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사성어13 [阿闍梨判(아사리판)~汝是汝是(여시여시)]
阿闍梨判(아사리판)
阿:언덕 아, 闍:화장할 사(망루 도), 梨:배 리, 判:쪼갤 판.
어의: 스승이 될 만큼 도덕이 높은 규범사(規範師)들의 모임,
즉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교육할 만한 덕이 높은 승려들의 모임을 말한다. 근래에는 질서가 없이 여럿이 어지럽게 어울린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문헌: 이판사판 야단법석(理判事判 野壇法席),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아사리(阿闍梨)는 인도의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학승의 행동을 바로잡아 주는 사범(師範)으로, 교육을 담당할 만큼 덕이 높은 스승, 또는 도가 높은 승려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말의 뜻과는 상관없이 쓰고 있다.
위에 예시한 아사리판이라는 말이 그렇다.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많은 가섭(迦葉)과 그 삼형제가 유력인사 2백20명을 데리고 왕사성(王舍城)의 석가모니에게 귀의했다. 승단(僧團)은 그로 인하여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많은 지도자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그러다보니 조직 내에 승려로서의 품위와, 의, 식, 주의 법도가 통일되지 못해 문란했다. 심지어는 돌봐줄 지도자가 없어서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숨지는 승려도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존은 당신을 대신해서 지도해 줄 화상(和尙) 제도를 만들어 돌보게 했다.
“지금부터 화상은 제자를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제자는 화상을 아버지같이 섬기도록 하라. 그렇게 서로 공경하고 보살피면 바른 법이 널리 퍼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상 제도는 덕이 높고 계율에도 밝은 스님이 맡게 되자 교단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분율(四分律)> 33권에 기록되어 있는 화상의 탄생 유래다.
승단의 규모가 계속 커지면서 화상이 보살피고 지도해야 할 제자 수가 늘어나자 상대적으로 화상의 숫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새 화상을 구하지 못하여 언행이 흐트러지고 삐뚤어지는 비구가 늘어났다.
이에 석가모니는 승단의 조직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지금부터 아사리 제도를 만드노니 아사리는 제자를 자식과 같이 생각하여 보살피고,
제자는 아사리를 아버지 같이 받들도록 하라.”
아사리는 범어로 교수(敎授), 또는 궤범(軌範), 정행(正行)이란 뜻으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며,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도 편달해 주는 스승을 가리킨다.
아사리는 크게 다섯 종류로 나뉜다.
첫째, 출가(出家)아사리는 출가를 결정해주는 큰스님을 말한다.
둘째, 수계(受戒)아사리는 계(戒)를 주고 수계절차를 주선해 주는 스님을 말한다.
셋째, 교수(敎授)아사리는 위의(威儀)를 가르치고 경계시켜 주는 스님을 말한다.
넷째, 수경(受經)아사리는 경전을 가르쳐 주고 그 뜻을 일깨워주는 스님을 말한다.
끝으로 의지(依支)아사리는 공부하고 참선하는 스님의 별칭이다.
이와는 별도로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에는 受戒式에 갖추어야 할 10명 아사리로, 삼사칠증(三師七證)이 있다. 삼사는 계를 주는 전계(傳戒)아사리, 수계절차를 주관하는 갈마(羯摩)아사리, 위의 작법을 가르쳐 주는 교수(敎授)아사리를 말하고, 칠증은 수계를 증명해 줄 7명의 아사리를 말한다.
이처럼 아사리는 불교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거 유숭 배불사상의 영향으로 규범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난잡한 행동을 이르는 용어로 쓰여져 아사리판하면 질서 없이 우글거리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我又栗木(아우율목)
我: 나 아, 又: 또 우, 栗: 밤 율, 木: 나무 목.
어의: ‘나도 또한 밤나무다.’ 라는 말로, 조선시대의 학자 이이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자신도 어떤 무리와 맥을 같이 한다는 동질성을 표명할 때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조선 선조 시대의 학자 이이(李珥.1546~1584)는 호가 율곡(栗谷)이고,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며, 어머니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현룡은 어렸을 적에 강릉 오죽헌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현룡이 서당에서 돌아오자 외할머니가 물었다.
“현룡아, 저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
“석류입니다. 제가 석류에 대해서 시를 한 수 지어 보겠습니다.”
현룡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외할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홍피낭리 쇄홍주(紅皮囊裏 碎紅珠).”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아라!”
