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사성어17 [泥田鬪狗(이전투구) ~ 立志忘情(입지망정)]
泥田鬪狗(이전투구)
泥: 진흙 니. 田:밭 전, 鬪:싸울 투, 狗:개 구.
어의: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말로, 서로 헐뜯거나 다투는 것을 이른다. 원래는 함경도 사람의 강인한 성격을 평한 말이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의 태조(太祖)가 공신 정도전(鄭道傳. 1337~1398))에게 팔도(八道) 사람들의 성격을 한 구절로 평하여 보라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 속에 비친 미인)),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流. 바람 앞에 하늘거리는 가는 버드나무),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굳은 절개),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 바위 아래 늘근 부처),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봄 물결에 던져진 돌맹이), 평안도는 산림맹호(산림맹호. 산속 숲에 사는 거친 호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태조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내리지 못했다. 태조가 어떤 말이라도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입니다.”
그러자 태조의 얼굴이 금방 벌개지니 눈치를 챈 정도전은 곧 말을 고쳐 대답했다.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 돌밭을 가는 소)이기도 하옵니다.”
그제야 태조의 얼굴빛이 밝아지면서 후한 상을 내렸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 팔도에 대한 위치와 그 역사적 배경 등을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이 책은 팔도총론(八道總論)과 복거총론(卜居總論)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팔도총론에서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그 지리를 논하고, 각 지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결부시켜서 밝혔다. 그리고 복거총론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그 입지 조건의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地方誌)에 해당하고,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의 총설에 해당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를 들었으며, 또 가거지류(可居地類)와 피병지(避病地), 복지(福地), 은둔지(隱遁地), 일시유람지(一時遊覽地) 등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각 지방마다의 별칭은 아래와 같다.
경기(京畿)에는 도(道)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어서 별칭이 없고, 영남(嶺南)은 경상도로서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남쪽을 말한다. 호서(湖西)는 충청도인데, 충북 제천 의림지호(義林池湖)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호남(湖南)은 전라도인데, 전북 김제 벽골제호碧骨堤湖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영동(嶺東), 또는 관동(關東)은 대관령 동쪽이라는 뜻이고, 해서(海西)는 평안도로 철령관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이전투구란 성어는 정도전 자신이 창작한 말이 아니고 이전부터 팔도 사람들의 특성을 그렇게 평가하던 말 중에 들어 있던 것이다. 지금은 이 말이 아주 막돼먹은 싸움질이나 난장판을 비유하지만 원래는 사람의 성격을 평가한 말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理主氣從(이주기종)
理:다스릴 리, 主:주인 주, 氣:기운 기, 從:따를 종.
어의: 이(理)가 주를 이루고, 기(氣)가 보완한다는 뜻이다.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유래하였다.
문헌: 선문염송(禪門拈頌)
유학(儒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이는 우주 만물의 존재 권리를 말하고, 기는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이 되는 기운, 즉 에너지를 말한다. 이는 형태와 작위가 없는 무형무위(無形無爲)의 형이상(形而上)의 존재이고, 기는 형태와 작위가 있는 유형유위(有形有爲)로 형이하(形而下)의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형이상의 이는 도(道)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요, 기는 형이하의 기(器)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다.
달리 설명하면 이(理)와 기(氣)는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태극(太極)을 말하는데, 태극은 일음일양(一陰一陽)으로 되어 있으며, 이 음양은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은 만물화생(萬物化生)을 뜻하는 것으로서 만물이 낳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말한다.
도(道)는 음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기(氣)를 떠나서는 이(理)도 존재할 수 없으며 기 또한 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이기설(理氣說)이다.
여기서 기(氣)는 곧 성(性)이고, 또 형질(形質)을 가지고 있으며, 그 형질은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으며, 다만 기를 통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理)로 파악하지 않으면 기(氣)의 이 같은 작용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기이원론이 중심이 되어 실천윤리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성리학(性理學)이 학자들에 의해 크게 제창되었다. 성리학은 이러한 이론을 근간으로 이(理)를 중시하는 학파와 기(氣)를 중시하는 학파로 분리되었으며, 여기서 이주기종(理主氣從)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기론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서경덕(徐敬德)과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경덕은 한마디로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하여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면서도 이 우위론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이는 같은 이기이원론이면서도 기발이승도설(氣發理乘途說)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학설 전개가 나중에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대두되었다.
