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心寶鑑/동네글방(火金通信)

배울 학(學)

efootprint 2020. 5. 26. 11:02

 

오늘의 학습 본문인 근학(勤學)편 2조(條)는 비유(比喩)의 천재인 장자(莊子)가 한 말로 그는 '학(學)', 즉 배움의 가치를 아래와 같이 유려(流麗)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人之不學(인지불학)은 如登天而無術(여등천이무술)하고 學而智遠(학이지원)이면 如披祥雲而覩靑天여피상운이도청천 )하고 登高山而望四海(등고산이망사해)니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하늘에 오르려는데 방법이 없는 것과 같고, 배워서 지혜가 깊어지면 상서로운 구름을 헤치고서 푸른 하늘을 보며, 높은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위 문구에는 천(天), 운(雲), 산(山)이 잇달아서 나옵니다. 이 글자들은 모두 높은 곳을 나타내는 글자입니다.  높음이란 공간으로서의 높이일 수도 있고, 마음의 높음일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높음으로 보자면 등천(登天)은 크게는 임금이 되는 것이요, 등고산(登高山)은 제후(諸侯)의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작게 (?) 보더라도 한 분야의 고수(高手), 명인(名人), 장인(匠人) 됨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높음을 선망(羨望)하고 오르려 합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 오르려면 수단과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팡이일 경우도 있고.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술(術)이라고 명명(命名) 했습니다. 술(術: 재주 술)은 길, 규칙, 법칙, 수단, 방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인간이 관계맺는 모든 분야에는 술(術)이 있습니다. 학술(學術), 의술(醫術), 전술(戰術), 상술(商術), 예술(藝術), 화술(話術), 처세술(處世術)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술(術)의 수준에 따라 개인의 성공과 행복이 큰 영향을 받습니다. 공간의 높이든 마음의 높이든 술(術)이 없으면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없고, 그 술(術)은 배움, 즉 학(學)이 없으면 높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장자(莊子)의 얘기입니다.

 

이번 글은 나를 높이는 수단인 술(術)로서의  '학(學)'에 관련된 몇 가지 얘기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자원(字源) 풀이

學자는 ‘배우다’나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學자를 보면 집을 뜻하는 宀(집 면)자 아래로는 아이(子)가 있고, 위로는 숫자나 매듭을 그린 爻(효 효)자를 감싼 양손(臼)이 그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일반적인 풀이는 "아이가 집에서 양손으로 산가지나 매듭을 들고 배운다"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효(爻)를 옛 건물에서 볼 수 있는 X자 모습의 목재로 보고 "아이가 배움을 얻는 집이라는 뜻으로 풀기도 하고, 손(臼) 안에 든 것을 보물(爻)로 보아서 "두 손으로 보물을 안아다가 자식의 머리 위에 올려주는 것을 그린 글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진정한 유산은 재물이 아니라 배움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해석이든 학(學)이라는 글자에는 배움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수단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기할 점은 학(學)의 훈(訓)에는 '배울 학'도 있지만 '가르칠 교'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학(學)자에는 '배운다'는 뜻은 물론 '가르친다'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배워야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teaching is learning)이라는 서양 격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 배움(學)의 목적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압축됩니다. 그 두 가지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배움'과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배움'으로 나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배움은 나를 밖에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내가 할 수 있는 기능이나 기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배움입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나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 요즘 말로 스펙(spec)을 쌓기 위한 공부. 그리고 앞서 얘기한 각종 술(術)에 대한 공부는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존재(存在)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배움입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배움은 나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한 배움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공부이며 나 아닌 환경과의 관계로까지 확장된 공부이지요. 술(術) 중에는 인술(仁術)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배움의 결과를 세상에 꼭 알릴 필요는 없지만 당위(當爲), 즉 배워서 깨달은 대로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배움입니다. 

 

공자(孔子)는 배움을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눴습니다(논어, 헌문편).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남에게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학문이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진리를 자기 몸에 얻으려는 학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치면  '위인지학'은 '세상 밖으로 나가는 배움'이고, '위기지학'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배움'입니다.

 

배움에는 두가지가 다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전자(前者), 즉 세상으로 나가는 배움만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실정입니다. 후자(後者)인 안으로 들어가는 배움은 그 실상이 너무 초라합니다. 예전과 비교해 학력(學歷)은 엄청 높아졌지만 사람들 마음이 그만큼 높아지고 좋아졌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 다르다"라는 말 대신에 "배운 놈이 더하다"라는 말이 들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배움의 두 가지 목적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 배움(學)의 자세

배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배움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선현(先賢)들이 남긴 어록(語錄)을 참고로 개인 차원의 배움의 자세를 살피겠습니다.

