜻이다.
문헌: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개화기(開花期)의 정치가이자 선각자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는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희택(羲宅)의 아들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는데 이장직(李長稙)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을 알게 되어 그 인연으로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홍영식(洪英植)과 사귀었다. 홍영식이 우정국총관(郵政局總管)이 되자 이상재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그 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해 있다가 박정양이 주미 한국대사관 공사로 부임하자 이상재는 일등서기관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양복을 일체 입지 않고 사모관대와 조복을 통상복으로 입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한국의 고유한 풍습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어느 날, 그가 사모관대를 쓰고 조복에 나막신을 신은 채 공원을 산책하노라니 어린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도포자락을 잡아끄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렸다. 그러나 그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아이들이 모두 붙들려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신문의 기사를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이상재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외국 풍속의 복장을 보고 호기심으로 그랬을 뿐,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방명해 주라고 청했다. 이에 경찰들도 그의 인격에 감동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월남의 고매한 인품이 알려지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미국의 상하의원에서 두루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청국 사신들은 우리나라를 자기들의 속국인 것처럼 대하여 오다가 한국의 외교관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우대를 받는 것을 보고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박정양과 이상재는 귀국을 해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상재는 학부(學部)의 학무국장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백동전(白銅錢)을 남발하여 경제가 도탄에 빠지고, 삼남지방에서는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했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이미 폐지했던 전운사(轉運司)를 복구하고자 고종(高宗)의 윤허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이상재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고 집행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처음에는 왜 바로 집행하지 않느냐고 대노(大怒)하였으나 이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중지하게 했다.
  한때 임금의 명을 거역하여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이상재는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뒤늦게나마 고종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준 데 대하여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본에 병탄을 당하는 치욕스런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와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이 합석한 한 만찬자리에 공교롭게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상재가 이완용과 송병준을 보고 불쑥 말했다.
  “대감들은 동경(東京)에 가서 사시지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서 말을 받았다.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말이요?”
  이상재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 아니요? 그러나 당신들이 동경에 가 있게 되면 이번에는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니 하는 말이외다.”
  그러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들 사색이 되었다. 일본 총독 이토 히로부미도 있는 자리에서 월남이 아니고는 감히 못할 소리였다. 이처럼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는 이상재의 대담성은 훗날 총리가 된 김홍집(金弘集)과 정사를 토의하는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팔도감사(八道監司) 김홍집이 말했다.
  “작금 탐관오리가 우글우글해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여덟 놈만 목을 베면 될 텐데…….”
  이에 이상재가 맞받아서 말했다.
  “여덟 사람이 아니라 세 놈만 없애도 되겠지요.”
  김홍집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이상재의 기지(機智)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한번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상재에게 소감을 묻자 짧게 대답했다.
  “동양에서 제일 큰 병기창을 보니 대포와 총검이 산처럼 쌓여 있어 일본이 강국인 것은 틀림없었소. 그런데 성경 말씀에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는 일본이 망할 것을 예언한 말이기도 했다.
  이상재는 1927년, 78세로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일제의 암울한 비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民草之亂(민초지란)
民:백성 민, 草:풀 초, 之:어조사 지, 亂:어지러울 란.
어의: 풀뿌리 백성들의 난리라는 말로, 조선 말기에 홍경래가 주축이 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났던 민란에서 유래했다. 힘없는 사람들 일지라도 뭉치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

 

