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사성어19 [濟馬立醫(제마입의) ~ 眞孝之道(진효지도)]
濟馬立醫(제마입의)
濟::건널 제, 馬:말 마, 立:이를 입, 醫:의술 의.
어의; <제마>가 의술을 세웠다. 즉 이제마가 의술을 체계적으로 완성해 후세에 남겼다는 말로, 대수롭지 않던 사람이 큰일을 이루었을 때 비유해서 쓴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조선의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1838~1900)는 함흥 출생으로 호는 동무(東武)이고, 본관은 全州다.
1888년 김기석(金基錫)의 추천으로 김해현감이 되어 관기(官紀)를 바로잡고 난 뒤 사직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학문 연구에 전심전력했다.
이제마의 탄생에는 남다른 일화가 있다.
이제마의 아버지 이 진사(進士)는 성격이 호쾌하고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과음을 할 때가 많아
엉뚱한 실수를 곧잘 했다.
그가 어느 날 이웃 마을에 다녀오다가 주막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 그만 몹시 취하자 친구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주막집 주인에게 부탁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주막집 주인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못생겨 처녀로 늙고 있었다.
주막집 내외는 딸이 불쌍해서 하룻밤이라도 처녀를 면하게 해주려고 이 진사를 딸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해서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었으나 이 진사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마의 할아버지 충원공의 꿈에 희고 긴 수염의 노인이 탐스런
제주도 말 한 필을 끌고 와 용마(龍馬)라고 하면서 기둥에 매놓고 갔다.
그런데 꿈을 꾼 그날 아침 어떤 여인이 갓난아기를 강보에 싸안고 들어왔다.
충원공은 그 아기를 아들의 소생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름을 지난밤 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제마(濟馬)라 지었다.
이제마는 직장(直長)으로 있던 백부(伯父) 밑에서 글을 배웠는데 타고난 재주가 있어
경서(經書)는 물론 역경(易經)에도 밝았다. 또 무예에도 뛰어나 동국(東國)의 무인(武人)이 되겠다는 뜻으로
호를 동무(東武)라 했다. 이제마는 경향 각지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까지 여행하면서
시대적 사조를 몸소 체험했다.
그는 여행 중에 한석지(韓錫地.1769~1863)의 <명선록(明善錄. 양명학에 대한 서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40세에 무위별선군의 관직을 받고, 50세에는 진해현감을 지내면서
관청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는 평소에 역병(疫病)과 해역(咳逆)의 지병이 있어 구토를 자주하고,
손발이 마비되는 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이로 인하여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역경을 토대로 하여 주역의 태극설(太極說)에 의한 한의학설을 주창했는데
이것이 사상의학(四象醫學)이다. 사상의학은 자연과 인간의 여러 가지 현상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체계를 세운 이론이다. 말하자면 춘(春), 하(夏), 추(秋), 동(冬) 사계절과 수(水), 화(火), 목(木), 금(金)을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이를 의학에 적용함으로써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즉 사람의 체질은 본래 타고나기 때문에 형태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질과 성격에 따라
병에 대한 반응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체질에 맞는 약을 써서 병을 다스려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체질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대손손 유전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학설은 종래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철리적 공론(哲理的 空論)을 배격하고
임상학적(臨床學的)인 방법에 따라 환자의 체질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사상의학은 수백 년 동안 임상실험을 통하여 그 정확성과 과학성이 입증되어 현대의학의 한 분야로
계승되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酒不勝足(주불승족)
酒:술 주, 不:아니 불, 勝:이길 승, 足:발 족.
뜻: 술이 발을 이기지 못하다. 크게 취해도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행동이 바르다는 뜻이다.
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고금청담(古今淸談)
호주가(好酒家) 이경함(李慶涵)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호는 만사(晩沙)로, 조선 선조(宣祖)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그는 술을 대단히 좋아했다. 한번은 명나라의 호주가로 두주불사(斗酒不辭. 한 말의 술도 사양하지 아니함)
한다는 주난우(朱蘭嵎)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와서 자기의 주량이 천하제일이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정함으로 하여금 대작하게 했다.
조선의 호주가와 명나라의 호주가가 마주 앉아 밤새도록 대작한 결과 주난우가 먼저 취하여 쓰러졌다.
그러나 이경함은 끄떡없이 상감 앞에 나아가 복명을 했다. 그는 걸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정상 그대로였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
“네. 어명이시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상감이 큰 은사발에 술을 가득 쳐서 석 잔을 하사하니 그것마저 다 마셨다.
그러고 나서 대궐에서 물러나오는데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같았다.
그는 호주가였으나 일거일동이 신중하여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일렀다.
“그를 한 번 실수하게 하는 것은 백 사람이 옷을 벗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은보감(而隱寶鑑)에는 ‘술에 취한 가운데 말이 없는 자야말로 참다운 군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경함이야말로 술이 발을 이기지 못하는 주불승족(酒不勝足)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酒以丹靑(주이단청)
酒:술 주, 以:써 이, 丹:붉을 단, 靑:푸를 청.
뜻: 술로써 단청을 하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호기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빗대어 사용한다.