붉은 주머니에 붉은 구슬이 부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외손자의 재치 넘치는 문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한 스님으로부터 현룡이 귀인 상이기는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갈 액운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럼 , 현룡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면 액운도 막고,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외할머니는 사위 이원수(李元秀)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고 덧붙여 말했다.
“여보게, 사위! 나는 이 말을 하늘이 내려준 계시라고 생각하네. 밤나무를 많이 심으면 집안에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도 좋은 일이고, 현룡이를 위하는 일도 된다고 하니 꼭 그리하게나.”
하여 스님의 말대로 밤나무를 심기로 하고 온 고을을 뒤졌으나 묘목을 오백 그루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오백 그루는 알밤으로 심었다.
현룡의 아버지는 구해온 묘목과 씨밤을 파주의 미추산에 정성껏 심었다. 그리고 3년이 되자 현룡의 외할머니는 밤나무를 한 그루 한그루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한 그루가 모자랐다.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두 번 세 번 헤아려 봤지만 아무래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왜 한 그루가 안 보일까?”
그때였다.
“여기 있소. 나도 밤나무요(我又栗木.아우율목).”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잎 윗면을 보면 분명 밤나무인데 그 뒷면은 하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밤나무와는 다소 달랐지만 나무 스스로 자기도 밤나무라고 하니 그 뒤부터는 그 나무를 ‘나도 밤나무;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액운을 때우라는 스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율곡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우리나라의 큰 인물이다. 그의 행적 중의 하나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또 율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영남학파에 이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태두가 되었으며 퇴계와 쌍벽을 이룬 대학자였다.
그는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는 등 통찰력을 지닌 큰 인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峨嗟失期(아차실기)
峨: 산 이름 아, 嗟: 슬플 차, 失: 잃을 실, 期: 기회 기.
어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탄식소리와 때를 놓쳤다는 말로, 예언자 홍계관에서 유래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 홍계관(洪契寬)은 점괘로 앞날에 일어날 일을 귀신같이 잘 맞혀서 유명했다.
그가 지금까지 남의 점괘만 뽑아 주다가 하루는 자기의 수명에 대하여 점괘를 보니 모년 모월 모일 횡사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다시 살 수 있는 복점(卜占)을 찾아보니 바로 그 시각에 용상(龍床: 임금이 앉는 자리) 밑에 숨어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자기 운명이 걸린 문제라 사실을 폐하께 알려 특별히 윤허를 득하고 그날이 되자 용상 밑에 숨어 있었다.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용상 앞을 지나다가 잡혔다. 왕은 홍계관의 점술을 시험해보고 싶어져서 용상 밑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쥐가 있는데 모두 몇 마리인가?”
“예. 세 마리입니다.”
왕은 쥐가 분명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잡혔는데 세 마리라고 하자 그가 점괘를 잘 맞히지도 못하면서 용상 밑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엄하다고 생각하여 형리에게 그를 끌어내 사형시키라고 했다.
“고얀놈. 왕을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한 마리의 쥐가 지나갔는데 세 마리라고?”
홍계관은 사형장이 있는 당현(堂峴) 남쪽 한강 모래밭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형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형을 잠시만 더 지연해 준다면 분명히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하오니 제발 시간을 끌어 연장해 주십시오.”
형리는 그의 말대로 상당한 시간을 지연시켜 형을 늦추어 주었다.
한편, 왕은 그를 형장으로 보내 놓고 그래도 미심쩍어 그 쥐의 뱃속을 갈라보게 했다. 과연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어 어미 쥐까지 합치면 세 마리가 맞았다. 왕은 크게 감탄하고, 급히 형을 중지시키라 했다. 내시는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 당현 고개에 올라가 형장을 내려다보니 막 형을 집행하려고 칼을 번쩍 쳐드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손을 흔들어 주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만 사형이 집행되고 말았다.
내시가 대궐로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을 고했다. 임금은 크게 후회하여 ‘아차!’(峨嗟: 잘못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나오는 탄식소리) 하고 탄식했다. 이런 연유로 당현을 아차현(峨嗟峴)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아차산변이 그곳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安家八孝(안가팔효)
安: 편안 안, 家: 집 가, 八: 여덟 팔, 孝: 효도 효.
어의: 안가(安家), 즉 안씨(安氏) 집안의 여덟 가지 효도라는 말로, 효자 안필백의 효행에서 유래했다. 효행이 지극한 사람을 칭찬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효행선집(韓國孝行選集)
안필백(安必伯)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사백(師伯)이요,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다.
