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footprint 2020. 7. 3. 10:56

오늘 학습은 성심(省心)편 上[24]로 본문과 풀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 본문 풀이

 

若聽一面說(약청일면설)이면 便見相離別(변견상이별)이니라.

만약 한쪽 말만 듣는다면 곧바로 서로 이별하게 될 것이니라 .

 ○ 若(같을 약) 같다, 만약

 ○ 聽(들을 청) 듣다, 받아 들이다

 ○ 面(낯 면) 낯, 얼굴, 방면, 쪽

 ○ 便(펀할 편/똥오줌 변) 편하다, 똥오줌(변), 문득(변), 곧(변)

 ○ 離(떠날 리) 떠나다, 흩어지다

 

若聽一面說(약청일면설)

 ○ 若(같을 약)은 '만약'의 뜻을 갖는 부사입니다.

 ○ 聽(들을 청)은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며, 聞(들을 문)보다 더 의식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 一面(일면)은  '한 쪽'을 가리킵니다.

 ○ 說은 같은 글자지만 뜻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동자이음(同字異音) 한자로 쓰임에 따라 "설", "세", "열"로 읽습니다.  - 說明(설명), 說敎(설교), 演說(연설), 社說(사설),  遊說(유세),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便見相離別(변견상이별)

 ○ 便은 "편"과 "변"의 두가지 소리를 갖는 동자이음(同字異音)입니다. 본문에서는 '문득'이나 '곧'의 뜻을 갖기 때문에 '변'으로 읽습니다.  - 便紙(편지), 人便(인편), 便所(변소)

 ○ 見(볼 견)은 피동사(被動詞)로 便見은 "곧바로 (서로 이별을) 당하게 된다'의 어감을 갖게 됩니다.  
 ○ 相(서로 상)은 들어주지 않은 다른 쪽을 지칭합니다.

 

본문은 한쪽에 치우쳐 듣는 해로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편찬한 《유가귀감(儒家龜鑑)》 第 25章의 내용이 위 본문의 뜻을 보다 명확히 해줍니다.

愛之言 亦不可偏聽. 若聽一面說 便見相離別(애지언 역불가편청. 약청일면설 변견상이별)

사랑하는사람의 말 또한 치우쳐 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한쪽 말만 들으면 곧바로 서로 이별함을 당한다. 

 

偏(치우칠 편)은 여럿 중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친다는 뜻입니다. 편식(偏食), 편애(偏愛), 편중(偏重)에 모두 편(偏)자가 들어 있네요. 좋아하는 것만 먹으면 건강이 상하고, 한 쪽만 사랑하면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며,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한쪽 말만 듣고 반대말을 듣지 않으면 결국 편향(偏向)에 빠져서 판단을 흐리게 되고 불행을 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이견(異見)이 있을 경우에는 양쪽의 말을 다 들어봐야 합니다. 귀가 두 개가 달린 것은 한 쪽이 아닌 양쪽을 다 들으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聽(들을 청)"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 자원(字源) 풀이

 

 

聽자는 ‘듣다’, '살피다', ‘허락하다’등 의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聽자는 耳(귀 이)자와 壬(천간 임)자, 悳(덕 덕)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耳(귀 이)자에 두 개의 口(입 구)자만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후에 口자는 생략되었고 대신 눈과 심장을 그린 悳자와 壬자가 더해지면서 ‘몸을 가까이 하여(壬) 곧은(直) 마음(心)으로 듣는(耳)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획수가 22획이나 되어 복잡하지만, 다양한 글자들의 결합을 통해 단순히 ‘듣는다’의 뜻을 벗어나 ‘집중해서 듣고, 용서하고, 살피며, 받아들이다’까지 모두를 표현하였습니다.

 

聽(들을 청)과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로는 '聞(들을 문)'이 있습니다. '들을 청’과 '들을 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聞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들리다’는 뜻입니다. 반면 청(聽)은 '(의식적으로) 주의 깊게 듣다’는 뜻입니다. 聞과 聽의 관계는 영어에서의 '히어(hear)‘와 리슨(listen)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聞(들을 문)에는 ‘듣다’는 뜻 외에 ‘알다’ 혹은 ‘깨우치다’는 뜻도 있습니다. 저절로 들어서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聽(들을 청)에는 '듣다’는 뜻 외에 '살피다’ 또는 '허락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주의 깊게 듣게 되면 자세하게 살피게 되고 자세하게 살피다 보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시정(市井)에서는 듣기(聽)의 중요성을 강조하느라 聽(청)자에 대한 각종 이설(異說)들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聽(청)자를 耳(귀 이)+王(임금 왕)+十(열 십) +目(눈 목)+一(한 일)+心(심)으로 파자(破字)하여 "상대를 임금처럼 여겨 열 개의 눈과 하나의 진실된 마음으로 집중하여 듣는 것"으로 설명하는 식입니다. 나름대로 '듣기'의 중요성과 잘 듣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네요.  