  조선의 마지막 왕 제23대 순조(純祖) 때 민중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1771~1812)는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한데다가 언변도 뛰어났다. 또 그는 열아홉 살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했다가 낙방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기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양반집 자식들은 모두 급제했음을 알게 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서북인(西北人)은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고관(高官)에는 등용시키지 않는 지역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강하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홍경래는 정처 없이 8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폈다. 그 결과 평안도 출신들은 안동 김씨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어 나라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천(博川)의 청용사(靑龍寺)에서 명문가의 서자 우군칙(禹君則)과 의기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그는 만주의 마적단 정시수(鄭始守)와 가산군(嘉山郡)에서 제일가는 부자이면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병법에 밝은 진사 김창시(金昌始), 태천(泰川)의 김사용(金士用)과 개천의 소문난 장사 홍총각(洪總角) 등 3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과거 제도를 비롯 권문세가의 부패와 흉흉한 민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특히 남양 홍씨가 조정에 들어오면서 그들에 대한 불평이 높았다.
  홍경래는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流民) 장정들을 끌어모은 후, 기회를 보다가 제일 먼저 가산군(嘉山郡)을 습격,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엿새 만에 여덟 고을을 손에 넣었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대원사(平西大元師)라 칭하고 김사용(金士用)을 부원사로, 김창시(金昌始)를 참모로,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확고히 하는 한편, 점령지에서는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등 민심 수습에도 노력했다. 그리하여 가산,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용천(龍川) 등지까지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많은 현상금을 걸고 홍경래를 체포하라고 독려했다.
  홍경래는 남으로 내려가는 제일의 관문인 안주(安州)를 공격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한편,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던 이해우(李海愚)와 조종영(趙鍾永)은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둘로 나누어 홍경래가 있는 송림을 좌우에서 습격했다.
  그때 부상을 당해 거동이 불편했던 홍경래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도망가 성문을 굳게 닫고 홍총각(洪總角) 등 다른 장수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성안에서는 식량마저 동이 났다.
  그때 관군 이요헌(李堯憲)이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하고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끼니도 제대로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홍경래의 반군들은 진격해 들어오는 관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최후가 닥쳤음을 안 홍경래는 관군에게 외쳤다.
  “여기 홍경래가 나간다. 나를 잡아 상금을 타거라.”
  관군들은 그에게 활을 쏘아대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홍경래의 난은 부패한 조선 말기의 혼탁한 정치 상황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反躬自省(반궁자성)

反:되돌릴 반, 躬:몸 궁, 自:스스로 자, 省:살필 성.
어의: 잘못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즉 허물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친다는 말이다.
문헌: <익재난고 익재진자찬(益齋亂藁 益齋眞自贊)>

 

  이재현(李齋賢.1287~1367)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역옹)이다.
  15세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22세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발탁되어 4번이나 재상을 지낸 뛰어난 정치가였다.
  제현은 자기를 경계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사슴을 좇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쥔 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가을철의 털끝 같은 작은 것은 살필 수 있어도 수레에 가득 실은 땔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오로지 한곳에 쏠려 있고 눈이 다른 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그곳 수도 연경(燕京)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문재(文才)를 드러냈다. 그래서 그곳의 인재 조맹부(趙孟頫)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
  “우임금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그를 빠지게 한 것같이 여겼고, 직(稷)은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그를 굶주리게 한 것같이 여겼다. 하늘이 큰 인물에게 소임을 맡길 때는 이 세상을 구제하려 함인데 곤궁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구제할 생각을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몇 걸음밖에 굽어보지 못 한단 말인가?”
  그는 또 모든 잘못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며 자성할 것을 촉구했다.
  “학문이 빈약하면 도를 깨닫는 것도 늦는 것이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거늘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내가 이제 나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뭇사람들의 비방만 듣겠구나, 분명히 말하노니 한 번 보고 세 번 생각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공부하라.”
  그는 선비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재주는 배의 노와 같고, 운명은 그 배에 불어오는 순풍과 같은 것이며, 순풍에 이끌려가는 돛배라 할지라도 그 배를 운용하는 사람이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면 세상의 거친 파도와 풍랑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를 일러 반궁자성, 또는 반궁자문(反躬自問)이라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半船之運(반선지운)