문헌: 고승열전(高僧列傳)
단청(丹靑)이란 대궐이나 절 등의 벽이나 기둥, 천장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리는 그림이나 무뉘를 말한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단청은 빛을 많이 받는 쪽에는 붉은 색을 주로 사용했고, 안쪽에는 파란색을 많이
사용했다. 단청을 하게 된 연유는 건물을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일반주택과는 다른 성역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또 건축 자재인 나무를 벌레가 먹는 것을 막고, 썩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일석이조인 셈이다.
단청의 기본색은 청(靑), 적(赤), 황(黃), 흑(黑)의 오색인데 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단청의 무뉘나 색깔은 건물의 위치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구름을 주제로 하거나
하늘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건물의 천장 쪽은 용을 그려 집을 수호한다는 뜻을 담고, 불교 사원에서는 진흙탕에서 곱게 피어나는
연꽃을 그려 불심, 또는 고고한 장신을 상징했다.
단청에 쓰이는 안료는 주로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을 사용했는데, 녹색은 구리의 녹을,
푸른색은 청석(靑石)의 가루를 원료로 썼다. 또 황토나 주토, 치자나 쪽 등에 이르기까지
식물과 광물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경허(鏡虛.1849~1912) 스님과 만공(滿空.1871~1946) 스님에게서 유래한 단청 이야기가 재미있다.
경허와 그의 제자 만공이 한잔 술을 걸치고 길을 가다가 또 다른 주막에 이르렀다. 경허는 이미 다른 주막에서 한잔 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었으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여 배짱 좋게 안으로 들어가 술을 시키고는 만공에게 말했다.
“종이와 붓을 꺼내거라.”
만공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종이와 붓을 꺼내고, 먹을 갈았다. 그러자 경허는 큼직하게 글씨를 섰다.
‘단청불사권선문(丹靑佛事勸善文)’
절 단청을 해야겠으니 시주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만공아, 이걸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너라.”
만공은 그 글귀를 앞세우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시주를 받아서 돌아왔다.
만공이 주막집에 도착하자 경허는 그때까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추운데 고생했구나. 어서 와서 너도 한잔 하거라.”
경허는 만공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병 몇 개를 더 비웠다. 그리고 술이 이마에까지 달아오르자
두 사람은 일어났다. 그리고 시물과 시줏돈을 모두 술값으로 주었다.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 만공이 따지듯 물었다.
“스님, 단청불사에 쓸 돈을 주막에다 다 날리면 어떻게 합니까?”
경허는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만공아, 지금 내 얼굴이 어떠냐?”
“붉으락푸르락합니다.”
“이보다 잘된 단청을 본 적이 있느냐?”
만공도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절 모르고 시주(施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돈이나 물건을 거출하는 것을 이른다.
만공 스님을 보고 시주는 했는데 경허 스님의 얼굴에 단청을 한 골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酒以壓帝(주이압제)
酒:술 주, 以:써 이, 壓:누를 압, 帝:임금 제.
뜻: 술로써 황제를 제압하다. 조선의 장사 김여준이 청나라에 사신의 수행원으로 갔다가 술을 핑계로 청태종 누르하치를 제압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술 또는 어떤 일을 핑계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봉변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1627년, 여진족(女眞族)을 통일한 후금(後金)의 누르하치(奴兒哈赤.노아합적)가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강제로 형제국으로 결연하게 했다. 그리고 명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격하시키고, 다시 1636년에는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용골대(龍骨大)와 마부태(馬夫太)를 보내 황금 1만 냥, 군마(軍馬) 3천 필, 명(明)나라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군사 3만 명을 요구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척화론(斥和論)과 주화론(主和論)이 맞서면서 척화파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백마산성을 방비하고 있던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직행하니, 두 왕자와 종실들은 강화도로 피란하고, 미처 피란하지 못한 인조(仁祖)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에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이듬해 정월에는 청 태종 누르하치가 도착하여 직접 전군을 지휘했다.
포위된 지 45일 만에 인조는 남한산성의 성문 밖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항복하는 조건으로는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臣)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 셋째, 기일을 어기지 말고 조선의 왕자 두 사람을 볼모로 보낼 것. 넷째, 청국이 명을 정벌할 때 원정군을 보낼 것. 다섯째, 조선의 왕족들은 청국의 신하들과 혼인할 것. 여섯째, 황금 백 냥, 백은 천 냥 외 특산물을 바칠 것. 일곱째, 명나라에 했던 것처럼 구례(舊禮)를 다를 것 등이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두 왕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대 김여준(金礪準)이라는 힘센 장사가 왕자를 수행하여 함께 갔다.
그런데 청나라 군사 중에 우거(牛巨)라는 장사가 김여준에게 시비를 걸어 왔다.
“야. 이 조선놈아, 너 나하고 한번 싸워 보지 않을래?”
김여준은 당장 달려가서 그의 코를 납작하게 누러 주고 싶었지만 왕자를 보호하는 신분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싫소! 나는 당신과 싸울 일이 없소.”
“하하. 자신이 없으니까 꼬리를 빼는구나. 조선놈들은 다 너같이 겁쟁이들뿐이니까 우리에게 무릎을 꿇은 게야.”
김여준은 화가 불끈 치솟았다. 함부로 조국을 욕하는 그에게 조선의 매운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좋소. 내가 참고 넘기려고 했는데 그 말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어디 한번 싸워 봅시다. 그런데 우리가 싸우기 전에 조선과 청나라 양쪽의 황제에게 승인을 얻고 정식으로 대결하도록 합시다.”
