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 21 [拖錦之端(타금지단) ~ 必隨師言(필수사언)]

efootprint 2022. 9. 22. 14:03

 

拖錦之端(타금지단)
拖:끝 타, 錦:비단 금, 之:어조사 지, 端:끝 단.
뜻: 비단의 끝머리를 끌다. 즉 일의 중요한 요점을 파악하여 전체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문헌: 매월당집(梅月堂集),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제6대 단종(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본관이 강릉이고, 시호는 청간(請簡)이다. 그는 재주가 출중하여 세 살 때 시(詩)를 짓고, 다섯 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들었다. 세종(世宗)은 그가 정말 소문처럼 총명한지 궁금하여 직접 어전으로 불러 여러 가지를 물어 보기도 하고, 글을 짓게도 해 본 결과 과연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세종은 대단히 기뻐하며 상으로 비단 5필을 주면서 물었다.
  “이 비단을 너 혼자서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예, 그리 할 수 있습니다.”
  어린 김시습은 서슴없이 대답하고 나서 비단을 모두 푼 다음 끝과 끝을 연결하여 잡아 묶었다. 그러고는 한쪽 끝을 잡고 밖으로 나가니 나머지 비단이 줄줄 딸려 갔다.
  세종은 감탄했다.
  저것이 어찌 어린아이의 지혜란 말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태워 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방랑길을 떠났다. 그 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불경언해사업에 관여하게 되어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그는 글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김시습이 세 살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무우뇌성하처동(無雨雷聲何處動)  비는 아니 오는데 어디서 천둥소리가 나는가?
      황운편편사방분(黃雲片片四方分)  누런 구름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도다.

 

  그는 47세에 환속하여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으며 불교와 유교를 아우르는 사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또 어렸을 적 궁중에 불려 갔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시로 읊기도 했다.


      소소추금전(少小趨金殿)  어린 아이가 궁궐에 불려 갔을 때
      영릉사금포(英陵賜錦袍)  세종 임금은 비단을 내리셨네.
      지신평상슬(知神呯上膝)  지진사가 무릎에 올려놓고
      중사권휘호(中使勸揮毫)  지필묵을 내놓고 시를 쓰라 했네.
      경도진영물(競道眞英物)  글을 보고 이르길 영특한지고 하시며
      쟁첨출봉모(爭瞻出鳳毛)  뛰어난 글재주꾼 났다고 좋아하셨네.
      언지가사체(焉知家事替)  어찌 알았으랴. 집안이 기울면서
      영락노봉고(零落老蓬篙)  굴러떨어져 쑥밭에서 늙을 줄이야.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打是之愛(타시지애)
打;때릴 타, 是:옳을 시, 之:어조사 지, 愛:사랑 애.
 뜻: 매 끝의 사랑, 또는 매 끝에 정든다는 말로, 귀하고 아끼는 사람일수록 엄정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초의 영의정 황희(黃喜.1363~1452)는 병조판서 김종서(金宗瑞.1390~1453)가 사소한 잘못만 저질러도 매우 심하게 꾸짖었다.
  김종서가 야인(野人)들을 무찌르고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하루는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이 방약무인격으로 거만하게 보였다. 그러자 황희가 하인을 불러 말했다.
  “저 병판대감 의자 다리 하나가 짧은 듯하니 나무토막을 가져다가 괴어 드려라.”
  종서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느 날, 대신 회의가 늦어져 밤이 깊어 가자 김종서가 약간의 다과를 준비해 대신들에게 대접했다. 그러자 황희는 대신의 채신으로 아부한다 하여 호되게 꾸짖었다. 그는 김종서의 조그마한 잘못에도 핀잔을 주고 심지어는 매질까지 하였다.
  옆에서 보다가 민망해진 맹사성(孟思誠.1359~1438)이 황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김종서는 유능한 사람인데, 대감께서는 어째서 그리도 심하게 닦달하시오?”