半:반 반, 船:배 선, 之:어조사 지, 運:운수 운.
어의: 몸의 반은 배 위에, 반은 땅 위에 있는 운이라는 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한다.
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1392~1398)는 제1차 왕자의 난에 화가 나서 왕위를 방과(方果. 정종(定宗1357~1419)에게 물려주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서 은거했다. 이에 아들 방원(方遠)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이양 받아 태종이 된 후, 아버지를 모셔오고자 차사(差使)라는 임시 벼슬을 내려 수차례 보냈으나 그때마다 이성계는 차사를 죽여버렸다. 하여 한 번 간 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빗대어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했다.
  그러자 차사에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순(朴淳)이 스스로 다녀오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이성계에게로 갈 때 새끼가 딸린 어미 말을 데리고 가서 새끼 말은 이성계의 집 앞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만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순과 이성계가 대청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미 말이 새끼를 찾으며 애타게 울었다. 태조가 이 광경을 보고 박순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어미 말이 새끼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러하옵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지극한 정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박순과 친구 사이라서 바둑을 두며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그때 천장에서 어미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어미 쥐는 떨어지고 나서도 새끼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성계가 가상히 여기자 박순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태종의 명을 받은 차사임을 밝히고 울면서 간청했다.
  “하찮은 미물인 쥐도 죽을 때까지 제 새끼를 감싸주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지 자식을 버릴 수 있겠나이까? 지금 태종이 오매불망 전하를 그리워하고 있사오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저와 함께 귀경하시옵소서!”
  이에 감동한 이성계는 함주(咸州)에 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박순은 그렇게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고, 태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를 살려주어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신하들이 전례와 같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을 펴고 나섰다. 이성계는 옛 친구와의 정을 생각하여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충분히 건너갔으리라 생각되었을 때 그를 죽이라 명령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만약 그가 이미 강을 건넜으면 더 쫓지 말도록 하하.”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순은 몸이 불편한 탓으로 시간이 늦어져 명사들이 도착했을 때 몸의 반은 육지에, 반은 강을 건너는 배 위에 있어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반선지운(半船之運)으로 죽은 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고, 박순의 아내 임씨(임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자결했다.
  태종은 그의 공을 찬양하여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충신으로 칭송하고, 그의 고향에 충신. 열녀의 두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放下犬聲(방하견성)
放:놓을 방, 下:아래 하, 犬:개 견, 聲:소리 성.
어의: 개소리를 그만하라. 즉 이론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말을 할 때는 전후, 좌우상하를 가려서 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 잡기(韓國人의 智慧. 雜記)>

 