말하자면 이황의 이론을 존중하는 파는 영남학파로 주리론(主理論)적 경향을 보이고, 이이를 종사로 하는 기호학파는 주기론(主氣論)적 경향을 띠게 된 것이다.
한편 양설을 취사선택하여 절충식 입장을 보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이(理)로부터 기(氣)를 보면 이(理)가 주(主)가 되고 기(氣)로부터 이(理)를 보면 기(氣)가 주(主)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已瞻新日(이첨신일)
已: 이미 이, 瞻:볼 첨, 新:새 신, 日:날 일.
어의: 이미 새로운 해를 보았다는 말로, 어떤 일을 이미 결정하여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려의 무신 강조(康兆. ?~1010)가 제7대왕 목종(穆宗. 980~1009)을 살해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거란(契丹)의 성종(成宗)은 그를 핑계로 1010년에 40만 군사를 이끌고 2차 침략을 감행했다.
그것은 1차 침략 때 겨우 강동 6주만을 점령하고 실패한 것을 만회하려는 구실이었지만 명분은 고구려의 내분을 내세웠다.
“고려국에서 강조가 전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세웠는데 그에 따른 대역의 죄를 묻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노라.”
이에 현종은 거란과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강조는 이번 거란의 침범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직접 나아가 싸우겠다며 해동도통사(海東都統使)가 되어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강조는 검차(檢車.일종의 장갑차)를 창안해 겉에 많은 칼을 꽂아 적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그 안에서 활을 쏘아 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위세가 워낙 강하여 전세는 점점 불리해져갔다.
강조와 부사 이현운(李鉉雲)이 모두 무술이 뛰어나고 씩씩한 것을 본 거란의 성종은 두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사로잡고 먼저 강조에게 자기의 신하가 되라고 권고했다. 강조는 한 마디로 거절했으나 이현운은 ‘이미 새 해를 보게 되었으니(已瞻新日.이첨신일), 이 마음 어찌 고향 산천을 생각하오리까?’ 하며 항복의 뜻을 표했다.
강조는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어떤 일을 잊거나 배반한 자를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梨太成洞(이태성동)
梨:참배 리, 太:클 태, 成:이룰 성, 洞:마을 동.
어의: 배가 커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말로, 서울의 이태원동 지명에서 유래했다. 무엇이든지 하나의 특색이나
장점이 있으면 그것으로 성공하거나 유명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韓國) 지명(地名)이야기
한국의 지명(地名) 중에는 배나무 리(梨)자가 들어가는 동네 이름이 많고, 또 배나무가 번성하는 동네는 대부분 살기 좋은 동네이다.
서울의 이태원(梨太院)도 그중의 하나다.
이태원은 배나무가 많고, 그 열매도 유난히 크고, 탐스러워 클 태(太)자를 써서 이태원이라 했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기도 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갖가지 문화재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불길에 휩싸였다.
당시 이태원에는 운종사(雲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수십 명의 여승(女僧)들이 수도(修道)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병들이 서울에 입성하여 그곳을 본거지로 삼게 되자 여승들에게 큰 수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도하는 스님에게 무도한 일본 병사들이 밥을 짓게 하는가 하면 아예 농락까지 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 통에 피해를 본 여승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이기에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평화롭던 마을 이태원에 불어 닥친 왜란의 회오리는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다가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해로가 끊긴 왜군들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도요토미가 사망하게 되니 7년 왜란은 끝을 맺었다.
그런데 그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임신한 여승들이 속출했다. 시대의 비운을 떠안은 그 여승들 중에는 더러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와중이라 계속해서 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서 방황했다. 이를 보다 못한 관가에서는 흙으로 움막을 지어 추위에 떠는 여승들이 모여 살게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나중에 그곳 마을 이름을 다를 이(異)자와 아이 밸 태(胎)자를 썼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 피해를 입은 여승들의 처지를 담아 이른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의 운종사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태원에 외국어 간판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은 옛날의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理判事判(이판사판)
理:이치 리, 判:나눌 판, 事:일 사.