“그거 좋지!”
소식이 전해지자 청태종은 승낙은 물론이고 아예 직접 싸움을 구경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의 두 왕자도 어절 수 없이 싸움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김여준과 우거의 싸움 날이 되었다. 두 나라 장사의 결투를 보기 위해 청태종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 김여준이 청태종에게 말했다.
“”폐하, 만약 이 싸움에서 누구 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 싸움은 두 나라의 전쟁과 같다. 전쟁을 하다가 죽고 죽이는 일은 당연하지 않느냐?”
“그럼 죽여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틀림없이 약속하셨습니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자 두 사람은 빙빙 돌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치 두 마리의 성난 사자가 으르렁대는 것과 같았다.
우거의 동작에는 거의 허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벌름거리는 큰 코가 조금 약해 보였다.
김여준은 슬쩍슬쩍 공격을 피하면서 우거의 코만 노리다가 갑자기 주먹을 한 방 날렸다. 그러자 우거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김여준이 재빨리 몸을 날려 우거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박고는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아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호랑이를 잡을 때 쓰는 방법이었다.
우거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마다 김여준은 번개같이 박치기로 제압하며 더더욱 허리를 조였다.
김여준은 전쟁 때 당한 동포들의 고통을 이 한판에서 모두 갚겠다는 듯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우거는 입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졌다. 그러자 천태종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얼마 후, 청태종이 큰 잔치를 열고 조선의 두 왕자를 초청하였다. 당연히 김여준이 수행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한 신하가 김여준에게 오더니 황제가 부른다고 했다. 김여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왕자에게 속삭였다.
“황제가 부른다니 가 보겠습니다.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시길 빕니다.”
“그래, 걱정 말고 너나 조심하거라.”
청태종은 김여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지난번에 보니 힘이 장사던데 술도 잘 먹겠지? 어때, 오늘은 나와 술먹기 시합을 한번 해 볼까?”
말술을 먹던 김여준은 자신이 있었지만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술버릇이 좀 고약해서…….”
“허허, 술을 마시면 실수도 하겠지, 그런 건 걱정 마라.”
“그래도 혹시 지엄하신 폐하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하하, 실수 좀 하면 어떠냐. 나는 술주정에 화낼 졸장부가 아니느니라. 어서 시합이나 시작하거라!”
김여준이 청태종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고 나서 시합에 응했다.
김여준이 먼저 단숨에 세 말을 들이키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코끼리 창자도 아니고 어떻게 저럴 수가?”
황제도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어느새 왔는지 조선의 두 왕자도 걱정스럽게 김여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여준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술, 술 더 가져와. 이놈들아! 그래, 대국이라는 나라에 술이 고작 이것뿐이더란 말이냐? 그리고 네놈들 , 오랑캐인 주제에 선량한 조선 민족을 짓밟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이 더러운 놈들!”
김여준이 길길이 날뛰자 그를 글어내려고 청나라 신하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막무가내였다.
“야, 이 오랑캐 놈들아, 우리 왕자님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끌고 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 냉큼 잘못을 빌지 않으면 내가 네놈들을 모조리 혼내 줄 테다!”
보다 못한 청태종은 자리를 뜨고, 연회장은 온통 김여준의 독무대가 되어 버렸다.
몇 년 후, 두 왕자는 청나라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후에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17대 효종(孝宗.1619~1659)이었다.
효종은 충심이 깊은 김여준을 찾아 상을 내리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여서 그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主忠馬又忠(주충마우충)
主;주인 주, 忠:충성 충, 馬:말 마, 又:또 우.
뜻: 주인이 충성스러우면 그가 기르는 말 또한 충성스럽다. 즉 주인의 행동에 따라 종들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문헌: 임진장초(壬辰狀草), 오리집(梧里集)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자 황대중(黃大中)이라는 사람이 장군을 찾아와 말하였다.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분명히 일본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부디 장군께서는 이에 대비하소서.”
“고맙소. 그렇다면 당신도 나와 같이 일을 하면 어떻겠소?”
“저보다 여기 정경달(丁景達)이 사람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써주십시오. 저는 나이 드신 어머니가 계셔서 장군님을 모시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왼쪽 다리가 성치 않은 듯한데 왜 그런 거요?“
그러자 옆에 있던 정경달이 대신 말했다.
“예, 저 사람은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에 사는데, 어머니의 병에 사람의 허벅지 살이 약이 된다고 하여 베어 드렸답니다. 그런데 그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바람에 저리 절게 되었습니다.”
“아, 대단한 효자로군요.”
그후, 황대중은 갑오년 시월에 왜적이 남해안에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다가 왜군이 쏜 조총에 오른쪽 다리를 맞아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되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이 그를 격려하여 말했다.
“장하오, 왼쪽 다리는 부모를 위하여 바치고, 오른쪽 다리는 나라를 위해 바쳤으니 진짜 남아 중의 남아요.”
그후, 그는 이원익(李元翼) 관찰사 휘하로 들어가 왜군과 맞싸워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또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에서 왜군과 싸우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그때 왜군 대장이 그를 보고 말했다.
“그 유명한 조선의 황 장수 아니요?”
“나를 알아주는 것은 고마우나,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떠나주면 더욱 고맙겠다.”
