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자식, 미운 자식
오늘(6.16)의 학습은 훈자(訓子)편 [9]조(條)로 본문과 풀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憐兒(연아)어든 多與棒(다여봉)하고 憎兒(증아)어든 多與食(다여식)하라.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많이 때리고, 아이를 미워하거든 먹을거리를 많이 주어라.
○ 憐(불쌍히 여길 련) 가엽게 여기다, 사랑하다
○ 與(더불 여) 더불다, 주다
○ 棒(막대 봉) 몽둥이, 막대
○ 憎(미울 증) 밉다, 미워하다
오늘 본문은 일반적인 관념과는 다른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는데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자식과 미운 자식을 대놓고 구별하고 있군요. 또한 사랑하는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고 미운 자식에게는 덜 주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글쓴 이는 위 글의 풀이를 궁리하던 중에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교육에서의 체벌(體罰)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었습니다. 오늘 글은 이 두가지 내용에 유명한(?) 정원사(庭園師) 얘기를 덧붙여 꾸미겠습니다. 정원사를 얘기하는 것은 흔히 아이들을 집안의 꽃이나 나라의 동량(棟梁)으로 비유하기에 정원 가꾸는 일에서 아이 기르는 지혜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1. 아이에 대한 체벌(體罰)의 문제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많이 주라(=때려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체벌을 권장하는 느낌마져 듭니다.
사실 예전에는 가르침에 있어서 체벌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교편(敎鞭)을 잡고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한자 敎(가르칠 교)자는 ‘아이(子)가 공부를(爻) 하도록 때리다(攵)’라는 뜻이고, 鞭(채찍 편)은 가죽으로 된 채찍이나 회초리를 가리키지요. 그러니까 교편(敎鞭), 즉 가르치는 일은 회초리나 매를 들어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서당(書堂)이라는 풍속도를 보더라도 훈장 앞에 회초리가 놓여 있고 한 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는 회초리로 맞았을 것이고 다른 아이들은 고소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회초리나 매를 들었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심지어 앞으로는 부모라도 가정에서 자녀를 때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필요하면 자녀를 징계할 수 있도록 민법이 보장해 주었지마는 향후에는 사랑의 매일지라도 체벌을 금지할 뿐 아니라 어기게 되면 아이에 대한 학대와 폭력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예로부터 학교든 가정이든 체벌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전제가 있었습니다. 즉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 또한 아이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바꾸는데는 체벌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다 옳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동등한 인격적 존재이며, 변화는 외부의 체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주체적 작용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사랑한다면 매를 많이 주어라(憐兒多與棒/연아다여봉) " 라는 본문의 구절을 어떻게 재해석하면 좋을까요? 한 가지 제안은 棒(막대/몽둥이 봉)의 풀이를 신체적 체벌을 뜻하는 '매'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자기 주도적인 다양한 경험'으로 확장시키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 양육의 현실이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갈수록 자녀들의 활동과 진로를 부모들이 관장(管掌)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메니저 맘(=자녀의 일과를 일일이 다 챙기는 엄마)과 헬리콥터 맘(=자녀를 지나치게 간섭, 감시하는 엄마), 심지어는 맘충(=자기 자녀만을 위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엄마)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시켰습니다.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는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방해하여 결국은 의존적인 어른 아이를 만들어낼 뿐으로 전문가들은 자녀에 대한 집착과 소유 의식이 이러한 폐단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아이는 독립적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학습 과제를 설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학습 환경을 가정과 사회가 조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는 레바논 출신의 철학가이자 시인이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글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올립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늘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수 없는 내일의 집에...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가 활이라면 아이들은 살아서 앞으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신이 당신을 구부려서 영원의 길에 놓인 과녁에 아이들이란 화살을 쏠때 기꺼이 당신의 구부러짐을 기뻐하자.
신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 구부러진 활도 사랑하므로...
2.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속담의 감춰진 뜻은?