어의; 이판승은 불경의 연구와 참선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일컫고, 사판승은 절의 운영 및 경리사무 등을 맡아
보던 승려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이른다.
문헌: 이판사판야단법석(理判事判野壇法席)
이판사판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합성어로서, 이판승(僧)은 참선, 경전, 공부, 수행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승(僧)은 절의 재물과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스님이다. 그러니까 이판사판의 용어는 불교 조직의 핵심용어다.
조선말의 학자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저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하편 <이판사판사찰내정(理判事判寺刹內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사찰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의 두 종류의 승려가 있다. 이판승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며, 수행하고 홍법 포교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工夫僧)이라고도 한다.
사판승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을 관리하거나 사무 행정을 꾸려 나가는 스님들로, 속칭 산림승(山林僧)이라고도 한다.
산림이란 절의 모든 사무와 재산 관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사찰 내에서 하는 역할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었던 것이 차츰 교구가 확장되고 사찰마다 주지(住持)가 책임자로 정착되면서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 사이에 묘한 문제가 일어났다.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 중에 누가 주지가 되는가에 따라 운수승(雲水僧)과 주지 사이에 밀도가 달랐던 것이다. 즉 이판승인지 사판승인지 출신에 따라 흐르는 기류가 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산사를 찾는 객성은 그 절의 주지가 이판승 출신인지 사판승 출신인자 알아야 처신하는 데 옹색하지 않았다.
사실 이판과 사판은 그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伽藍)이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청허(淸虛), 부휴(浮休), 벽암(碧巖), 백곡(百谷) 스님 등 대사들은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척불(斥佛)이 고조되자 나중에는 이판승이나 사판승이나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 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儒敎)를 국교로 세우면서 스님은 성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때문에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스님이 되는 것은 마지막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간대접 받기가 힘들었던 시대였는데 그래서 이판, 사판은 마지막 끝장을 의미하는 뜻으로 변질되고 지금과 같은 말로 전해졌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扨睾得權(인고득권)
扨:꺾을 인, 睾:불알 고, 得:얻을 득, 權:권세 권.
어의: 스스로 거세를 하여 권세를 얻는다는 말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중요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이른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1236~1308)은 1271년도에 원나라 공주 홀도로게리 미실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므로 말미암아 고려는 부마국(鮒馬國), 즉 원나라의 사위 나라가 되었다.
그 후 몽고풍의 복장을 하고 머리를 따 내리는가 하면 머리에 색색의 치장과 족두리를 썼으며, 연지를 사용하고 장도(粧刀)를 지니게 되었다. 생채로 쌈을 먹고, 두루마기를 입기 시작했으며, 고려병(高麗餠)이라는 몽고식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원(元)에서 주자가례의 책이 들어오고 서방 사라센의 문화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서 환관(宦官) 최세연(崔世延)이 크게 득세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덩달아 환관이 되고자 스스로 거세(去勢)를 하는 풍경이 일었다.
최세연은 처음부터 환관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투기가 심해서 그녀에게서 벗어나고자 거세를 하였다. 그런데 왕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에게 총애를 받던 환관 도성기(陶成器)의 세도를 보자 그에게 가까이하여 환관이 되었다.
충렬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제국공주는 원(元)나라 제5대 세조(世祖)의 딸이었다. 16세의 나이에 40이 된 충렬왕과 혼인하여 궁중을 감독하는 것은 물론 정치에도 관여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최세연에 대한 왕의 총애가 도성기를 능가하자, 두 사람은 장군(將軍)의 반열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최세연은 왕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뇌물을 모으고 조정의 인사에도 관여하여 승진, 파직, 축출을 자기 뜻대로 행사했다. 그런데도 종실(宗室)이나 재상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또 궁인 무비(無比)와 결탁하여 마음껏 횡포를 부렸다.