 

 

▣ 경청(傾聽)의 중요성

 

세상이 복잡해지며 각종 갈등이 심해지면서 소통의 필요성과 경청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개인간 소통에 있어서 경청의 의의를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가정과 학교, 군대, 직장이나 각종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왔을 것입니다. 그들 중 비교적 접촉이 많았던 사람들을 잠시 생각해 보고 아래 3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① 호감이 가는 사람

 ② 믿음이 가는 사람

 ③ 그 사람 말이라면 따르고 싶은 사람

 

어떻습니까? 위 3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이 쉽게 떠오릅니까?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의 인간관계는 만족스러웠을 겁니다. 만약 위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재점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3가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의 개인적 특징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각자가 생각한 그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부자도 아니고 사회의 명망가도 그들의 공통점은 아닙니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경청의 이익은 대단히 큽니다. 건성으로 듣지 않고 잘 들었으니 지식과 정보가 늘어나고 주변 환경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이 선택했듯이 경청하면 호감과 신뢰를 얻습니다. 경청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상대가 쉽게 따라줍니다. 결국은 경청하는 사람이 말도 잘하게 됩니다. 말을 잘 한다는것은 청산유수로 번지르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눌변(訥辯)이든 심지어 무언(無言)으로도 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경청의 방법은 책 몇 권으로는 모자랄 만큼 시중에 넘쳐 납니다. 소개된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몸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함께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귀를 기울여 상대의 마음을 얻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이 됩니다. 진심으로 듣게 되면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상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상대의 생각과  기분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청득심(以聽得心)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영광을 가능케 했습니다.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이름도 쓸 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지금의 나를 가르친 것은 귀였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 곧 경청은 보통의 인간 테무친을 위대한 인간 칭기즈칸으로 탈바꿈시켰던 핵심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경청을 통해 현명하고 지혜로워지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테무친은 칭기즈칸이 될수 있었습니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의 리더십을 발휘한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대왕이 압권(壓卷)입니다. 세종의 신하 중에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허조()가 있었습니다. 세종은 간혹 허조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그를 중용하였습니다. 그런 허조가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남긴 유언이 세종실록에 보입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吾年過七十, 位至上相, 聖上寵遇, 諫行言聽, 死無遺恨).”

 

임금과 신하간에 무엇이 이토록 기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했을까요? 세종의 ‘단 하나의 습관’은 토론과 경청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라고 묻는 것이 세종의 말버릇이었다고 합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습관은 세종에게 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자, 의견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만 말을 하면 나머지 사람은 입을 닫습니다. 힘 가진 사람만 말을 하면 힘없는 사람은 입만 닫는 게 아니라 귀를 닫고, 마음까지 걸어 잠금니다. 듣기를 잘 하면 지혜가 커지고, 말을 많이 하면 후회할 일도 많아집니다.

많은 경우, 기도(祈禱)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어느 신(神)을 향해 하는 기도이든 위로를 받고, 때로는 해결책까지 스스로 찾게 됩니다. 아래 시(詩)를 통해 경청(傾聽)의 힘을 생활속에 실천하기를 기대합니다.

 

들어주세요/ 작자 미상

 

당신에게 무언가를 고백할 때, 그리고 곧바로 당신이 충고를 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무언가를 고백할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를 당신이 말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은 당신이 내 감정을 무시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무언가를 고백할 때

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당신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느낀다면

이상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왜냐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시고, 어떤 충고도 하지 않으시며,

일을 직접 해결해 주려고도 하지 않으시니까요.

하느님은 다만 우리의 기도를 말 없이 듣고 계실 뿐.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를 믿으실 뿐이죠.

그러니 부탁입니다. 침묵 속에서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세요

만일 말하고 싶다면 당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것을 약속합니다.

 

 

(2022.7.22)

-> 오이코스 말씀묵상 - 2022년 7월 22일(금)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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