그는 하늘이 낸 효자로서 그가 남긴 여덟 가지 효행은 후세까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 효행은 그의 아버지가 큰 종기를 앓고 있을 때 행해졌다.
온갖 약을 다 써 봐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필백은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 몸에 난 종기에 붙었다. 그러자 고질이었던 종기가 깨끗하게 나았다.
두 번째 효행은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한 것이었다. 필백은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해 왔는데,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었다. 논바닥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지고 벼이삭이 여물지 못한 채 그냥 말라갔다. 온 식구가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논 한가운데에 꿇어앉아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말 기적이 나타났다. 쨍쨍 빛나던 하늘에 별안간 검은 구름이 낮게 일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일은 유독 필백의 논 근처에만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어 부모를 편안히 모실 수 있었다.
세 번째 효행은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하여 드리는 일이었다. 필백의 부모가 추어탕을 매우 좋아해서 자주 시장에 나가 미꾸라지를 사다 봉양했다. 그는 부모를 봉양할 물건은 아무리 값이 비싸도 절대 깎지 않고 값을 다 주고 사왔다.
미꾸라지를 파는 사람들은 그의 효행을 뒤늦게 알고는 미꾸라지의 값을 꼭 받을 금액만 불러 필백에게 존경의 뜻을 표했다.
다섯 번째 효행은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덫을 놓거나 사냥을 하여 매 끼니 거르지 않고 꿩고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여섯 번째 효행은 이가 없는 부모를 위해 감나무를 길렀다. 가을이면 감을 따서 일부는 연시를 만들고, 일부는 곶감으로 깎아 1년 내내 두고두고 드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감을 가리켜 안가효시(安家孝柹), 곧 안씨네 집의 효자감이라 불렀다.
일곱 번째 효행은 남과 절대로 다투지 않는 것이었다. 예컨대 밭이나 논의 경계를 가지고 문제가 생겨도 먼저 양보하고 다투지 않아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효행은 나들이를 할 때는 언제나 부모님께 행방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의 효행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자연히 그를 따르고 존경하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安城製器(안성제기)
安: 편안 안, 城: 성 성, 製: 지을 제, 器: 그릇 기.
어의: <안성>에서 만든 그릇이라는 말로, 순수한 우리말. ‘안성맞춤’을 성어한 것이다.
어떤 일이나 제품이 훌륭하게 잘 되었음을 뜻한다.
문헌: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
안성(安城)은 고래로부터 유기(鍮器)를 만들어 오던 고장으로 안성유기하면 견고하고 정교하여 전국에서 환영받았다.
그로부터 물건이 견고하거나 일의 기회인 사기(事機)가 확실한 일 또는 뜻하지 않은 일이 잘 들어맞을 때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안성 박물관에 소장된 문헌에는 ‘안성맛침’, ‘안성맞춤’ ‘안성맞침’ 등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안성맞춤’으로 통용되고 있다.
안성에 전해지는 속요(俗謠)는 안성 사람들의 기질을 잘 표현해주고 있으며, 안성과 안성제기를 노랫말 속에 잘 담아내고 있다.
‘경기안성(京畿安城) 큰아기 유기(鍮器)장사로 나간다. 한닙팔어 두닙팔어 파는 것이 자미라.
경기안성 아기 숟가락 장사로 나간다. 은동걸이 반수저에 깩기숫갈이 격(格)이라.
경기안성 반복자(半福字) 연엽주발(蓮葉周鉢)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선물감이라
안성(安城) 가신 반저름(半油鞋. 반유혜)은 시집가는 새아씨 발에 마침이다.
안성유지(安城油紙)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梳入. 소입)감에 마침이라.‘
안성이라는 지명은 고려초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고구려 때는 내혜홀(奈兮忽), 신라 때는 백성군(白城郡)이라 불렀다. 그런데 1914년 양성군과 죽산군을 통합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통합전에는 충청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경기도로 편입된 것이다.
안성은 경상도와 전라도, 삼남의 문물이 통과하는 편안한 삶의 터라는 말로 편안 안(安)자를 썼다. 오래 전부터 유기그릇(놋그릇)을 만들어 왔는데 유기그릇은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을 내다 파는 ‘장내기’와 주문을 받아 만드는 ‘맞춤’이 있었다. 그런데 맞춤 그릇이 유난히 튼튼하고 모양새가 뛰어나 부자들은 너도나도 맞춰서 썼다. 그러다보니 다른 그릇은 눈에 차지 않아 유기그릇은 꼭 안성 그릇만 찾게 되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대로 어떤 일이 제대로 잘 된 경우 안성에서 맞춘 그릇처럼 마음에 쏙 든다는 뜻으로 ‘안성맞춤’이라 했다. 흔히 안성유기는 주물을 부어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붓백유기이고, 두드려서 만드는 것은 방짜유기다. 방짜유기는 만들기도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 지금은 무형문화재로만 남고 붓백유기만 만들어지고 있다.