바로 그 중심에 제국공주가 있었다.
제국공주의 몽고 이름은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홀도노게미술시)였는데 후계자 충선왕(忠宣王.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를 낳으므로 대신들의 축하 문안을 받았다.
나중에 제국공주가 죽자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을 얻은 것은 투기에 의한 것이라면서 무비(無比)와 도성기 등을 함께 참형했다.
당시에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이 많이 나온 것은 국경이 그 만큼 어지러웠음을 보여 주는 예가 될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人事隨心(인사수심)
人: 사람 인, 事:일 사, 隨:따를 수, 心:마음 심.
어의: 사람의 일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 즉 사람의 생각에 따라 일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구르는 수 만큼 살 수 있다는 삼년고개에 얽힌 옛날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문헌: 어린이 설화집(說話集)
귀가 도자전(刀子廛) 즉 ‘마루구멍이다’는 속담은, 배운 것은 없으나 귀로 들어서 많이 안다는 뜻이다. 배운 것이 없어도 귀로 들어 알고 있으니 귀야말로 보배라는 말이 도자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들은 이야기가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가 될 수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의 말을 잘 믿는 노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장에 갔다 오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드러누워 버렸다. 아내가 걱정이 되어 그 이유를 묻자 죽어가는 목소리로 변했다.
“큰일 났소. 나는 이제 삼 년밖에 더 못 살게 되었소. 장에서 오는 길에 삼년고개에서 넘어지고 말았단 말이오.”
그 마을 입구에는 그곳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산다는 ‘삼년고개’라는 재가 있었다. 아내는 그 말을 듣자 통곡을 하였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당신이 삼 년밖에 못 살면 나는 어린 자식들과 어떻게 살라고…….”
어머니가 통곡을 하자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었다. 노인은 너무 근심을 한 나머지 끝내 병이 나버렸다. 아무리 좋은 약을 쓰고, 용한 의원을 불러와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사는 한 청년이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통곡소릴 듣고 들어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초상이 난 것도 아닌데…….”
“어쩌면 좋은가? 내가 잘못해서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삼년고개에서 넘어졌다네, 귀에 싹이 나도록 들어온 그 삼년고개에서 넘어졌으니 이제 삼 년밖에 더 못 살게 된 것이 서러워 그러지 뭔가!”
“아니,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러십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나으셔서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사실 테니…….”
청년의 말에 노인은 귀가 번쩍 띄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예.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아주 쉬워요.”
“어떻게 하는 건데?”
“삼년고개에 가서 몇 번만 더 넘어지시면 됩니다.”
“예끼 이 사람! 그러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 텐데?”
노인은 화를 벌컥 내며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삼년고개에서 넘어지셨으니 삼 년밖에 못 사신다고 하셨지요?”
“그래.”
“그러면 또 한 번을 넘어지시면 육 년을 사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세 번 넘어지시면 구 년, 네 번 넘어지시면 십이 년…….”
“가만 있자,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녕 그렇구나!”
노인은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삼년고개로 올라가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목청껏 외쳤다.
“산신령님! 제가 구르는 숫자의 세 배만큼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어디선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암 그렇게 하고말고! 십팔만 년이나 산 저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 東方朔)이 보다도 더 오래 살게 해주마!”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몇 번이고 굴러 내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청년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人蔘宰相(인삼재상)
人:사람 인, 蔘:인삼 삼, 宰:재상 재, 相:서로 상.
어의; 인삼을 주고 오른 재상이란 말로, 선조 때의 상궁 김개시에게서 유래했다. 부패한 관리를 비유하여 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광해군 일기(光海君 日記)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의 상궁(尙宮) 김개시(金介屎: 속명 개똥이 ?~1623)는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선조(宣祖)의 미움을 받는 것을 기화로 광해군에게 아부하여 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래서 일개 상궁임에도 불구하고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
개시와 이첨은 서로 다투어 가며 매관매직을 일삼아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보다 못한 윤선도(尹善道), 이회(李洄) 등이 이를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혼탁한 틈을 이용하여 한효순(韓孝純)이란 자가 그녀에게 인삼을 뇌물로 바쳐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효순을 인삼재상(人蔘宰相)이라고 불렀다. 또 이충(李沖)은 희귀한 채소를 상납하여 호조판서가 되니, 그에게는 잡채판서(雜菜判書)라는 별호를 붙여주며 비웃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因貝空村(인패공촌)
因:인할 인, 貝:조개 패, 空:빌 공, 村:마을 촌.
