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心寶鑑/동네글방(火金通信)

빈천지교(貧賤之交), 조강지처(糟糠之妻)

efootprint 2020. 4. 17. 11:30

오늘 본문인 존심(存心)편 [5]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짜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박시후망자불보(薄施厚望者不報)이고 다른 하나는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입니다.




1. 박시후망자불보(薄施厚望者不報)


위 문장은 "적게 베풀고 많은 것을 바라면 돌아오는 보상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풂은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그런데 베풀고 나서 자기가 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탐욕이며 진정한 베풂은 아닙니다.


베풂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베풀되 언젠가 나도 상대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베풂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에 대한 기대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전자는 ‘주고 받기(Give & Take)' 방식이고, 후자는 '주고 잊기(Give & Forget)" 방식입니다. 당연히 ‘Give & Forget’ 방식이 베풀 때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나이 마흔에 1,000억 원을 번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나이 마흔에 1,000억 원이라는 돈을 벌게 됐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세 가지를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첫째, 약속을 지켰습니다. 둘째, 인간관계를 잘하였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좀 들어본 말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세 번째 비결은 '저는 나보다는 거래하는 파트너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에 집중했습니다.”라고.


그렇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마워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갚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상호성(相互性)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풂도 다양한 형태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소위 베풂의 선순환(善循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가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베풂이 아름답습니다.


2.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위 문장은 "귀한 신분이 되고 난 이후에 비천했던 때를 잊으면 그 자리가 오래 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유명한 옛 문장이 있습니다.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 그것인데요. <후한서>에 나오는 '송홍(宋弘)'과 <삼국사기>의 인물인 '강수(强首)'의 이야기를 살펴 보겠습니다.


송홍(宋弘)

후한 광무제() 때 신하 가운데 송홍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렴결백할 뿐 아니라 유능하여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 무렵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 공주가 남편을 잃고 홀로 되었습니다. 이에 광무제는 자신이 늘 보아왔던 송홍의 인물됨에 이끌려 그를 누이의 배필로 삼으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물론 공주 또한 그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지요. 이에 두 사람은 송홍의 의사를 확인하기로 합니다.
광무제는 공주를 병풍 뒤에 숨게 한 후 송홍을 불러들여 이렇게 묻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재산이 많아지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신분이 높아지면 아내를 새로 들인다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송홍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려울 때 사귄 우정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조강지처()는 절대 버려서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이 대답을 들은 황제는 송홍이란 인물이 부인을 버리고 공주를 택할 리가 없음을 깨닫고 공주에게도 송홍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빈천지교(貧賤之交)와 조강지처(糟糠之妻)의 표현이 비롯되었습니다. 위 이야기가 담긴 <十八史略, 後漢書>의 원문과 해석을 아래에 옮겼습니다.


所用群臣(소용군신) 如宋弘等(여송홍등) 皆重厚正直(개중후정직)

등용된 여러 신하들 중에 송홍 같은 사람은 모두 중후하고 정직하였다.

上妹湖陽公主(상매호양공주) 嘗寡居(상과거) 意在弘(의재홍)

임금(=後漢 光武帝)의 누이 호양공주가 일찍이 과부로 살았는데 송홍에게 마음이 있었다.

弘(홍) 入見(입견) 主坐屛後(주좌병후)

송홍이 임금을 뵈러 들어가자 공주가 병풍 뒤에 앉아 있었는데

上曰(상왈) 諺言(언언) 富易交(부역교) 貴易妻(귀역처) 人情乎(인정호)

임금이 말했다. “세속의 말에, ‘부유해지면 사귐을 쉽게 여기고 귀해지면 아내를 쉽게 여긴다’고 하니 그것이 인정 아니겠는가?”

弘曰(홍왈) 貧賤之交(빈천지교 不可忘(불가망) 糟糠之妻(조강지처) 不下堂(불하당)

송홍이 말했다. “‘가난하고 천할 때의 사귐은 잊지 말아야 하며, 술지개미와 겨를 함께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上(상) 顧主曰(고주왈) 事不諧矣(사불해의)

임금이 공주를 돌아보며 “일이 안되겠구나.” 라고 말하였다.


※강수(强首)                                                    

다음은 삼국사기 번역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이야기입니다.