일설에는 안성맞춤이 유기가 아닌 신발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옛날 안성 지방에는 신발을 깁는 갖바치가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신발을 한곳에서 만들어 파는 게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문받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맞출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안성에서 맞춘 신발은 꼭 맞아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安坐作怠(안좌작태)
安: 편안할 안, 坐: 자리 좌, 作: 지을 작, 怠: 게으를 태.
어의: 폭신하고 편안한 방석이 게으르게 만든다. 사람이 편안함을 좇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는 말로, 조선 영조대왕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또 재위 52년 동안 스스로 절제와 검박한 생활에 힘썼으며,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등 치적이 높았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신하와 백성이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짐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거처하는 대궐의 방문이 찢어지면 손수 종이로 발랐다. 용상은 비단 대신 무명천으로 만들게 했고, 버선도 신다가 헤지면 기워 신었다.
특히 ‘영조의 방석’은 검소의 상징으로 백여 년 동안이나 호조에 보존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일화가 재미있다.
호조판서는 왕이 방석도 깔지 않고 맨바닥에 앉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부인에게 방석을 만들게 하여 진상했다. 다른 왕 같으면 누에고치에서 뽑은 비단 솜을 겹겹으로 넣고, 색깔 고운 비단 천으로 만들었겠지만 검소한 영조는 그런 사치한 방석을 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무명천에 푸른 물을 들이고, 무명 솜을 넣어 만들었다.
그런데 영조는 그 방석을 며칠 동안 사용하더니 다시 호조판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방석을 갈고 앉으니 몸은 편했소. 그러나 몸이 편하니 자연 게으르게 되어 쓰지 않기로 했소.”
모든 신하들은 영조의 검소한 기풍을 따라 널리 실천했다.
영조는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고, 사회, 산업, 문화,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크게 부흥시켰다. 그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는 등 불행한 일도 저질렀지만 재위 52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기로과(耆老科)를 창설하여 60세 이상의 선비와 무인들이 시험을 보게 해 관리로 등용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고, 세제를 개편하는 등 제도 확립에도 힘썼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鴨子以隻(압자이척)
鴨: 오리 압, 子: 아들 자, 以: 써 이, 隻: 외짝 척.
어의: 오리가 외짝이다. 즉 오리의 짝수가 맞지 않다.
조선 효종 때 풍산 군수의 우화에서 유래했다, 논리에 맞지않는 우매한 행동을 비유해서 쓴다.
문헌: <고금소총(古今笑叢) 잡기(雜記)>
조선 제17대 효종 때 다소 어수룩한 사람이 풍산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집에서 오리를 길렀는데 매일 꼭 두 마리씩 짝을 맞춰 세어서 확인했다.
하루는 그 집 하인이 오리 한 마리를 몰래 잡아먹었다.
그날 밤, 그는 늘 하던 대로 오리를 두 마리씩 세어보니 짝이 맞지 않고 한 마리가 남았다.
그는 하인 짓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성이 나서 그 하인을 매질하면서 말했다.
“이놈! 네가 감히 오리를 훔쳐 먹다니……, 내일 아침까지 짝수를 채워놓지 않으면 포도청으로 보낼 것이니라.”
군수 딴에는 엄하게 문책한다는 것이 겨우 짝수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그 종은 망설이지 않고 그날 밤 오리 한 마리를 더 잡아먹었다. 다음 날 군수가 오리를 다시 두 마리씩 세어 보니 짝이 잘 맞았다. 그러자 그는 즐거워하면서 말했다.
“고얀놈! 용케 짝수를 채워놓았네, 내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지.”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野壇法席(야단법석)
野: 들 야, 壇: 제사 터 단, 法: 법 법, 席: 자리 석.
어의: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야외의 자리. 근래에는 그 뜻이 변해서 떠들썩하게 시끄럽고, 우왕좌왕하고 여럿이 모여서 다투고, 시비하는 모양을 의미한다.