  “아, 예! 그것은 그를 귀하게 쓰기 위함입니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다음에 우리의 뒤를 이을 재목입니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고 기개가 예리해서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를 꺾어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려는 것이지, 그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맹사성은 환희의 높은 뜻을 헤아리고는 탄복했다.
  황희는 늙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갈 때 김종서를 높이 쓰도록 왕에게 천거하고, 그에게 나라의 후사를 부탁하니, 김종서는 비로소 노대신(老大臣)이 자기를 각별히 생각했음을 깨닫고는 감격해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彈琴舞鶴(탄금무학)
彈:퉁길 탄, 琴:거문고 금, 舞:춤출 무, 鶴:학 학.
뜻: 거문고를 연주하니 학이 춤을 추다. 즉 어떤 한 가지 일을 잘하면 다른 일도 절로 이루어진다는 뜻.
문헌: 한국인물대사전(韓國人物大辭典),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742~765)은 효성왕(孝成王)의 아우였는데,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즉위 13년 4월, 서라벌에 달걀 크기만 한 우박이 떨어져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많은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다.
  그때 웅천주(熊川州)의 향덕(向德)도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게 되자 고기를 먹고자 하는 아버지께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내어 봉양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후한 상과 함께 그 효행을 표창했다.
  경덕왕 22년(763년)에는 서라벌에 기왓장이 날아가는 큰 바람이 불었다.
  대나마(大奈麻) 이순(李純)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는데 홀연히 중이 되어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왕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단속사(斷俗寺)를 세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이순은 궁으로 왕을 찾아와서 말했다.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음탕한 음악만을 즐기느라 정사를 잘못 이끌어 패망하였습니다. 이는 마땅히 뒷사람이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대왕께옵서도 음악을 그치시고 선정을 베푸소서.”
  왕은 그의 말을 듣고 감탄하여 음악을 중지하고, 그를 궁전으로 불러들여 왕도(王道)의 묘리(妙理)와 치세(治世)의 방법을 들었다.
  그리고 옥보고(玉寶高)를 불러 음악을 우아하고 건전한 음악만으로 새롭게 정비하게 하였다.
  옥보고는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5) 때 거문고의 대가였다. 그의 아버지 공영(恭永)은 사찬(沙湌)의 벼슬을 지냈으며,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간이나 금법(琴法), 즉 거문고 타는 것을 배운 다음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다.
  그는 거문고의 달인이어서 그가 거문고를 타면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소리에 날아가던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금오산(金烏山)에 금송정(琴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脫帽直諫(탈모직간)
脫:벗을 탈, 帽:모자 모, 直:바를 직, 諫:간할 간.
 뜻: 각을 벗고 바른 말을 하다. 즉 관직을 그만 둘 각오를 하고 윗사람에게 바른 말을 고한다는 뜻.
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조선 개국공신이요, 우정승이었던 명외교관 노한(盧閈. 1376~1443)은 호가 효사당(孝思堂)이다. 그는 태종(太宗)의 외삼촌인 국구(國舅) 민제(閔霽)가 사위로 택할 만큼 지모가 뛰어났다. 열여섯 살 때부터 벼슬길에 올라 관운도 좋았다.
  세종 때, 염문사(廉問使)로 남도의 민정을 살피고 온 그가 세종에게 전선(戰船)을 만드느라 피폐해진 군사들의 실태를 복명하였다.
  세종이 그에게 물었다.
  “진시황이나 수양제의 포학한 것에 비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고?”
  세종이 좀 과장해서 물었는데 그는 죽을 각오로 아예 갓까지 벗어 놓고서 그들보다 더 심하다고 불평하더라고 들은 대로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옆에서 듣는 이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노한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도 덧붙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진시황과 수양제가 배를 만들도록 한 일이 있긴 하나,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 그를 살펴보게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나이다.”
  세종은 부드럽게 말했다.
  “갓을 써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세종은 노한의 용기를 높이 샀다.