왜장은 그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냥 돌아갔다. 그는 비록 지상에서는 다리기 불편하였지만 마상(馬上)에서는 늠름한 용장이었다. 그러나 그 부상으로 인해 결국 전사를 하게 되자 마지막으로 휘하의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나의 말에 실어주고 ‘네 주인을 고향 강진 땅에 모셔다 드려라!’ 하고 말하면 혼자 알아서 찾아 갈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그의 말은 그를 강진으로 싣고 갔다. 시신을 받은 어머니는 슬픈 중에도 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너는 전장에서는 용감하고, 주인에게는 효성을 다했구나. 참으로 고맙다.”
말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여 먹이를 먹지 아니하고 결국 주인을 뒤따라 죽었다. 주인의 충성에 말도 따랐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志鬼心火(지귀심화)
志:뜻 지, 鬼:귀신 귀, 心:마음 심, 火:불 화.
뜻: 지귀 마음의 불이라는 말로, 신라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던 청년 지귀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지극한 연모의 정을 이른다.
문헌: 고전해학(古典諧謔)
신라의 활리역(活里驛)에 사는 지귀(志鬼)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순진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그가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가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가 마침 행차를 하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을 보게 되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운 모습에 단번에 반해버려 그날부터 불타는 사모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그러한 지귀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여왕만을 보고자 매일같이 여왕이 있는 서라벌에 나와 서성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굶고 지친 지귀가 황룡사 9층탑 아래 누워 있다가 불공을 드리러 나온 여왕과 마주쳤다. 지귀는 미친 듯이 여왕에게로 달려갔으나 군사들이 그를 떼밀었다. 소란이 일자 여왕이 그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여왕 앞에 불려 나온 지귀는 자신의 불꽃같은 연모의 정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의 순수한 마음에 끌린 여왕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여왕이 불공을 드리러 불당 안으로 간 사이, 지친 지귀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불공을 마치고 나온 여왕은 곤히 잠든 그를 깨우기 미안하여 그의 목에 자신의 금목걸이를 걸어주고는 궁궐로 돌아갔다.
얼마 후,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걸이만 있는 것을 보고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지귀의 가슴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간절한 그의 연정이 그만 뜨거운 불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귀의 몸을 태우기 시작한 불길은 마침내 그의 온몸을 사르고 말았다. 그 서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눈물을 흘리며 진혼가(鎭魂歌)를 불러 자기 때문에 불귀의 몸이 된 지귀의 넋을 위로해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至當言也(지당언야)
至:이를지, 當:마땅 당, 言:말씀 언, 也:어조사 야.
뜻: 당연히 옳음 말이란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찬동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호랑이 임금이 측근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이리가 맨 먼저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심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사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도록 했다. 곧 이어서 여우가 달려오고, 살쾡이와 너구리도 그 뒤를 따랐다.
“부르심을 받고 대령하였사옵니다.”
저마다 머리를 조아렸다. 호랑이 임금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제자리에 앉도록 했다.
“짐이 경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던 중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이다. 자고로 백성 중에는 나라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 법이다. 이 숲 속에도 짐에게 불만이 있는 자가 없을 턱이 없다. 그런데 하찮은 불만이 쌓이다 보면 나라의 권좌까지 위태롭게 될 수 있느니라. 그러니 미리 그런 불만분자들을 가려내어 없애버리는 것이 권좌를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에 대해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이리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여우 그대는?”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여우도 공손히 대답했다. 뒤이어 살쾡이와 너구리도 천만번 지당함을 강조하며 황공한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호랑이 임금은 마음이 흐뭇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호랑이 임금이 다시 측근들을 불러들였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또다시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이니라. 며칠 전에 짐은 백성들 중에 불순분자들을 가려 없애 버리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할 경우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들도 생각해 보라. 불만분자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또 새로운 불만분자들이 생겨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또다시 없애야 되고 ……. 그렇게 되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짐은 권좌를 넘보는 불순한 자만 가려 없애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그러자 이리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여우 그대는?”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살쾡이도 너구리도 지당하다고 몇 번씩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짐은 이제 짐의 뜻이 곧 경들의 뜻이요. 경들의 뜻이 곧 짐의 뜻임을 알았도다.”
호랑이 임금은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조용하면 내 무슨 방법으로 허구한 날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단 말인가. 불만분자의 불순한 언동은 짐의 무료함을 달래어 주는 유일한 약이요, 또 그로 인해 짐은 권좌를 지킬 수 있는 궁리를 하느라고 밤낮없이 고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호의호식하고 금은방석 위에서 잠을 자도 체중이 늘지 않고 이처럼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는 곧 그들이 있음으로써 짐이 권좌를 그만큼 길이길이 지탱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아! 짐은 진정 행복한지고!”
그러고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이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여우와 살쾡이와 너구리가 뒤따라서 고개를 조아린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紙掉以孝(지도이효)
紙:종이 지, 掉:버릴 도, 以:써 이, 孝:효도 효.