문헌: 야단법석 이판사판(野壇法席 吏判事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 이라는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듣기 위해 앉는 자리’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야단이라는 이 말의 어휘적 뜻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야단법석(野壇法席), 둘째는 야단(惹端)법석의 뜻이다.
첫 번째 야단법석(野壇法席)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야외에 법단(法壇)을 마련하는 설법장(說法場)을 말한다. 법당이 비좁아 다 수용할 수 없을 때 야외에 단상을 놓고 법석을 차려놓는 것을 이른다.
두 번째 야단법석(惹端法席)은 야기료단법석(惹起鬧端法席)의 준말이다.
흔히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이 났다.’, ‘야단법석을 편다.’, ‘야단법석을 친다.’ 등으로 표현한다.
야기(惹起)는 ‘어지러움을 일으킨다.’는 뜻이고 료단(鬧端)은 ‘시끄러움이 더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야기료단은 어지러울 야(惹)자에 일어날 기(起)자다. 거기다가 시끄러울 료(鬧)자를 더한 것이니, 매우 시끄럽다는 의미이다. 료(鬧)자를 보면 싸울 투(鬥.두)자 속에 저잣거리 시(市)자가 들어 있어 시끄러움을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야기료단을 줄여서 ‘야료(惹鬧)’라고도 하는데, 트집을 잡아 함부로 떠들어댄다는 뜻이다. 요즘에 야료부리는 사람을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자칫 야단(野壇)의 법석은 좋은 것이고, 야단(惹端)의 법석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비의 분별은 진리에 접근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야단(惹端)법석도 그 단초(端初)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의심을 의단(疑端)이라고 하여 참선(參禪)에서는 대단히 중요시 한다.
불교가 최초로 법석을 편 것은 기원전 527년, 석가머니가 득도한 지 21일 후인 12월 29일, 녹야위(녹야위)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을 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은 <불소행찬(佛所行讚)> 제3권 전법륜(轉法輪)에서 야원을 ‘수풀과 꽃과 열매가 우거지고 새들이 떼 지어 노래하는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한적하고 고요한 것을 즐기는 선인(仙人)들이 사는 곳’ 이라고 했는데, 그때 야단법석(野壇法席)에 참여한 사람은 교진여(橋陳如), 가섭(迦葉), 아습비(阿濕毘), 바제(婆提), 바부(婆敷) 등의 다섯 비구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숫자가 500비구, 또 5,000비구로 늘어났다. 따라서 그때마다 야단법석을 편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野豬仲媒(야저중매)
野: 들 야, 豬: 돼지 저, 仲: 버금 중, 媒:중매 매.
어의: 멧돼지가 중매를 했다는 말로, 성혼이 되려면 뜻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설화한국역사(說話韓國歷史)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이 죽자 왕후 우(于)씨는 시동생 연우(延優)를 제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197~227)으로 옹위했다. 그러고는 왕에게 왕후를 맞이하지 못하게 했다. 형이 죽으면 그 아내는 시동생과 사는 몽고 풍속에 따른 것이나, 고구려 지배층에서는 형사취수제로 형수를 아내로 맞는 사례가 있었다.
연우가 왕위에 오르자 불만을 품은 형 발기(發岐)가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과 함께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산상왕은 동생 계수(罽須)에게 이를 막게 했다.
신상왕은 형수 우씨가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바람에 왕이면서도 늘 겉돌게 되어 불만이 쌓여갔다.
산상왕 7년(203년) 봄, 왕은 산천에 기도를 드리면서 아들 낳기를 소원했는데 보름날 밤 꿈을 꾸었다.
“연우야,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라.”
그러던 어느 날, 산상왕이 말을 타고,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 일행이 멧돼지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쫓아가며 ‘저 멧돼지를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주통촌(酒通村) 마을 입구가지 쫓아갔으나 아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20여 세 되어 보이는 처녀가 나타나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소란스러운가요?”
“산돼지를 잡으려고 그러느니라.”
그러자 처녀가 팔뚝을 걷어붙이더니 산돼지를 몰아 단번에 잡아놓고 말했다.
“아니. 무사들이 이까짓 돼지 한 마리 못 잡아 그렇게 쩔쩔매시다니, 쯧쯧…….”
시종들이 산돼지를 왕 앞에 대령하고 산도owl를 잡은 처녀 이야기를 아뢰자 산상왕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처녀의 집을 찾았다. 처녀의 집에서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 안으로 모시었다.