  노한은 부인 민씨의 동생 민무구(閔無咎) 형제 사건에 연좌되어 14년간이나 파직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세종의 태상왕, 즉 태종(太宗)으로부터 무죄를 입증받아 한성부윤으로 복관되었다.
  그는 대쪽같은 성품으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까지 오직 나라를 위해 바친 충직한 신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太師知夢(태사지몽)
太:클 태, 師:스승 사, 知:알 지, 夢:꿈 몽.
뜻: 큰 스승 <지몽(知夢)>이라는 말로, 고려 초기 별을 보고 점을 쳐서 왕들의 총애를 받았던 최지몽을 가리키

     는 말이다. 어떠한 일에 정통한 사람을 비유하여 쓴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전라도 영암(靈巖) 태생 최총진(崔聰進.907~987)은 어려서부터 밤마다 별을 쳐다보고 혼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별에 홀렸다는 둥, 혹은 미쳤다는 둥 수군댔다. 그러나 그는 낮에는 서당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님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는 커감에 따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했고, 어려운 주역(周易)도 줄줄 외웠다. 게다가 점술(占術)에도 능해 그의 예언은 백발백중이었다.
  어느 날, 삼한(三韓)을 통합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있던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해몽을 잘하는 사람을 찾던 중 전라도에 별을 보고 꿈을 해몽하는 점성술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바로 최총진이었다.
  “사흘 안으로 그를 불러오너라.”
  왕명을 받은 사자가 가마를 달려 그의 집에 당도하니 며칠 전에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 시각, 최총진은 이미 송도에 도착해서 대궐의 수문장에게 급히 왕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저는 전라도 영암에 사는 최총진이라는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꿈을 꾸시고 그 해몽을 기다리신다는 점괘가 나와 이렇게 급히 왔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너라.”
  “아닙니다. 오늘 밤 안으로 뵈어야 합니다. 지금 저를 그냥 되돌려 보내신다면 나리께서는 틀림없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뭐? 그럼, 기다려 봐라.”
  잠시 후 황급히 돌아온 수문장은 최총진을 공손히 맞아들였다.
  “아까는 결례했습니다. 도령께서 너무 어려 보이는지라…….”
  그는 곧바로 왕 앞으로 안내되었다.
  “허어, 네가 점을 잘 친다는 그 최모(崔某)냐?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느냐?”
  “네, 사흘 전에 별을 보고 폐하께서 부르실 것을 알았습니다.”
  “오, 그래? 먼 길을 이렇게 빨리 와 주어서 고맙구나. 꿈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하도 흉한 꿈같아서 궁금하구나. 내가 어떤 산중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도중에 나도 모르게이 대궐보다 큰 벌집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깜짝 놀라 깼는데……. 내가 벌집을 쑤셨으니 무슨 난이라도 있을 흉조가 아닌지 걱정이로다.”
  “폐하! 천하제일로 대길할 징조입니다.”
  “어떤 뜻에서 대길인지, 해몽을 해보아라.”
  “보통 사람이 벌집을 뒤집어쓰면 흉몽입니다만 폐하께서는 왕(王)씨이시고 또 실제로 왕이십니다. 그런 왕께서 벌집에 들어가셨으니 벌들이 놀라서도 왕! 감격해서도 왕! 하고 일시에 날지 않겠습니까, 즉 왕중왕(王中王)의 꿈이오니 머지않아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게 되실 것입니다.”
  왕건은 그 말을 듣고는 손빽을 치며 기뻐했다.
  “너는 해몽이 그리 명쾌하니 오늘부터는 이름을 지몽(知夢)이라고 고쳐라.”
  “네 황공하옵니다.”
  이래서 최총진은 지몽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그 뒤로 왕은 최지몽을 항상 측근에 두고 총애했다.
  후에 그의 해몽대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해서 명실공히 왕중왕이 되자. 최지몽에게는 금중고문(禁中顧問)이라는 지위가 내려졌다.