오늘 본문의 뒷 부분은 "아이를 미워하거든 먹을거리를 많이 주어라(憎兒 多與食/증아다여식)" 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미운 자식이 있다면 양식이나 축내는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들라는 얘기일까요? 아니면 많이 먹고 비만병이라도 걸려 고생하며 살라는 이야기일까요? 모두 아닐 겁니다. 자식이 아무리 밉다 한들 어느 부모가 자식이 뭇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위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풀이는 "미운 자식이라도 잘 먹여서 후환(後患)을 없게 하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글쓴 이는 색다른 관점으로 두 가지의 다른 풀이를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위 본문을 "자식에게 밥만 먹이는 것(혹은 밥벌이만 가르치는 것)은 아이를 미워하는 부모나 하는 짓이다"라고 뒤집어 보는 겁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부모라면 자식을 먹이는 것 외에 중요한 책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책무는 지식을 가르치고 의리와 예의, 공동선에 대한 책임를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런 풀이는 앞 부분의 "자식을 사랑한다면 매를 많이 주어라"라는 것과 짝을 이루는 해석이 됩니다. 즉 아이를 사랑한다면 매를 때려서라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번째 풀이는 위 본문에서 자식에 대해 부모가 갖는 인식이 밉다는 것에 주목한 해석입니다. 자식이 미운 이유는 여럿일 수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은 아이가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부모인 내 말을 듣지 않고, 아이 멋대로 한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어르기도 하고 훈계도 했겠지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게 되면 꾸중을 하고 야단을 치며 때리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체벌(體罰)에서도 언급했듯이 부모가 아이를 야단치고 때리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야단 맞는 아이에게 자기도 싫은 것이 있으면 고성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함을 가르치는 꼴이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관계는 더 악화되고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내가 미워하는 아이에게 먹을거리를 주라"는 원문의 의미를 재해석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먹을 거리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니 먹을 거리와 같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관계의 황금률(黃金律)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것이지요. 그렇다면 인간관계의 백금률(白金律)은 들어봤나요? 그것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미워할 정도의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지금까지 분노, 공격, 비난과 같은 부정적인 피드백이었습니다. 부정적인 피드백은 어른이나 아이 모두 받기를 싫어합니다. 대신에 칭찬과 지지, 격려와 같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한 마디로 미운 아이에게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피드백 대신에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운 아이의 행동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는데 훨씬 효과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운 자식일수록 (꾹 참고 꾸준히)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맞는 접근입니다.
퇴계(퇴溪) 이황(李滉) 선생의 '훈몽(訓몽)'시를 보면 칭찬이 아이의 본성에 맞는 훈육 방법임을 잘 알려줍니다.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大讚勝撻楚(대찬승달초) 큰 칭찬은 회초리 보다 낫다
多敎等揠苗(다수등알묘) 자주 (자녀들을 윽박질러 가르치려는 것은) 논에 심은 모를 억지로 잡아당겨 키우는 것과 같다
莫謂渠愚迷(막위거우미) 느닷없이 말 끝마다 내 자식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라
不如我顔好(불여아안호) 차라리 내 자식에게 좋은 얼굴로 칭찬 하는것만 못하다
이상으로 훈자(訓子)편 [7]의 의미를 풀어 보았습니다. 기존의 해석과는 의도적으로 다른 풀이를 하려다 보니 다소의 무리한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3. 뛰어난 정원사(庭園師)에게 배우는 자식 훈육의 지혜
사람을 얘기할 때 자주 나무에 비유합니다. 예로부터 큰 일을 할 인재를 재목(材木)이나 동량(棟梁)으로 표현했는데 모두가 나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십년 앞을 생각한다면 나무를 키우고 백년 앞을 본다면 사람을 기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무 키우는 일에서 사람을 기르는 일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비록 허구(虛構)로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오랜 세월 동안 명문장(名文章)으로 전해져 온 글입니다. 당송(唐宋) 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곽탁타(郭橐駝) 이야기를 풀이글만 올리겠습니다. 원문(原文)으로 보시려면 글의 마지막에 소개하는 방법으로 검색하기 바랍니다.
▶ 정원사 곽탁타 이야기
곽탁타, 그의 본명은 알 수가 없다. 곱사병을 앓아 등이 솟아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고 낙타 주머니 같은 것이 있어 이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탁타(=낙타)라 불렀다. 곽탁타는 그 말을 듣고 좋다 하며 그 이름이야말로 나와 참 잘 맞는 것이라 했다. 그로 인하여 본 이름을 버리고 또한 자신도 스스로를 탁타라 칭했다고 한다. 그가 사는 마을은 풍악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장안 서쪽에 있다.