뜻: 종이를 버림으로써 효도를 한다. 즉 글씨를 연습하느라 많은 종이를 버리는 것은 부모가 원하는 바라는 뜻.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 명필 한석봉(韓石峯.1543~1605)은 본명은 한호(韓濩)이고 석봉은 호이다. 그는 개성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석봉의 어머니는 떡 광주리를 이고 마을마다 다니면서 팔아 끼니를 잇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들의 재질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석봉도 그런 어머니의 정성에 보답키 위하여 열심히 글을 읽고 글씨 연습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글씨 공부에 지장이 없도록 자기는 끼니를 거르더라도 종이와 먹은 모자라지 않게 사다 주었다.
어느 날, 한석봉은 자기한테만 밥을 챙겨 주고 허기진 배를 숭늉으로 때우는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후부터 막대기로 땅바닥이나 모랫바닥에 글씨 쓰기를 연습하면서 종이를 아꼈다.
며칠이 지나도 종이를 사달라고 하지 않는 아들이 이상하여 어머니가 엄한 얼굴로 물었다.
“너 요새 왜 글씨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게냐?”
“아닙니다. 어머님.”
“그러면 어째서 종이가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 게냐?”
한석봉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고생을 안타까워하는 네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너는 이 어미에 대한 참다운 효도(孝道)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구나! 그것은 하루빨리 학문(學問)을 완성하고 명필(名筆)이 되는 것이다. 땅바닥이나 모래 위에 손가락이나 막대기로 연습을 해서 어떻게 글씨가 늘 수 있겠느냐? 너에게 종이와 먹을 사다주는 일은 이 어미에게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어찌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단 말이냐?”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석봉은 다시 붓으로 종이에 정성을 들여서 글씨 연습을 하여 석봉서법(石峯書法)을 독창적으로 확립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후기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필적은 호쾌(豪快)하고 강건(剛健)한 서체를 창시하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석봉은 일찍이 중국의 안진경(顔眞卿)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익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각 체에 모두 뛰어났으며, 중국서체의 모방을 벗어나 조선시대에 제일가는 명필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知恩之孝(지은지효)
知:알지, 恩:은혜 은, 之:갈 지, 孝:효도 효.
뜻: <지은>의 효라는 말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던 신라의 효녀 지은에게서 유래했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면 큰 보상을 받는다는 뜻으로 쓴다.
문헌: 삼국사기 제8
지은(知恩)은 신라의 한기부(韓器部. 신라6부의 하나)사람으로 연권(連權)의 딸인데 성품이 지극히 곱고 효성스러웠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눈먼 홀어머니 밑에서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봉양했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어렵게 생활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곤궁해져 할 수 없이 부잣집의 종이 되기로 하고 쌀 십여 섬을 받았다.
지은은 그 집에 가서 종일토록 일을 해 주고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어 어머니를 모셨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얘야! 지난날에는 반찬은 적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지금은 밥은 비록 좋으나 그 맛이 옛날 같지 않아 간장을 칼로 찌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이냐?”
지은은 어머니를 속일 수 없어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너를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너를 도와주는 것인데…….”
어머니가 소리를 내어 크게 통곡하니, 딸도 또한 부둥켜안고 통곡하여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때 마침 효종랑(孝宗郞)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부모에게 청하여 조 백 섬과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또 지은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몸값을 보상하여 줌으로써 자유인이 되게 해주었다.
효공왕(孝恭王,897년)도 그 말을 듣고 벼 5백 섬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그리고 곡물이 많아지니 도적들이 들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어 당번으로 지키게 하고, 그 마을 이름을 효양방(孝養坊)이라 했다.
지은이가 어머니를 봉양함으로써 이처럼 부까지 얻게 되니 후세인들은 그녀를 기려 지은지효(知恩之孝)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효녀지은(孝女知恩)이라 적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痣以會妻(지이회처)
痣:사마귀 지, 以:써(가지고) 이, 會:만날 회, 妻:아내 처.
뜻: 검은 사마귀로 인하여 부인을 만나다. 어떤 일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 증거를 말한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윤지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결혼하여 첫날밤을 지내고 나니 다음날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이 일어났다. 그는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청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고 노인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옛날 집으로 찾아갔으나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산에 올라가 보니 ‘윤지선지묘’라고 쓴 자기의 묘비명과 함께 새로 만들어진 무덤이 보였다. 괴이하게 생각한 그가 수소문하니 자기 아들이 전라감사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감사가 물었다.
‘어르신네와 부인과의 연세는 얼마나 차이가 났습니까?“
“나와 동갑이었네.”
“어르신네의 세계(世系: 대대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고 싶습니다.”
그는 감사에게 일일이 설명했다. 감사가 들어보니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고하니, 어머니가 윤지선을 안으로 불러 발을 드리우고 물었다.
“아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니 남편이 맞는 것 같기도 하오나 지금 연로하여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믿지 못하겠습니다. 증거 될 만한 무엇이 없습니까?”
그는 한참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있지요. 첫날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의 은밀한 사처(私處: 음문)에 콩알만 한 검은 사마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농담 삼아 여자의 은밀한 곳에 이런 사마귀가 있으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는다고 말했었지요.”
그러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인이 와락 뛰어나와 그를 끌어안아 통곡하며 감사에게 말했다.
“이 분이 너의 아버님 맞구나!”
그 뒤부터 사람들의 어떤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일컬어 지이회처(痣以會妻)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眞僞視次(진위시차)
眞:참 진, 僞:거짓 위, 視:볼 시, 次:버금 차.