  그리고 왕건에 이어 혜종(惠宗) 때는 사천관(司天官)으로 있으면서 천기를 보아 왕의 위험을 알렸으며, 정종(定宗) 때에는 밀주사기(密奏事機)로 승진되어 왕실을 지켰다. 그리고 경종(景宗) 5년에는 반란의 징조를 예언했다.
  “객성(客星)이 제좌성(帝座星)을 범했습니다. 이는 옥좌를 탐하는 자가 있다는 징조이오니 경계를 엄중히 하여 혼란을 예방하옵소서.”
  얼마 후 과연 왕승(王承) 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사전에 예견하고 있었던 터라 곧 진압할 수 있었다.
  왕은 그 공을 치하하여 어의(御衣)와 금대(金帶)를 하사했고, 그 후 성종(成宗) 2년에는 좌집정(左執政), 치리공신(致理功臣)이 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부터 여러 왕에게 별점으로 봉사하여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른 최지몽은 부모가 팔십 노경이라 부모에게 봉양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직원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조정 출근은 면제할 테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최고 의정기관)에서 자유롭게 일하시오.”
  그런데 성종6년에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지몽이 죽으면 별을 잃게 되는 셈이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왕은 이렇게 탄식하며 시의(侍醫)를 보내서 돌보아 주게 하고, 말 두 필을 내렸다. 그리고 도 귀법사(歸法寺)와 해안사(海岸寺) 두 절에서 스님 2천 명으로 하여금 수복을 비는 성대한 제(祭)도 올려 주었다.
  그 후 최지몽이 세상을 뜨자 관직을 태사(太師)로 높이고, 성종묘정(星宗廟庭)에 신주를 모시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太子馬跡(태자마적)
太:클 태, 子:아들 자, 馬:말 마, 跡:자취 적.
뜻: 태자의 말 발자국이라는 말로, 백제의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가 쳐들어오자 그를 맞아 싸워 승

     리를 거둔 표시로 돌 위에 자국을 남긴 데서 유래했다. 성공한 사람의 흔적을 비유해서 쓴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제13대 근구수왕(近仇首王.?~384)은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맏아들이었다. 그가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에 근초고왕은 태자를 내보내 막도록 했다.
  태자는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싸울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본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실수로 왕의 말 발굽에 상처를 내게 되자 처벌을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쳤던 사기(斯紀)라는 자가 찾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그들의 군사는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이고 날랜 군사는 오직 붉은 기를 들고 있는 군사들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그들만 격파하면 나머지 무리는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궤멸될 것입니다.”
  태자는 그 말을 좇아 크게 격파하고, 달아나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수고성(水谷城)의 평산(平山)에까지 이르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했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한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소득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십니까?”
  태자는 그의 말이 옳다 하여 타고 가던 말을 세우고 그곳에 돌을 쌓아 전승을 표시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이후에 또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암석이 지천으로 깔린 그곳은 누가 쉽게 넘볼 수 없는 곳으로 지금도 말발굽과 같은 흠이 여기저기 있는데 이 발자국이 태자의 말 발자국이라고 전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兎之肝計(토지간계)
兎:토끼 토, 之:어조사 지, 肝:간 간. 計:꾀할 계.
어의: 토끼 간의 계략. 즉 위기에 빠졌을 때 그럴듯한 계교로 모면하는 것을 뜻한다.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604~661)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간(沙干)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를 염탐하고자 갔을 때의 일이었다. 김춘추는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품석(品釋)이 죽자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에 복수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갔다.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그 고을의 사간(沙干) 두사지(豆斯支)가 선뜻 청포(靑布) 삼백 보(步)를 기증했다. 김춘추는 고맙게 생각하여 그에 걸맞은 사례를 하고 고구려로 갔다.
  고구려의 왕은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으로 하여금 그를 맞아들이게 하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했다. 그때 고구려의 한 신하가 왕에게 은밀하게 아뢰었다.
  “지금 신라의 사자는 우리나라의 형세를 염탐하러 온 것 같으니 그를 죽여 후환이 없도록 하소서.”