  논산 대곡에서 3대째 소농을 경작하면서 살던 안두기(안두기)라는 사람이 생일을 맞자. 자식들이 기르던 개를 잡아서 생신 상을 차리려 했다. 그런데 눈치를 챈 개가 사람 곁으로 오지 않고 슬슬 피했다. 그러다가 안두기가 볼일을 보러 변소에 들어가자 개가 따라 들어갔다. 그것을 본 큰 아들이 올가미를 감추고 변소 문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잠시 후, 변소에서 나오는 개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덤비자 개가 놀라서 도망치다가 그만 마당가의 우물에 빠질 뻔했다. 마침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려던 둘째 아들이 엉겁결에 개의 뒷다리를 붙잡았다. 개를 잡긴 했으나 하도 요동치는 바람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변소에 있는 아버지에게 급하게 말했다.
  “아버지 빨리 나오시오. 아버지 빨리…….”
  그런데 그 모습이 우물에 처박힌 개를 거꾸로 붙잡고 외치고 있어서 마치 개를 아버지라 부르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개를 잡아 가마솥에 안치고 불을 지폈다. 그때 셋째 아들이 방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는 방석 밑에 손을 넣어 방이 따뜻한지 만져 보면서 말했다.
  “방금 개를 안쳤더니 방이 뜨뜻해 오네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개를 안쳤다고 하니 아버지가 개가 된 꼴이었다.
  음식이 다 마련되자 동네 노인들을 청해 놓고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니 모두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맛있게 먹으면서 뼈다귀를 휙휙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동네 개들이 모여들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다투어 먹었다. 이것을 본 넷째 아들이 말했다.
  “허허, 오늘이 개 생일이구먼.”
  그날이 자기 아버지 생일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개들이 잘 먹는다고 개의 생일이라고 한 것인데 마치 자기 아버지를 개라고 지칭한 꼴이 되었다.
  안두기는 아들이 열 형제나 되어 아들들이 서로 먼저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여기저기서 모셔가려 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이를 확인하려는데 다섯째가 보이지 않으므로, 자기 아들에게 다섯째 작은 아버지에게 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 아이가 다섯째 작은 아버지 집에 가서 말했다.
  “오늘 할아버지 저녁 진지를 어느 댁에서 차릴 것인지 물어보고 오래요.”
  마침 다섯째 동생이 뒷간에 있었는데 식구들이 다 분주했던 탓으로 미처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카가 아무 대답도 못 듣고 그냥 가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저녁 진지는 여기서 차린다고 전해라!”
  그 뜻은 우리 집에서 모신다는 것이었는데, 변소 안에서 ‘여기서 차린다’ 고 하니 아버지는 그냘 저녁 밥상을 뒷간 안에서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안두기는 아들들을 다 세간을 내어주고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르던 개를 잡아먹고 나니 도둑이 들까 걱정이 되어 말했다.
  “애들아, 어디서 강아지 새끼라도 하나 얻어다가 기르면 어떻겠느냐? 함께 있던 짐승이 없어지니 서운하구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젠 개소리 좀 그만하세요.”
  개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말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이 개소리가 된 꼴이니 또 실수였다.
  말은 조금만 부주의해도 엉뚱한 뜻으로 바뀔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승용차의 옆자리에 모시고 가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서 어머니를 싣고 가서 장터에 내려놓고, 거기서 작은아버지를 싣고 가서 작은아버지 집에 내려놓고 난 다음, 다시 장을 본 어머니를 싣고 오겠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와 작은아버지를 차에 싣는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말은 항상 주의해서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百結碓樂(백결대락)
百:일백 백, 結:맺을 결, 碓:방아 대, 樂:풍류 락.
어의: 백결의 방아악이라는 말로, 백결선생이 가난을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해 주기 위하여 거문고를 연주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의연한 태도를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8
 

  신라 제20대 자비왕(慈悲王) 때 악성 백결(百結) 선생은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왕에게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러나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경주 낭산(狼山) 밑에서 숨어 살았다. 자연히 살림살이가 가난해져 옷을 누더기처럼 백(百) 곳이나 기워(結.결) 입고 다녔는데 마치 온몸에 메추라기를 달아 맨 것과 같아 그를 동리(東里) 또는 백결 선생이라는 별호로 불렀다.
  어느 해 세모(歲暮)에 다른 집에서는 떡방아를 찧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백결 선생의 집에서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설을 쇠는데 우리는 그렇질 못하니 어떻게 차례를 지내리까?”
  그러자 백결 선생이 말했다.
  “”대저 사람이 죽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고,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대는 어찌 그렇게 마음 상해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해주리니 마음이라도 즐겁게 가지시오.“
  그러고는 거문고를 잡고 덩더쿵! 덩더쿵! 하고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방아악’, 즉 대악(碓樂)이지만 안타깝게도 곡은 전하지 않는다.
  백결 선생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심사를 거문고 가락에 실어 풍미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신라 사람으로서 공명정대하기는 김양(金陽)만한 이가 없으며, 영웅호걸(英雄豪傑)로는 김유신(金庾信)만한 이가 없다. 그러나 백결 선생은 두 분을 합친 것과 같은 인격자였다고 칭송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百死丹心(백사단심)
百:일백 백, 死:죽을 사, 丹:붉을 단, 心:마음 심.
어의: 백 번 죽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로,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지킨 고사에