뜻: 진실과 거짓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 실제 눈으로 본 사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고사성어속담사전(故事成語俗談辭典)
한 스님이 비탈진 계곡을 따라 걷는데 앞서 가던 여인이 발을 헛디뎌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스님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뛰어들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왔다. 그런데 여인이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잔뜩 들이켠 탓으로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했다.
스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자기가 할 일을 다하지 않는 것은 수도인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인을 눕혀놓고 가슴을 눌러 물을 토하게 하고, 입을 빨며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여인은 ‘푸’하고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같은 절의 스님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스님이 여인을 끌어안고 희롱하다니, 여인의 몸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평소 정진에만 힘쓰는 줄 알았는데 저럴 수가…….’ 하고 분개했다. 그리고 사음계에 빠진 스님은 응당 징계를 받아야 한다며 그길로 달려가 주지 스님에게 고해바쳤다. 때문에 여인을 구해준 스님은 파계승으로 낙인이 찍혀 사문(寺門)에서 쫓겨났다.
스님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붙들고 나는 결백하다고 일일이 변명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스님은 이 일을 통해서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도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진위시차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일을 보는 관점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晋州大捷(진주대첩)
晋:진나라 진, 州:고을 주, 大:큰 대, 捷:이길 첩.
뜻: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크게 싸웠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이른다.
문헌: 남당집(南塘集),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1791년에 판관(判官)에 이어 진주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3천 8백여 병사로 7일간 공방전을 벌여 3만 명의 적군을 살해했으나 그래도 끊임없이 침략해오자 부득이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끝내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진주대첩은 행주대첩(幸州大捷)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진주성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연안에 위치하여, 동쪽은 함안, 진해, 남쪽은 사천, 고성, 북쪽은 의령에 접하고, 서쪽은 단성, 곤양, 하동을 통하여 전라도에 이르는 요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의 왜장 하세가와 도오고로(長谷川藤五郞.장곡천등오랑)는 우도(경상도 서역)로 침입하는 동시에, 수군을 동원하여 전라도 지역 해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에 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창원에서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서니 왜군은 함안까지 쳐들어와 조선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진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때는 임진년 10월 5일이었다.
당시 김시민은 과거 무과에 급제해서 훈련원 판관이었는데 병조판서에게 군사 전략에 관한 건의를 했다가 채택되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진주목사가 전쟁에서 순직하자 그를 대신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도록 지휘하였다. 하여 그 공로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김시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친히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는 등 사기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헌신적인 지휘에 감명을 받은 병사들은 왜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총탄이 우박처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군이 휴식을 취하느라 총소리가 그치자 김시민은 태연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농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자 적은 큰 대나무를 베어다 동북쪽에 누각을 만들고 그 위로 올라가서 조총을 쏘아댔다. 이에 김시민은 불화살을 쏘아 그 누각을 불태워 버렸다.
6일째 되는 밤에 적병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성벽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른 풀에 화약을 싸서 성 밖으로 던지고, 역시 불화살을 쏘아 불을 질러 적의 접근을 막았다. 도 큰 돌을 내리굴리고 끓는 물을 끼얹기도 하니, 적병들은 이에 맞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성 북쪽으로 침범하는 적의 기마대에게도 맹렬히 화살과 돌을 쏘아 저지하니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민은 친히 성루에 올라가 퇴군하는 적병을 향하여 화살을 쏘다가 난데없이 날아온 적의 유탄에 이마를 맞아 달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김시민, 그는 육지의 이순신이라 할 만큼 용감하게 싸워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부하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니,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침내 적군을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임진 10월의 제1차 진주 싸움이다.
해가 바뀌어 계사년(癸巳年)에 또다시 왜군이 쳐들어왔다.
왜군이 패퇴하여 영남의 바닷가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하여 전년의 진주성 싸움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총공세를 감행하여 온 것이다.
그 무렵 명(明)나라는 일본과 화의(和義)를 진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양쪽 모두 안병부전(按兵不戰. 군사를 한자리에 멈추고 싸우지 않음)의 태도를 취했다. 명나라의 장수 유정(劉鋌)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에게 진주성을 재침공하려는 의도를 비난하고,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도 고니시 유카니가(小西行長. 소서행장)에게 그러한 계획을 취소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이때 조선의 군사들은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찰사 권율(權慄) 이하 관병과 의병이 연합하여 함안에 이르렀으나, 내습하는 적군의 규모가 너무 커 대적을 포기하고 호남으로 피해 들어갔다. 그러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나서서 전의를 다졌다.
“진주는 호남의 순치(脣齒)와 같은 땅이다. 진주 없이는 호남이 있을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적을 피하는 것은 적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힘을 다하여 적군을 막도록 하자.”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안 사람들 중에 더러는 도망치는 자가 생겼다. 이에 김천일은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먼저 입성해 있었다.
성내의 군사를 파악해보니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백성들은 6~7만 명에 달하였다. 후속 지원군으로 의병장 강희열(姜熙悅), 이잠(李潛) 등이 이어서 합세하였다.
그런데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겁이 많고 병법에 밝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작전에서 김천일과 손발이 서로 맞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니 진주성은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김천일은 부대를 나누어 구역별로 성을 지키게 하고, 황진, 이종인, 장윤 등에게는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처럼 지휘 체계가 안정되니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죽기를 맹세하며 전의를 다졌다.