  그 말을 들은 왕은 엉뚱한 질문으로 김춘추를 시험했다.
  “지금 신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마목현(痲木峴)은 죽령(竹嶺)과 함께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었다. 만약 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
  이에 춘추가 정중히 대답했다.
  “하오나 나라의 땅은 한낱 신하인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명령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앞서 두사지가 준 청포를 비밀리에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선사하니, 그가 성찬을 마련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선도해는 술이 취하자 김춘추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대는 일찍이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병이 들어 앓아 눕자 의원의 말이 토끼의 간을 약으로 써야만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했소. 그런데 바다 가운데는 토끼가 없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는데, 한 거북이 용왕에게 아뢰었소.
  ‘제가 능히 토끼의 간을 구해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육지로 올라가서 토끼를 만나 말했소.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는데 샘물이 맑고, 숲도 무성하며, 좋은 과실도 많이 열리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매나 독수리와 같은 것들도 침범할 수 없는 낙원이다. 때문에 그곳으로 가면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거북의 꾀에 넘어간 토끼가 거북의 등을 타고 바다 가운데로 가니 그제야 거북이 말했소.
  ‘미안하다. 사실은 지금 용왕의 따님이 병이 들어 앓고 있는데 꼭 너의 간을 먹어야만 낫는다고 해서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하니, 토끼가 큰 낭패라는 듯 말했소.
  ‘아차! 그러면 진즉 이야기하지……, 나는 신명의 후예이어서 평상시에는 오장을 꺼내어 공기가 맑고 청량한 바위 밑에 놓아두는 데 오늘은 네 말을 듣고 급히 오느라 그만 간을 그대로 두고 왔구나. 누가 가져가기 전에 빨리 다시 가서 가져와야겠다. 그러니 나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다 주려무나.’
  거북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다시 토끼를 태우고 육지로 돌아오니, 토끼는 풀숲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말했소.
  ‘참으로 어리석은 거북아, 간 없이 사는 놈이 어디 있느냐?’
  하니, 거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이오. 어떻소? 재미있지 않소?”
  김춘추는 그 비유의 뜻을 깨닫고 고구려왕에게 말했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대국의 당이므로 신이 귀국하면 우리 임금에게 고하여 꼭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렇게 하라고 김춘추를 방면해 주었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당나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어 내어 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判眞成婚(판진성혼)
判:판단할 판. 眞:참 진, 成:이룰 성, 婚:혼인할 혼.
어의; 진실을 밝혀 혼사를 이루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진실을 밝히면 바라는 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 제22대 영조(英祖) 때의 문신 박문수(朴文秀.1691~1756)가 어사였던 시절,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쉬어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무시고 가시는 것은 상관없으나 밥을 지어 드릴 양식이 없어서…….”
  주인이 미안해하며 말하자 박 어사가 말했다.
  “밥은 걱정 마시고 그저 잠자리만 부탁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점심도 굶었던 터라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눈여겨본 그 집 딸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손님이 무척 시장해 보입니다. 아버지 제사에 쓰기로 한 웁쌀(잡곡밥을 지을 때 그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살)로라도 밥을 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그렇게 해서 밥을 먹게 되니 박어사는 그 달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인물도 예쁜데다 마음씨까지 곱고, 훌륭한 규수로구나.’
  그때 그 댁 아들이 밖에 나갔다가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디 잔칫집에 갔다 온 모양이었다.
  “어머니, 손님이 오셨습니까?”
  “응, 그래. 지금 윗방에 계신다. 웁쌀로 밥을 좀 지어 드렸다만 요기가 되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그럼 잔치 음식을 많이 가져왔으니 좀 갖다 드리겠습니다.”