곽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로 장안의 모든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은 물론 관상하며 즐기는 자들과 그 과실을 파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투어 그를 맞이하여 나무를 기르고 가꾸게 했다. 곽탁타가 나무를 심으면 옮겨 심어도 살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한 실하고 무성하여 일찍 열매가 맺히고 번성하니 나무를 심는 다른 자들이 비록 엿보고 배워 따라 했지만 능히 그와 같이 할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또한 우거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면 나무의 성질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는 것뿐인데 대체로 보아 식물과 나무의 성품은 그 뿌리는 펴 나가길 바라고, 그 북돋움은 고르기를 바라며, 그 흙은 본래의 것이기를 바라고, 그 다짐에는 빈틈이 없기를 바라니 그렇게 하고 나면 나무를 움직이지 말고 근심하지 말 것이며 다시 돌보지 말아야 합니다 .
심을 때는 자식을 돌보듯이 하되 심고 나서는 버린 듯이 해야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성품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따름이지 크고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맺은 열매를 억누르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지 일찍 번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를 심는 다른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뿌리는 구부러진 채로 심고 흙을 바꾸고 그 북돋움이 지나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합니다. 진실로 그 본성에 위반하여 나무를 키우는 자들은 또한 너무 소중히 한 나머지 지나치게 사랑하여
근심하다간 큰 걱정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보고 어루만지며 떠난 후에도 바로 와 그 돌봄이 끊이질 않고, 심한 자는 그 껍질을 긁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시험하고, 그 줄기를 흔들어서 흙 채움이 성긴지 빽빽한지를 관찰하니 나무는 그 본성을 나날이 잃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실은 해치는 것이며 비록 걱정을 한다고 말하더라도 실은 나무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하지 않을 뿐이니 다른 재능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었던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나무 키우는 법도를 옮기어 관을 다스리는 데에 쓰면 어떻겠소?" 하니 탁이 말하기를 "나는 나무 심는 법 만을 알 뿐이지 다스리는 것은 내 본업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고향에 있을 때 성가실 만큼 명령을 내리기 좋아하는 고을 수령이 있었는데 백성에게 심히 도움을 주는 것 같았으나 돌연히 재앙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관리가 와 호통을 치며 이르기를 관청의 명령이라며 밭 갈기를 재촉하고 어서 심어라 하며 수확을 감독하고, 일찍 부터 고치를 켜게 하며, 서둘러 실로 옷감을 짜게 하고, 어린 아이를 잘 양육하라 하며, 닭과 돼지를 길러라 하고
북을 울려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딱따기를 쳐 불러냈습니다. 나와 같은 소인들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준비해 관리들을 위로하느라 쉴 틈이 없었으니 어찌 우리의 삶이 번성할 수 있으며 성품 또한 사악해지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백성들은 병들고 태만해진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제 직업과도 그 또한 대체로 같다고 봅니다"
물었던 자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 말 또한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나무 키우는 법을 물었다가 사람을 다루는 기술까지 얻었으니 이 일을 전하여 관청의 경계로 삼겠다" 하더라.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치거나 혹은 속이 뜨끔해집니다. 우리나라의 부모님들은 예전부터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셨습니다. 사실 오늘의 발전된 대한민국은 이러한 교육열이 밑바탕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도에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보살핌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혼자 설 힘을 가질 수 있게, 열정과 패기를 발휘할수 있게, ‘나무의 본성을 다하게 하고 자람을 방해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곽탁타의 나무 키우는 마음으로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을 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자식 교육과 걱정으로 등골이 휘고, 양육에 속병 드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식들이 제 본성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한 나머지 아이의 주인 노릇을 해서는 아이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본성과 순리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고 아이는 아이다워야 합니다. 어찌 가정만의 일이겠습니까? 모든 모임과 국가 경영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글 마침
※ 정원사 곽탁타(郭橐駝) 이야기를 원문으로 보시려면 '네이버'나 '다음' 포털에서 <정원사 곽탁타>로 검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