6월 스무날, 왜군의 선봉이 성 경계에 이르자 오유, 이잠 등이 적군 몇 놈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니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튿날, 적군 약 5만 명이 성을 에워싸고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비 오듯 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황진을 중심으로 군관민들이 하나로 뭉쳐 결사 항거했으나 엎친데 겹치는 격으로 연일 폭우가 쏟아져 성 한 모퉁이가 무너졌다. 적들은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해왔고, 이에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이 싸워 보았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어서 적이 성의 동서쪽에 높은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목책을 세워 총을 쏘니 황진 등이 이에 불화살을 쏘아 불살랐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강희보(姜希輔)가 전사했다. 적은 또 판 모양의 큰 궤를 만들어 쇠가죽으로 여러 겹 싸서 사륜거 위에 놓고 갑옷을 입은 자가 그것을 끌고 성으로 기어올라 공격해오자 황진이 기름을 붓고 역시 불화살을 쏘아 태워 버렸다.
그 뒤 적이 몰래 성에 구멍을 뚫으려 했으나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니 적병의 죽은 자가 천여 명이나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황진이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당하자 장윤이 대신 나섰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29일,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목사 서예원은 도망하고, 군사는 흩어졌다. 김천일은 고종후, 양산주, 최경회 등과 남강(南江)에 투신하고, 이종인, 깅희열, 이잠 등은 적진에 돌격,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또 선내에 남아 있던 백성들도 모두 학살을 당하니 그 수가 무려 6만 명에 달했다.
이 싸움은 비록 패퇴하기는 했으나 임진왜란 중 최대의 격전이자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발휘한 빛나는 싸움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촉석루에 올라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그때 기생 논개(論介)는 적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毛谷村大助.모곡촌대조)를 유인해 갑자기 껴안고 남강 강물에 뛰어들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적장을 죽게 한 것이다. 지금도 촉석루 옆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鎭火救主(진화구주)
鎭:누를 진, 火:불 화, 救:구할 구, 主:주인 주.
뜻: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하다. 전북 임실의 의로운 개에게서 유래한 말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해결함을 비유하여 쓴다.
문헌: 한국문화상징사전(韓國文化象徵辭典)
개(犬.견)는 예부터 집을 지키고, 사냥, 맹인 안내, 호신 등의 역할을 해왔다. 또 요귀나 도깨비를 물리치는 능력도 있고, 상서(祥瑞)로운 일도 있게 하고, 재난을 예방해주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황구(黃狗)는 풍년과 다산을 상징하고, 초가잡과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그 고기는 허약한 사람에게 보신(補身)의 효과가 있다고 여겨 죽어서까지 주인을 위해 헌신하는 귀한 동물로 여겨왔다. 견공(犬公)이라는 말은 개를 인간 세계에 대입하여 의인화해서 부르는 말이다.
개는 신화나 전설에도 종종 등장한다.
서양의 일식과 월식에 대한 신화에서 까막나라 왕이 불개에게 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불개는 하늘로 달려가 해를 물었지만 너무 뜨거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그냥 돌아온 개를 책망하면서 다시 달을 물어 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 달을 물었으나 달은 너무 차가워서 역시 실패하였다.
일식과 월식이 생기는 것은 불개가 해와 달을 무는 현상이라고 믿었다.
우리나라 토종개로는 삽살개와 진돗개, 풍산개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다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를 뿐만 아니라 적을 만나면 용맹스럽게 싸운다. 그중에 삽살개는 귀신을 쫓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름도 ‘살기를 찔러 쫓는 개’, 즉 꽂는다는 삽(揷)자와 해친다는 살(煞)자를 써서 삽살개라 했다.
삽살개 중에는 검정 삽살개와 청삽살개, 황삽살개 등이 있는데 민화에 나오는 삽살개는 대부분 청삽살개다.
충성심을 보여주는 개로는 전북(全北) 임실군(任實郡)의 의견(義犬)이 유명하다.
임실군 둔남면의 오수리 마을에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웃마을 잔칫집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만취한 탓으로 둑에 누워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피우던 담뱃불이 떨어져 풀밭에 불이 붙어 불길이 번져 갔다. 이를 본 개가 맹렬히 짖어댔지만 곯아떨어진 주인은 인사불성이었다.
불길이 거세지자 개는 개울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적셔다가 주인의 주변 풀에 물기가 베게 하기를 거듭했다.
주인이 새벽녘에 한기를 느끼고 깨어 보니 풀밭이 모두 까맣게 탔는데 자기가 누운 주변만 타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자기가 기르던 개가 온몸이 젖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개달은 김씨는 개의 충정에 감동하여 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주변의 나무를 베어다가 충성된 개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심은 나무에 뿌리가 돋고, 가지가 뻗어 큰 나무로 자랐다. 그후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개의 나무라는 뜻으로 개 오(獒), 나무 수(樹), 즉 ‘오수’라고 했고, 마을 이름도 오수리라 불렀다.
개는 인간과 오랜 세월을 함께 생활해 오는 동안 정이 들어 인간과 거의 동일시되어 왔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일러 ‘우리 강아지!’하고 부르는 애칭도 생겨났다.
설화에 나타나 있는 이른바 ‘의견(義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사한 이야기가 25개 정도 된다.