  박어사는 출출하던 참이라 그 아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면서 어느 집 잔치에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비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던 규수의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저희 아버지와 내일 혼례식을 치를 최 진사 어른과는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하고 그 규수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두 분은 각각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고, 모두 아들이거나 딸이면 의형제를 맺어 주기로 굳게 약속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저는 아들이요, 그 진사 댁은 딸을 보았는지라, 일찍이 약속했던 대로 우리는 정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우리 집의 가세가 기울자 최 진사 댁에서는 약속을 깨고 딸을 부잣집 아들과 혼인시키기로 하였답니다. 바로 그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허허! 아무리 염량세태(炎凉世態)라 하지만 그렇게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되지. 내가 해결해 줌세. 자네는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게!”
  다음날 새벽. 그 고을 원님은 이상한 밀서 한 통을 받았다.
  ‘오늘 낮 사시(巳時.오전9시~11시)에 남녀 혼인 예복 각각 1벌씩을 챙겨 최 진사 집으로 가서 후행을 왔다고 하면서 나와 신랑을 찾으시오. 암행어사 박문수 백.’
  영문을 모르는 원님은 밀서의 지시대로 이방에게 혼례복을 준비케 하여 최 진사 집에 나타났다. 그러자 최 진사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혼인식은 오시(午時:오전11시~오후 1시)인데 엉뚱하게 원님이 후행을 왔노라면서 이른 시각에 나타났으니 당황할 수밖에.
  원님이 최 진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어사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아니, 어사라니요? 그런 분이 여기에 올 턱이 있나요?”
  그때 박문수가 약혼을 파혼당한 그 총각과 함께 나타났다.
  “어흠! 날세. 내가 그 박 어사구먼.”
  순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님이 물었다.
  “어사님. 신랑은 어디 있습니까?”
  “음, 이 청년일세. 우리 형님이 살아계실 때 이 집 딸과 정혼한 사이였는데 형님이 작고하셨다고 해서 내 조카가 파혼당하는 비감한 일이 발생했으니 삼촌 된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자 조카는 어서 원님이 마련하여 온 신랑 예복을 입고 대례청에 나서거라. 최 진사도 이 혼사를 거부하지 못하리라!”
  최 진사는 사색이 되어서 말하였다.
  “저 저. 그렇다면 오시에 올 신랑은 어찌 됩니까?”
  “사시는 사시고, 오시는 오시오. 일에는 선후가 있으니까 이 혼사 먼저 치르시오.”
  “아무리 어사이셔도 이것은 너무하십니다. 대사가 엄연히 정해져있는데…….”
  “무슨 소리! 분명 우리 형님과의 약속이 먼저 아니었소?”
  “그야 그렇습니다만, 허허허, 이 일을 어찌할까나?”
  최 진사가 당황하여 쩔쩔매는데 진짜 신랑이 들이닥쳤다. 늦게 온 신랑은 난데없는 사람이 나타나서 먼저 식을 올리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그러자 박어사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늦게 온 신랑에게 말했다.
  “혼행()을 와서 이 지경을 당하니 얼마나 놀랐는가? 그러나 지금 말한 대로 사정이 이러하니 신랑 자네는 다른 양반집 규수에게 장가들면 되지 않겠는가? 마침 오늘 혼인하는 조카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네. 내 이 일에 대비해서 미리 데리고 왔지. 여봐라! 조카딸도 나오너라. 그리고 원님은 준비해 온 신부 옷을 내주시오.”
  원님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신랑 옷에다 신부 옷까지 마련하라고 하여서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 젊은이 둘을 혼사시키는 일에 나도 한몫을 하니 혼쾌하오이다.”
  어사 박문수는 이렇게 즉석 매파 노릇도 서슴지 않을 만큼 호탕한 인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八王之恨(팔왕지한)
八:여덟 팔, 王:임금 왕, 之;어조사 지, 恨:한할 한.
어의: <팔왕>의 한이라는 말로, 동학란을 일으켰던 전봉준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데서 유래했다. 큰 뜻을 품었으나 타인에 의하여 그 듯을 이루지 못했을 대 그를 안타까워하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봉준(全琫準.1855~1895)은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지도자로 전북 고창(高敞) 덕정(德井)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가 녹두알처럼 작고, 눈은 둥글며, 다부진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나라 안에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좋지 않은 현상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낫다.