어의; 조개 때문에 마을이 비다. 고려 때 한 마을 사람들이 고을 수령에게 뇌물로 바칠 조개를 잡기 위해서 모
두 바다로 나가는 바람에 마을이 텅텅 비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좋지 않은 일로 황당한 결과가 초래되
었을 때를 비유하여 쓰인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때 유석(庾碩. ?~1250)은 여러 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명관이라는 칭송을 듣고, 치적도 많았다. 그는 탐관과 함께 일하기가 싫어 산성을 수축하라는 어명을 받고도 선비들과 함께 시(詩)를 읊으며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탐관 최이(崔怡)가 나서서 그를 귀양 보냈다.
그가 귀양지로 떠나는 날, 온 고을 백성들이 나와 애통해했다.
“하늘이여! 유공 같은 명관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귀양입니까? 공을 보내버리면 우리 백성은 누구를 의지해 살라는 것입니까?”
이처럼 백성들의 간청이 드높자 곧바로 면죄되어 다시 동북면 병마사(兵馬使)로 기용되었다.
그곳에는 악폐가 하나 있었다. 강요주(江瑤珠. 바다조개)를 잡아 그곳의 안찰사 최이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그 시초는 어느 아부꾼 병마사가 한 짓이었는데 어느새 관례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유석이 그곳에 부임해왔을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강요주를 잡아다 바치는데 시달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마을이 거의 비어 있었다.
유석은 즉시 강요주 채취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얼마 후 이주했던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당시 지방의 수령들은 중앙의 권력자에게 아부하느라고 자기 고을의 특산물을 경쟁적으로 바치고 있었다. 이런 아첨꾼들 틈에서 유석이 강요주 채취 금지 공문을 내리니 어느 한 수령이 그것을 최이에게 고해바쳤다.
“고얀 놈! 자기가 안 바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까지 못하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는 못마땅해 했으나 유석이 워낙 청렴결백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노비(奴婢)문제로 무고(誣告)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左遷)되는 등 수난을 격기도 했지만 그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一步可闚(일보가규)
一:한 일, 步:걸음 보, 可;옳을 가, 闚:엿볼 규.
어의: 천 리길을 갈 사람은 첫걸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문헌: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때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두 사문(스님)이 서로 친한 사이여서 약속을 했다.
“극락으로 먼저 가는 사람은 반드시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그 길을 알려주기로 하자.”
그러고 나서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살며 미투리(짚신)를 삼아 시장에 팔아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편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어느 날, 해가 붉은 빛을 드리우고 고요히 저물어 가는데, 엄장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나 먼저 서방으로 가네, 자네도 빠른 시일 내에 오게나.”
놀란 엄장이 문을 열고 살펴보니 멀리 구름 위에서 음악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뻗쳐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광덕의 집을 찾아가 보니 그가 죽어 있었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지내주고 나서, 광덕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남편이 죽고 없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원하신다면 그러하겠습니다.”
엄장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광덕 아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되어 엄장이 광덕의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자 광덕의 아내가 말했다.
“스님께서 쾌락을 구하면서 서벙정토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엄장은 동거를 허락한 광덕의 아내가 뜻밖의 말을 하자 깜짝 놀라 물었다.
“친구 광덕도 당신과 함께 살았는데도 극락에 갔는데 무에 그러시오?”
그러자 광덕의 아내가 말했다.