“산돼지를 맨손으로 잡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왕 앞에 서 있는 처녀의 모습을 본 산상왕은 한동안 여자를 가가이 하지 못했던 지라 갓 피어나는 처녀를 보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날 밤, 처녀는 왕의 침실로 안내되었다. 왕의 시선을 온몸에 받자 처녀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서 금침을 펴도록 하여라.”
“폐하! 후일을 기약해 주시옵소서!”
“후일을 기억하라니? 무슨 말이냐?”
“소녀가 페하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어찌하시겠는지요?”
“허허! 그리되면 궁으로 데려 갈 테니 걱정 말아라.”
왕의 말이 떨어지자 처녀는 왕의 약속을 받아들여 금침을 펴고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후 우씨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서릿발 같은 노기로 씩씩거리며 그녀를 죽이라고 심복을 보냈다.
처녀는 이 소식을 듣고 남장으로 변장하여 도망가려 했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가 그들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들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오.”
“대왕의 명령이라면 받겠지만 왕후의 명령이라면 못 받겠다. 지금 내 몸에는 대왕의 분신이 들어있다. 내 한 생명은 희생되어도 상관없지만 왕자까지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서 물러가서 그렇게 고하여라!”
심복들이 그 소식을 전하자 왕후도 어쩌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산상왕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주통촌으로 찾아갔다.
“그래, 홀몸이 아니라고? 그럼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고?”
“소녀는 오직 폐하를 모신 일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산상왕은 깊은 애정을 느껴 이름을 물었다.
“후녀(后女)라고 합니다.”
“후녀라니, 그 뜻이 무엇이냐?”
“황공하오나 저의 어머니가 저를 잉태하고 점을 쳤는데 왕자를 낳을 거라는 점괘를 받아 그렇게 지었다 하옵니다.”
“오, 네가 일찍이 왕후로 점지 받았다는 말 아니냐!”
왕은 그녀의 말을 듣자 꿈을 생각하면서 후사에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 후 그녀는 옥동자를 낳으니, 이름을 멧돼지를 잡다가 얻은 아들이라는 뜻으로 교체(郊彘)라 했다. 나중에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野合公主(야합공주)
野:들 야, 合:짝 합, 公:귀인 공, 主임금(주인) 주.
어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고 무단히 부부가 된 공주라는 말. 기구한 운명이나 복잡한 사연이 있는 부부를 뜻한다.
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선 제7대 세조(세조. 1417~1468)의 셋째 공주는 어려서부터 어질고 덕성스러웠다. 그런데 아버지 세조가 단종(端宗.1441~1457)을 폐위시키고 권좌에 오르면서 좌의정 金宗瑞를 비롯한 皇甫仁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는 밤낮으로 슬퍼하며 밥도 먹지 않았다. 더욱이 단종의 어머니 무덤, 소릉(昭陵)이 파헤쳐질 때에는 눈물로 간곡하게 만류하니, 세조는 비록 딸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해했다.
그러자 공주의 어머니 정희대비(貞喜大妃)가 유모로 하여금 공주를 데리고 멀리 피신케 하고, 세조에게는 공주가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속였다.
공주와 유모는 정처 없이 헤매다가 충청도 보은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지쳐서 길가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한 총각이 자나다가 물었다.
“두 분은 시골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네, 그럴 사정이 있어 한양에서 이곳까지 왔으나 딱히 갈 곳을 정하지 못해 주저하고 있습니다. 한데 총각도 보아하니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한데 무슨 사연이 있는 것 아니오?”
“네, 저도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 홀로 살고 있습니다.”
공주가 총각을 살펴보니 의복은 비록 남루하지만 남자답고 늠름한 데가 있어 임시로 함께 거처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정이 들어 부부가 되었고, 총각은 비로소 공주에게 그곳에 내려온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자 유모가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총각은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김종서어른의 손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를 당하시던 날, 나만 홀로 피하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게 우연치 않게 야합(野合)한 두 사람은 서로 위로하며 살았다.
한편, 세조는 말년이 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절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불공을 드렸다. 그 행차가 속리산으로 가는 중에 공주가 사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놀고 있는 공주의 아들을 보게 되었다. 세조는 그 아이의 용모가 자신을 많이 닮은 것을 이상히 여기고, 아이를 따라 집에까지 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을 만나게 되었다. 공주는 김종서의 손자와 살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세조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살자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공주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종서의 손자는 공주의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이 비사(秘史)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박승휘(朴承輝.1802~1864)에 의해서 전해졌다. 그때부터 기구한 운명이거나, 복잡한 사연이 있는 부부를 비유하여 야합공주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於異阿異(어이아이)
於;어조사 어, 異:다를 이, 阿:언덕 아.