       서 유래했다. 오직 한 임금만을 위하는 절개를 뜻한다.
문헌: 조선명인전 포은집(朝鮮名人傳 圃隱集)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며, 자는 달가(達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난(蘭)의 꿈을 꾸어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그가 아홉 살 때에는 흑룡(黑龍)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후 나가보니 그가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몽룡(夢龍)이라 했다가, 장성한 다음에 몽주라고 개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세 번이나 장원급제하였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에 이르렀다.
  고려 우왕(禑王) 때 성균관대사성으로 있던 정몽주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노선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리고 1379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후, 날로 세력이 강해져 마침내 조선 건국의 대업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몽주는 김진양(金震陽) 등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려를 지키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의 마음을 회유시키기 위하여 그의 뜻을 묻는 시조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에 정몽주는 즉석에서 시를 지어 거절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녕유개리야여)

  어떤 일이 있어도 고려 왕조를 향한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 즉 백사단심을 드러내자 이방원은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친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다.
  이방원은 훗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충절을 기리어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別室之祿(별실지록)
別:나눌 별, 室:방 실, 之:어조사 지, 祿:봉급 록.
어의: 별실에 쌓아둔 녹봉이라는 뜻으로, 의롭지 않은 돈은 그냥 보관만 할 뿐 쓰지 않는다. 또는 그 돈을 말한다.
문헌: 단종실록 선원계보(端宗實錄 璿源系譜)
 

조선 시대의 문신 하위지(河緯地.1412~1456)는 본관이 진주(晉州)요, 호는 단계(丹溪)이며, 시호는 충렬(忠烈)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인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오로지 집현전에서 학문에만 열중한 첫 손에 꼽히는 청백리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세조로 등극한 후 하위지를 예조참의에 임명했다. 그러자 하위지는 이를 고사하고 고향 선산(善山)에 내려가 은둔했다. 그러나 세조가 강압적으로 명령하자 마지못해 부임은 했으나 ‘나는 단종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니다.’ 하여 세조가 준 녹봉을 쓰지 아니하고 별도의 장소에 쌓아 두었다.
  그는 다른 충신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탄로가 났으나 세조는 그의 인품을 아껴서 마음을 돌려 함께 일하자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는 단호히 말했다.
  “ 이미 역적(逆賊)이라 이름 지었으면 응당 죽일 것이지 어찌하여 묻고 또 묻는 것이오? 아무리 그리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그러자 세조가 말했다.
  “너는 이미 내가 준 녹봉을 받아 먹었으니 짐의 신하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 게냐?”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당신이 의롭지 않음을 알기에 당신이 준 부끄러운 녹봉을 한 푼, 한 톨도 축내지 않고 모두 별실에 따로 모아 두었소이다.”
  세조는 그의 확고한 충절에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작형(灼刑. 불로 살을 지지는 형벌)에 처했다.
  그는 나중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같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도 역시 세조가 준 녹봉을 먹지 아니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報恩緞洞(보은단동)
報갚을 보, 恩:은혜 은, :신 뒷축 단, 洞:고을 동.
어의: 은혜를 베푼 사람이 살았던 동네라는 말. 자기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