“그분과 나는 10여 년이나 동거했지만,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거나 십육관(十六觀)을 지으며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그 빛 위에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미혹을 달관하는 선에 드시곤 했지요. 그러하니 그가 서방세계로 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일은 시작부터 알아본다는 일보가규(一步可闚)라, 천 리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제가 보기에 스님은 동쪽으로는 갈 수 있겠으나 서쪽으로는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와 곧 원효(元曉)법사에게 가서 왕생의 요체를 간절히 물었다. 원효는 그에게 정관법(淨管法)을 가르쳐 주었다. 엄장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지성으로 도를 닦아 그 역시 서방세계로 갔다.
광덕의 아내는 겉으로는 분황사의 노비였으나 사실은 관음보살의 19응신(應身) 가운데 하나였다.
광덕이 생전에 시를 지어 읊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시었으니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낱낱이 사뢰소서.
서원(誓願) 깊으신 존을 우러러 두 손 모아 비오니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두고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모두 이루소서.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一善八十幸(일선팔십행)
一:한 일, 善:착할 선, 八:여덟 팔, 十:열 십, 幸:복 행.
어의; 한 번 선행을 하면 팔십 살까지 행복하다. 조선 숙종 때 염희도라는 사람으로부터 유래한 말로, 선행을 장려하는 말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때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0)은 남인의 한사람으로 기년설(朞年說. 조대비.趙大妃에 대한 상례인 복상문제.服喪問題)을 주장하여 영의정이 되었으며, 경제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했다.
허적에게는 문객으로 드나들던 염희도(廉喜道)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진실하고 곧아 불의를 보면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에 맞지 않으면 누구라 해도 거침없이 직간했다.
염희도는 허 정승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염희도가 길을 가다가 보따리를 하나 주었는데 그 속에 은 2백30냥이라는 큰돈이 들어 있었다.
“어쩌다 이 많은 돈을 잃어버렸을까?”
그는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돈의 주인을 찾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병조판서 김석위의 집에서는 말 값으로 인해 큰 소동이 벌어졌다. 하인이 말을 판 값을 받아 가지고 오다가 그 돈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하인은 부원군(府院君) 집에서 말 값 2백 냥 외에 말을 잘 길들여 주었다면서 수고비로 준 30냥을 더 얹어 받은 다음 그 집에서 대접하는 술을 한잔 마시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술이 화근이었다. 오는 도중에 그만 길옆 나무 그늘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해가 질 녘에야 일어나 부리나케 오다가 돈 보따리를 찾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오긴 했으나 거금을 잃어버렸으니 오금을 못 펴고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 판서는 필시 하인 놈이 노름을 하여 돈을 잃어버리고서 둘러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고를 칠 작정이었다.
그때 염희도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대감마님! 혹시 이 돈이 대감님 댁 돈이 아닌지요?”
김 판서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분실된 돈이 아니냐? 어떻게 해서 네가 갖게 되었느냐?”
희도는 돈을 주운 경위를 설명하였다.
“네 성이 무엇이냐?”
“성은 염가이고, 이름은 희도입니다.”
“허허, 네 성이 염가라서 그런지 넌 참으로 염결(廉潔)하구나. 길에서 횡재한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예까지 찾아오다니……. 이 돈은 네가 주운 것이니 반은 가져가도록 하라.”
희도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소인이 돈에 욕심이 났다면 이렇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 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과시 의인이다. 내 집에 자주 들르도록 하라.”
희도가 밖으로 나오자 두 여인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 말 값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람의 어미요. 이 아이는 제 아들의 계집입니다. 어르신 덕택에 목숨을 건졌으니 은혜가 태산 같습니다. 소찬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 들러 주십시오.”
두 여인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따라가니 20여 세 된 처녀와 15세 쯤 되는 처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누이동생인데 판서 대감댁에서 음식을 만드는 숙주로 있습니다.”
하면서 술을 따라 올렸다.
그 후 허 정승 댁의 아들 견(堅)이 역모에 연좌되어 폐가가 되었는데, 희도 역시 그 집에 드나들던 몸인지라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한 여인이 찾아와 말했다.
“예전에 뵈었던 김 판서 댁 하인의 누이동생입니다. 그처럼 선하셨던 분이 이게 웬일입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부(禁府)에서 어르신네의 전날의 선행을 잘 아는지라 풀어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희도는 그렇게 해서 풀려났다.