어의: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즉 점 하나 차이에 의해 소리가 달라지듯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뜻의 말이라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을 이른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태평한화(太平閒話).
박상깅(朴相吉)이라는 푸줏간 주인에게 김선기(金善基)와 박태환(朴太煥)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 먼저 김선기가 말했다.
“얘! 상길아, 고기 한 근 썰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 소리에는 어디인지 모르게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러나 박태환은 상대가 천민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기에 높여서 말했다.
“박서방, 여기 고기 한 근 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쓱싹 썰어 주었다. 먼저 고기를 받아 든 김선기가 보니까 자기 것이 박태환의 것보다 절반도 안 되는 지라 화가 나서 물었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어찌 내 것은 이리 적으냐?”
그러자 푸줏간 주인이 볼멘소리로 쏘아붙였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 서방이 잘랐기 때문이죠. 세상에 허구 많은 말이지만 그 나이가 되시도록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어이아이(於異阿異)’는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을 음에 맞추어 한역(漢譯)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鷰頷鷹眼(연암응안)
鷰;제비 연, 頷:턱 함, 鷹:매 응, 眼:눈 안.
어의: 제비의 턱과 매의 눈이란 말로, 장차 큰 인물이 될 비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신라의 거칠부의 처음 인상을 보고 장차 장군이 될 인물임을 알아본 데서 유래되었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44권 거칠부>
신라(新羅)시대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이라고도 함)는 내물왕(奈勿王)의 5대손으로 성은 김(金)씨이며,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며, 아버지는 이찬 물력(物力)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뜻이 있어 스님이 되어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법사 혜량(惠諒)에게로 가서 법경 강론을 들었다.
그를 본 혜량법사가 물었다.
“사미는 어디에서 왔느냐?”
“예, 신라에서 왔습니다.”
“네 용모를 보니 범상치 않구나,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
“아니옵니다. 저는 신라의 변방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아직 불교의 진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스승님께 참된 도리를 배우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니 거절하지 마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오늘 너를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가 작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능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가 네가 신라에서 온 것을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이 말을 듣고 거칠부가 돌아가려고 하자 법사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너의 인상이 제비턱(鷰頷.연함)에 매의 눈(鷹眼,응안)이라, 장래에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장차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오게 되면 그때 나를 해치지 말아라.”
“네, 만일 스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 진흥왕(眞興王) 6년, 545년에 왕명을 받들어 국사(國史)를 편찬했으며, 그 공로로 파진찬(波珍湌)으로 승진했다. 진흥왕 12년, 왕은 거칠부 및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角粲),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그리하여 백제의 군사가 먼저 평양에 진입하자 거칠부는 죽령 밖 고현(高峴) 안의 10개 군(郡)을 빼앗았다. 그때 혜량법사와 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거칠부는 즉각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깎듯이 걸하고 그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옛날 유학하던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으니 나는 그대의 나라로 가서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거칠부는 혜량법사를 모시고 돌아와 왕에게 사실을 아뢰니, 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삼아 백좌강회(百座講會)와 불교의 의식인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게 했다.
거칠부는 진지왕(眞智王) 원년(元年)(576년)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나라의 중요한 군사, 정치 임무를 수행하다가 78세에 별세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裂起之勇(열기지용)
裂;찢을 열, 起:일어날 기, 之:어조사 지, 勇:날랠 용.
어의: <열기>의 용기라는 말로, 남들이 어려워 기피하는 일을 자원해서 용기있게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7
열기(裂起)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661~681) 때의 무관이었다.
문무왕 원년, 당나라의 소정방은 고구려 정벌에 나서 평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군량이 떨어지자 함자도 총관 유덕민을 시켜 신라의 국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해 쌀 4천 석과 벼 2만 2250석을 수송하게 했다. 그 행렬이 장새(獐塞. 수안.遂安)에 당도했는데, 눈바람이 휘날리고 날씨가 몹시 추워 말과 병사들이 많이 얼어 죽는 바람에 조달되지 못했다. 그러자 이를 안 고구려 군사들이 길목을 막고 공격해왔다. 당황한 김유신은 멀리 덜어진 당나라 지휘관에게 서찰을 보내려 했으나 거리가 멀어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이때 보기감(步騎監)으로 있던 열기가 나서며 말했다.