위의 경우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으로 그만큼 지능(知能)이 있다는 것이고, 주인을 위해 희생했으니 인(仁)과 덕(德)이 있다는 말이며, 물을 묻혀 불 속에 뛰어들었으니 용(勇)과 체(體)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밖에도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한 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 이야기, 주인이 억울하게 죽자 관청에 가 짖어서 알려 범인을 잡게 한 폐관보주형(吠官報主型) 이야기, 주인 없는 사이에 아이에게 젖을 먹여 구한 수유구아형(授乳救兒型) 이야기, 눈먼 주인에게 길을 인도한 맹인인도형(盲人引導型) 이야기 등 전해지는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眞孝之道(진효지도)
眞:참 진, 孝:효도 효, 之:어조사 지, 道:길 도.
뜻: 참된 효도의 길이라는 말로, 서포 김만중에게서 유래했으며 진실되고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문헌: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북간집(北幹集)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때 대사헌을 지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평소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곤 했다. 그의 소신대로 전문을 한글로 지은 <구운몽>으로 김만중은 당시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김만중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익겸(金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청나라 태종 누르하치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사태가 위급해진 인조는 연약한 아녀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도 뒤따르려 했다. 그런데 불과 보름도 안 되어 청군이 들이닥치자 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왕명을 받들어 먼저 강화도에 가 있었는데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문 위 화약고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그런 와중에 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임신한 몸으로 어린 아들 만기(萬基)를 데리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37년에 만중이 태어났다.
만중의 어머니는 증조부가 영의정을 지냈고, 조부는 선조의 부마(사위)였다.
만기와 만중의 어렸을 때 스승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소학(小學)>을 손수 베껴 아들들을 가르쳤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니 살림살이도 직접 꾸러나가야 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베틀에 매달려 명주를 짜 그것을 내다 팔아 근근이 자식들을 키웠다.
어느 날, 소년 만중의 집에 한 도부(到付)장수가 찾아왔다. 도부장수란 물건을 짊어지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을 이른다.
제법 글을 익힌 만중은 그 장수가 가져온 책 중에 중국의 <춘추(春秋)>라는 책을 해설한 <좌씨집선(左氏輯選)>이 탐이 났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베를 짜 어렵게 살아가는 형편에 그런 비싼 책을 사달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만중은 그 책을 몇 장 들추어보다 말고 어차피 못 살 것이라고 단념하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좌씨집선>이라고 해서 대단한 책인 줄 알았더니 별것 아니네.”
그런 만중을 눈여겨보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뭐가 별것 아니라는 거냐?”
“사람들이 좌씨집선, 좌씨집선 하기에 대단한 책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별것 아니네요.”
그러자 만중의 어머니가 엄숙하게 말했다.
“네 어찌 그 귀한 책을 하찮게 여기느냐? 내가 그토록 지성으로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껏 귀중한 것과 하찮은 것을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러자 눈치 빠른 도부 장수가 책을 팔 욕심으로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마님, 도련님이 말은 그렇게 해도 눈빛은 몹시 탐을 내는 기색입니다. 사 주시지요.”
“아니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 헛말을 했다는 거 아니냐?”
하고 만중을 나무라고는 도부장수에게 말했다.
“그 책 아이에게 주시오.”
“값만 맞는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좀 귀한 거라 무명 반 필 값은 주셔야 됩니다.”
윤씨는 베틀로 가더니 짜고 있던 베의 반 필을 싹둑 잘라 도부장수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도부 장수가 돌아가자 회초리를 들고 만중을 불렀다.
“어서 종아리를 걷어라. 이 어미의 낙이 너희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구하기 힘들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만중은 베틀 하나로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갖고 싶은 책을 보고도 딴 말을 한 자신의 속마음을 몰라주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머니, 실은…….”
“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러나 이 어미는 비록 끼니를 굶더라도 네 형제가 읽어야 할 책은 다 사줄 것이다. 그러니 어미의 고생을 덜어준다는 좁은 소견으로 마음에 없는 허튼 말을 하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싶습니다. 꼭 사주십시오.’ 하는 게 효도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라.”
만중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는 내 마음을 다 읽고 계셨구나. 그러니까 작은 효성보다는 내가 넓은 길로 가는 것을 바라고 계셨던 거야.’라고 생각했다.
만중은 회초리를 드신 어머니의 눈에 물기가 배어있는 것을 보고 끝내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만중은 주야로 일하느라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고 우스갯소리와 우스갯짓을 했다. 윤씨는 웬만해서 웃음을 보이는 법이 없었지만 만중이 그럴 때만큼은 숨김없이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만중은 숙종 15년인 1689년, 송시열과 함께 세자(경종.景宗) 책봉이 시기상조라고 반대를 했다가 송시열은 죽음을 당하고, 그는 남해의 외딴섬에 귀양 보내져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의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을 말한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어머니께 바치기 위해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病死)하였다. <구운몽>은 이전의 소설과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고대소설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신라의 설총(薛聰)과 고려의 승려 균여(均如), 조선의 허균(許筠) 그리고 김만중 네 사람은 대중 소설의 선각자로 역사 속에 우뚝 서 있다.
숙종 24년인 1698년 관직을 복직시키고, 효행에 대한 정문(旌門)도 세워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