그 뒤, 장삿길로 들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부잣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주인 여자가 나오더니 말했다.
“어른을 뵈오려고 학수고대했는데 마침내 이제야 뵙게 되었습니다. 전날 말 값 때문에 죽을 번했던 사람의 딸이옵니다. 어른의 하해 같은 은덕으로 아버님이 살아나신 것을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만나 뵈오면 꼭 그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뵈오니 감개무량하옵니다.”
희도가 보아하니 옛날 술을 권하던 그 처녀가 틀림없었다.
처녀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뫼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동네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가운데 혼례를 올렸다.
그 후 집안의 모든 살림은 아내가 맡아 다스렸고, 염희도는 80여 생을 후덕하게 살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臨戰無退(임전무퇴)
臨;임할 임, 戰:싸움 전, 無:없을 무, 退:물러날 퇴.
어의: 전쟁에 나서면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 신라 화랑오계 중의 하나로 신라 청소년들의 무사도 정신이었 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7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했을 때 백제의 계백(階伯. ?~660) 장군은 휘하 5천 결사대와 함께 국운을 걸고 항전했다.
계백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춘추전국시대 때 월나라의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본받을 때다. 모든 장병들은 각자가 분발하여 싸움에 이김으로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토록 하라.”
그리하여 황산벌에서 5천 명의 결사대로 신라 군사 5만과 상대하여 네 차례나 분쇄했다.
신라군 중에 좌장군(左將軍) (品日)의 아들 관창이 나이 16세인데도 기사(騎射)에 능하여 부장(副將)에 임명되어 그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통솔자 품일이 관창을 불러 말했다.
“너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의지와 기개가 있으므로 오늘이야말로 그러한 기질을 보여줄 때다. 용맹스럽게 나아가 싸우도록 하라!”
연민이 가득 찬 아버지의 당부를 듣고 관창이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관창은 곧 말을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적 몇 명을 죽였으나 이내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계백 장군에게 끌려갔다. 계백은 그의 투구를 벗겨 보고 그가 듯밖에 소년임에 놀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관창은 돌아와서 그냥 살아온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말했다.
“내 적의 장수를 죽이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리라.”
그는 손으로 물을 움켜지어 목을 축이고는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서 힘껏 싸웠으나 다시 생포되고 말았다. 이에 계백은 할 수없이 관창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의 투지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시체를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신라군은 소년 관창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데 크게 자극되어 저마다 분발, 용감히 싸웠다. 그 결과 백제의 계백은 전사했다.
백제군은 5천의 군사로 네 번이나 진퇴를 거듭한 끝에 백제를 위하여 장렬하게 목숨을 바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立志忘情(입지망정)
立:설 립, 志:뜻 지, 忘:잊을 망, 情:뜻 정.
어의: 뜻을 세웠으면 사사로운 정은 잊어야 한다. 즉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
문헌: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항일 독립투사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문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또 틈틈이 승마와 궁술을 익혀 문무를 겸비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인재양성을 위하여 그동안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팔아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으나 끝내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1908년부터는 의병장으로 일본과 싸웠으며,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과 결의하여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 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또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用上俊彦.용상준언)와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삼태이랑), 만주 철도회사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전중청태랑)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중에 나라를 잃은 이국에서 헐벗고 굶주린 데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어느 추운 겨울날 고향으로 향했다. 일본 관헌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겨우 집에 도착한 안중근은 어머니가 기거하는 방 앞으로가서 조용히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 줄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의 반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방안에서는 어머니의 냉랭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내 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러 나간 후 아직 그 일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누가 나를 부른단 말이냐?”
안중근은 어머니의 단호한 말씀에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깨닫는바 또한 컸다.
“그렇다. 어머님 말씀대로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그 일을 성공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잊고 전념해야 한다.”
안중근은 왼손의 약지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뜻을 이루지 않고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 끝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던 것이다. 1910년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3월 26일, 약식 재판만 거친 뒤 바로 사형당했다.
그가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동양 3국이 서로 어깨를 겨루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