“장군님!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구근 등 군사 15명과 함께 말을 달리니, 고구려 군사들이 그 용맹에 놀라 감히 막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이틀 만에 소정방에게 명을 전달하니, 소정방은 크게 기뻐하며 답장을 써주었다. 열기가 다시 이틀 만에 돌아오니, 유신은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왕에게 상신했다.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임시로 급찬(級湌) 위를 주었으나 공로에 맞지 않으니, 사찬(沙湌)으로 위를 높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 사찬이면 좀 과하지 않은가?”
이에 유신은 두 번 절하며 말했다.
“벼슬과 녹봉은 공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온데 어찌 과하다 하십니까?”
그제야 왕이 흔쾌히 허락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與民同樂(여민동락)
與:더불 여, 民:백성 민, 同:한가지 동, 樂:즐길 락.
어의;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한다는 말.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혼연일치한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2.
삼국시대 때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삼국이 서로 먼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통일의 터전’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475년에는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 점령했고, 553년에는 신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하여 신라를 견제함으로써 신라는 고립되었다.
이에 신라가 당(唐)나라와 제휴를 모색하자 당나라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병탄(倂呑)하려는 야욕을 품고 나(羅).당(唐) 연합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나라에서는 적당히 관여하다가 때가 오면 실리(實利)를 차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쉬고 있다가 상대가 지치면 맞아 싸운다는 병법 이일대로(以逸待勞)의 계략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때문에 당은 병력과 무기를 일부만 가져오고 군량과 피복은 신라가 부담하게 했다. 다라서 신라의 부담은 이중 삼중으로 가중되었다. 그 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게 되자 노골적으로 흉계를 드러내 백제 땅에는 5도독부(五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9도독부(九都督府)를 두어 병탄정책(倂呑政策)을 노골화했다. 당나라의 이러한 행위는 배신행위임에 분명했고, 나.당 연합의 협정(協定)을 크게 위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는 백제의 사비성(泗泌城)에 거점을 만들고 신라를 침범하려는 음모까지 꾸미자 신라에서는 이를 알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우리 신라의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시켜 반란을 꾀하려는 것처럼 하면 당나라 군사들이 이를 제압하려 나올 것입니다. 그때 맞서 싸운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金庾信)도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당군은 우리를 위하여 백제군을 격멸시켰는데 이제 와서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는가?”
이에 김유신이 나서서 말했다.
“개도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하물며 나라의 존립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지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오리이까? 바라옵건대 이를 허락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라는 국방을 튼튼하게 재정비했다.
한편,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신라의 방비가 튼튼해지자 백제의 관리93명과 군사 2만 명만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당 고종(高宗)이 말했다.
“어찌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아니했는가?”
소정방이 말했다.
“신라는 그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써 나라를 받들고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부형(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정벌하기가 어려웠나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汝是汝是(여시여시)
汝:너 여, 是:옳을 시.
어의: 너의 말이 옳고, 너의 말도 옳다. 즉 사람의 일은 두루두루 따지면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는 뜻 이다.
문헌: 한국인물지(韓國人物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때 사람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庬村)이다. 그는 각 부서의 수장을 거쳐 영의정을 18년간이나 역임하면서 많은 제도를 개선한 명재상(名宰相)이었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과 문예춘추관, 경기 도사(都事)를 맡아보았다.
영의정이 되어서는 예법(禮法)을 개정하여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평소 위엄이 있으면서도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날카로운 눈썹, 그리고 수염이 잘 어울렸다. 마음이 너그러워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백성이니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얽힌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가 편지를 한 통 써 두었는데 하인의 아이가 그 위에다 오줌을 누워버렸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불문에 부쳤다. 또 한 번은 그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린 하인 아이가 흙 묻은 맨발로 들어와 술안주를 맨손으로 집어먹다가 그의 발을 밟았다.
“어이쿠! 아프다!”
여늬 사람 같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만하건만 그가 내뱉은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여자 하인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찾아와서 상대방이 이러이러하게 잘못을 하고도 덤빈다고 하소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가 말했다.
“그래, 네가 옳다.”
그러자 이번에는 같이 싸웠던 하인이 달려와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황희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도 옳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조카가 한마디 했다.
“숙부께서는 그런 판결이 어디 있습니까? 너는 그러하고 너는 이러하니 네가 옳고 네가 잘못했다라고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황희가 말했다.
“그래, 너의 말도 옳구나.”
그는 매사를 여시여시(汝是汝是)로 일관하니 주관이 분명치 않은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그의 생각이 너그럽고, 인격이 원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