<소대가리 선생, 강수(强首)>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가 각기 바다 건너 남쪽의 일본과 서쪽 중국의 당나라와 연계하여 각축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긴장 속에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 조정에는 당나라에서 사신이 도착했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나라 사신이 가져온 외교문서가 무슨 내용인지 어려워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허, 이런 고얀 일이 있나!' 태종무열왕으로서는 걱정과 근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사방으로 찾고 있던 그 어느 날. 학자 복장을 한 기이하게 생긴 한 젊은 남자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첫 만남에서는 으레 통성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무열왕은 우선 "그대가 누구인지 알리도록 하라"는 말을 건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젊은 학자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신()의 본래 이름은 '소대가리'라 합니다."

"뭐라고? 소대가리라고?" 무열왕은 그의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합니다. '진짜 소대가리처럼 생겼도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외모 중에서도 머리가 특이했습니다. 머리통 뒤쪽이 마치 쇠뿔처럼 불룩 솟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소대가리가 당시 어느 신라 지식인보다 학덕이 뛰어남을 알게 된 무열왕은 이날 만남에서 소대가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이름을 내립니다.

"경()은 두골()을 보아하니 강수 선생()이라 할 만하다. 앞으로 그대의 이름은 강수로 할 것이며, 나의 곁에서 짐()과 우리 신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도록 하시오."

이리하여 그의 이름은 강수가 되고 그의 특출한 실력으로 강수 선생이라고 하면 신라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대장장이의 딸과 야합(野合)한 소대가리>

한편 강수가 인생행로를 정할 때 있었던 아주 유명한 일화가 『삼국사기』 강수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수가 강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왕에게서 내려 받기 전, 그러니까 고향 중원경에서 여전히 '소대가리'로 불리던 그 젊은 시절, 그는 대장간의 딸과 눈이 맞아 야합했습니다. 야합이란 쉽게 말해 정상적인 혼인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사자 간에 몸을 섞어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다는 뜻입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명이라는 여인과 그러했듯이,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10대 처녀 안징재에게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장장이는 신라사회에서 대단히 천시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한 강수와 아내 둘 사이의 애정은 퍽이나 깊었습니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읍내 여자로서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이를 골라 중매를 통해 그의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강수는 두 번 장가를 들 수 없다 해서 사절하려 했다. 이에 부친이 노해 말하기를 "네가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로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여인으로 짝을 삼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니, 강수가 재배()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배우고도 옮기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옛 사람 말을 듣건대 조강지처는 집안 뜰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


이러한 강수가 이 대장간의 딸을 어떻게 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으로 미뤄 보건대 이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음은 확실합니다. 아무튼 그시대에 대장간 일은 천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었음에도 강수는 출세한 뒤에도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결코 이 여인을 버리지 않고 신의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강수는 훌륭한 문장가이면서 아울러 자신의 행위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즉 합리주의에 입각한 신의()의 도덕률의 실천가였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 훌륭한 남편은 아내 덕분 >

신의를 중시하는 강수와 비슷한 면모는 그의 아내에게서 동시에 발견됩니다. 그것은 신문왕 때 남편 강수가 죽은 뒤에 있었던 다음 일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수의 아내가 식생활이 매우 궁핍해져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어떤 대신이 이 말을 듣고는 왕에게 요청해 조() 100석을 내리게 했으나 그 아내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첩()은 천한 사람으로 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면서 나라의 은혜를 받은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이미 혼자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후한 내림을 받겠습니까?" 기어이 받지 않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


이뿐만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아내는 그의 재산을 사찰에 기부합니다.


신문왕대에 이르러 강수가 죽으매 장사에 관한 비용은 나라에서 제공해주었다. 부의()로 준 옷과 피륙이 대단히 많았으나 집안사람들이 그것을 사사로이 갖지 않고는 모두 불사(, 불교와 관련된 기관이나 행사)에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


여기에서 말하는 기부 주체인 집안사람은 강수의 아내였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강수의 아내 역시 강수의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강수가 불교는 세외교()라 하였고 이제 강수가 죽으니, 그의 처는 강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산을 불사에 시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으로  보건대 현세(現世)에서 강수가 성공하는 데는 아내의 내조 또한 컸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했던가요? 성공한 남자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야 한다고.(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