       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이 훗날 큰일을 해결해준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韓國人의 智慧)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 명나라 통역관 홍순언(洪純彦)은 한양의 미동(美洞)에 살았다. 그는 본래 호협한 사람으로 뛰어난 친화력이 있어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했다.
  통주(通州)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구경도 할 겸 청루에 놀러 나갔다가 몸을 판다는 여인의 글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소복을 한 채 수심이 가득하길래 물어보니 부모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으나 장사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러 나왔다고 했다. 홍순언은 그 말을 듣고 거금 3백금을 몸값으로 주고 그녀를 청루에서 풀려나게 해주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다만 조선의 홍 역관이라고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귀국 후 그는 3백금이라는 막대한 국고금을 축낸 사실이 드러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무렵, 명나라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니라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라고 잘못 알려져 그를 바로잡는 일로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명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후 200여 년간이나 이성계가 전주(全州) 이씨가 아닌 성주(星州) 이씨인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이인임은 매관매직을 하다가 이성계에 의해 慘刑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태조의 아버지로 기록해놓고, 고려의 왕을 넷이나 죽이고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했으므로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잘못된 기록을 수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잘못된 기록이 외교상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3대에 걸쳐 15차례나 사신을 보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선조는 대로(大怒)하여 사신들의 잘못이니 꼭 바로잡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대신들이 모여서 숙의를 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명나라의 사정을 잘 아는 홍순언이 꼭 필요한데 그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우리가 대신 공금을 갚아주고 그를 명나라로 보내기로 합시다.”
  이렇게 해서 홍순언은 감옥에서 풀려나 주청사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홍순언이 사신 일행과 조양문에 도착하자 뜻밖에 예부시랑 석성(石星)이 마중 나오더니 뒤이어 기병이 달려왔다. 그러면서 ‘홍 역관이 누구냐’ 고 찾더니 홍순언을 정중히 모시고 가는 것이었다.
  그가 한 객실에 들어 기다리니 지체가 높아 보이는 부부가 다가와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나으리! 저는 나으리의 은혜를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부인 옆에 있던 남편도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통주에서 어른께서 베푸신 은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른께서는 천하의 대인이십니다.”
  홍순언은 그때서야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청루에서 나와 부모의 양반가도를 이어 받아 석성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석성이 출세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던 것이다.
  석성이 홍순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홍순언이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왔다고 말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선 왕실의 종계를 바르게 고쳐 주었다. 그리고 홍순언이 돌아올 때 그 부인이 손수 짰다는 비단 10필에 손수 보은단(報恩緞)이라는 글씨를 수놓아 홍순언에게 주었다.
  귀국하자 사람들이 그 비단을 사러 홍순언의 집 앞에 구름처럼 모여드니 그 동네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부근이다.
  선조는 공이 큰 홍순언에게 2등 공신을 주고, 당능군(唐陵君)이라는 군호까지 내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홍순언이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명나라에 가니 석성이 병부상서로 승진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되었다. 홍순언은 역관 출신이어서 큰 벼슬은 못했으나 그의 손자 홍효손(洪孝孫)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覆椀之功(복완지공)
覆:뒤집힐 복, 椀:주발 완, 之:어조사 지, 功:공 공.
어의: 독약이 든 밥상을 엎지른 공이라는 말로, 왕을 독살하려 했던 이자겸의 난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이 잘못 었음을 알고 모험을 하면서까지 바로잡는 행동을 이른다.
문헌: 인물한국사(人物韓國史)
 

고려의 이자겸(李資謙.?~1126)은 둘째 딸이 제16대 예종(睿宗)의 비로 책봉되자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의 자리에 올라 세력가가 되었다. 예종이 죽자(1122년) 그는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외손자를 인종(仁宗)으로 옹립하고, 자기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했다.
  그렇게 해서 막강한 위세를 얻자 자기 일파를 요직에 등용하고,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또 매관매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권세와 더불어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讖緯說)을 퍼드렸다.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인종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독살을 시도했다. 즉 자신의 딸인 왕비를 시켜 독이 든 음식을 인종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비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남편인 왕을 죽인 요부가 될 것이고, 안 들으면 불효가 된다는 생각에 심하게 갈등하던 끝에 상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음식을 엎질러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살림과 동시에 아버지의 명령도 거역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얼마 후, 이자겸의 이 음모가 탄로나 붙잡히자 왕비 이씨도 역적의 딸이라 하여 폐비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일부러 상을 엎질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씨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그 후부터 밥상을 들고 가다 엎어지는 여인을 비꼬는 말로 복완지공(覆椀之功)을 세우려고 하느냐고 놀리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