  고종(高宗) 26년인 1889년에는 삼남지방에 대흉년이 들고, 경기도 지방에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또 함경도에서는 민란이 터졌으며, 함경도 고산, 영흥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은 흉년이라는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번졌다. 그 불길은 그해 10월 전라도 전주와 광양에 까지 번져 온나라가 술렁거렸다. 1890년에는 경상도 함창, 강원도 고성, 경상도 예천 등지로 고리를 물고 번져 갔다.
  그런 와중에 전라도에서는 이상한 내용의 민요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여기에서 파랑새는 팔왕새, 즉 팔왕(八王)은 전(全)자를 풀어 놓은 것이니, 녹두장군 전봉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이 민란의 주모자로 잡혀 처형된 뒤부터 사회개혁에 뜻을 품었다. 그래서 30세 무렵에 동학(東學)에 입문, 고부(古阜) 접주(接主)로 임명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은밀히 동지를 규합했다.
  한편 1890년에 세상을 떠난 대왕대비 조씨(趙氏)의 친척이 되는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농민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뱃속만 채우느라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 재산을 갈취했다.
  그는 태안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우겠다며 농민들로부터 1천 냥을 거두어들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이 핑계 저 핑계로 700섬의 세금을 징수했다.
  이러한 횡포에 농민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상부에 진정을 했으나 조병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속 시원히 때려 부수고 죽읍시다.”
  고부읍 북쪽 동진강 상류에 만석보(萬石洑)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 농민들 치고 이 저수지의 신세를 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조병갑은 만석보 밑에 다시 보를 축조하면서 불법으로 수세를 700섬이나 징수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1894년 1월 관아를 습격하여 곡식을 강탈,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만석보의 둑을 헐어버렸다. 이렇게 민심이 악화되자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조병갑 등 관리들을 처벌하고, 그동안의 일은 불문에 붙인다는 확약을 함으로써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새로 온 군수가 약속을 어기고 민란의 책임을 물어 동학교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등 다시 탄압이 심해지자 격분한 전봉준은 곤봉과 죽창, 그리고 무기 창고에서 탈취한 창과 총을 가지고 항거하였다.
  전봉준은 마침내 조직적인 대항을 하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백산에 집결시켰다. 태인(泰仁), 금구(金溝), 부안(扶安), 무장(茂長)에서 김개남(金開男), 손화중(孫化中) 등이 동학군을 이끌고 속속 모여들었다.
  어느덧 군사는 8천으로 늘고, 혁명의 불길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활활 타올라 정읍(井邑), 고창(高敞)을 거쳐 영광(靈光), 함평(咸平)에 까지 번져 나갔다.
  조정에서는 장위영(壯衛營)의 영관(領官)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관군 8백 명과 대포 2문, 기관포 2문을 주어 동학군을 토벌하라고 했으나 도교산 황토마루 싸움에서 동학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홍계훈은 전주성으로 도망을 갔으나 그곳은 이미 동학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자 고종(高宗)은 직접 나서서 전봉준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스스로 무기를 거두고 해산하면 일체의 죄를 묻지 않겠노라.”
  전봉준은 동학군을 설득하여 모두 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한 지 10일 만의 일이었다.
  동학군은 겨우 해산시켰으나 민심을 잃은 조정에서는 동학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제대로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執綱所)라는 임시 행정기관을 설치, 전주에 총본부를 두어 전봉준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리 되니 전라도, 충청도는 동학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동학운동은 신분 제도에 반대하고, 평등을 내세운 사회 개혁 운동이었기 때문에 쉽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일본은 일본대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에서 침략행위를 계속하자 동학군은 일본군을 추방하기 위해 다시 봉기했다. 그래서 논산의 웅치(雄稚)와 우금치(牛金峙)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혁명군은 처음엔 관리들의 탄압을 막고자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일본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싸웠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