 

 

첫째는 학이시습(學而時習)입니다. 이 말은 논어()의 맨 첫머리에 나옵니다. 맨 첫머리에 이 말이 쓰인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두번 듣거나 보고 나면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온전한 앎이 아닙니다. 배운 것(=學: 듣고, 보고, 알고, 깨닫고, 느낀 것)을 기회 있을 때(=時)마다 실지로 행해 보고 실험(=習: 숙달, 습관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듣고, 보고,  느낀 것이 내 지식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내재화되어 인격을 이루게 됩니다. 조선(朝鮮)시대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책을 잡으면 보통 천번~만번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남이 한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번을 하고, 남이 열번에 마친다면 나는 천번을 하겠다(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중용)"는 기천정신(己千精神)의 실천가였습니다.

 

둘째는 욕속부달(欲速不達)입니다. 무엇이든 빨리 이루려고 하면 제대로 못한다는 뜻으로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옵니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거쳐야 할 길이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에서 배움이 거쳐야 하는 길을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여, 밝히 분별하고, 도탑게 실행한다(博學之,審問之,愼思之,明辯之.篤行之: 박학지,심문지,신사지,명변지,독행지)"라고 천명(闡明)합니다. 학문(學問)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 것이며, 이 다섯 단계를 학문의 길이라 하여 위학지도(爲學之道), 또는 배움의 순서인 위학지서(爲學之序)라고 합니다. 이 다섯 단계는 검토할 내용이 많아서 후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셋째는 호학락학(好學樂學)입니다. 배움을 줗아하고(好學) 즐기자는 것(樂學)입니다. 논어의 옹야(雍也) 편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라고 했습니다. 배움을 좋아하고 즐길 때 줄탁동시(啐啄同時)와 이삼우반(以三隅反)의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줄탁동시'는 가르침과 배움이 합쳐져서 성과를 내는 것이고, '이삼우반'은 하나를 배워서 세가지의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배움에서 이러한 얻음이 있을 때 즐거움은 저절로 찾아오니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不亦열乎: 학이시습불역열호)"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와우(Wow)! 유레카(Eureca)! 대박! 

(왕관의 불순물 여부를 목욕탕에서 깨달은 아르키메데스, 깨달음의 기쁨이 알마나 컸으면 "유레카!"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 나갔을까요?

 

넷째는 삼인유사(三人有師)입니다. 세 사람 이상이 모이면 그 중에 배울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논어에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술이편, 21장)"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 아닌 모든 사람은 나의 스승입니다. 더 넓게 생각하면 흐르는 물에서도 배우고 곡식의 씨앗에서도 교훈을 배웁니다. 배움의 소재와 방법은 도처에 있습니다.

 

다섯째는 배움에 겸손해야 한다는 학여불급(學如不及)입니다. 논어에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고 배운 것을 행여 잃을까 두려워한다(學如不及, 猶恐失之: 학여불급, 유공실지/태백편 17장)"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문구는 명심보감의 근학(勤學)편 8조(條)에도 똑같이 보이지요. (동아리 교재, 69페이지 참조) 학여불급(學如不及)은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배운다는 뜻입니다.

장자(莊子)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다(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개인지소지, 불약기소부지/장자, 추수편)"라고 했고,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천재 뉴턴(Newton)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물방울, 모르는 것은 바다"라고 하여 스스로 겸손하였습니다. 공자(孔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주공(周公)입니다. 그런 공자도 "누군가 주공(周公)과 같은 뛰어난 재예(才藝)를 가지고 있더라도 만약에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언급할 가치도 없다(논어, 태백편 11장)"고 말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생 배움을 뜻하는 사이후의(死而後矣)입니다. 공자(孔子)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증자(曾子)는 "군자와 선비는 어짊(=仁)을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막중하지 않는가? 죽은 뒤에야 끝난다(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인이위기, 불역중호, 사이후이/태백편 7장)"라고 단언합니다. 군자와 선비에게는 공부 또한 끝이 없는 임무입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다섯살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鍊習)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대답합니다. “요새 내 실력이 제법 느는 것 같거든. (I'm beginning to notice some improvement.)”

청(淸)나라의 좌종당(左宗棠)은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저어 나가는 것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한다.(學習猶如逆水行舟, 不進則退: 학습유여역수행주, 부진즉퇴)"라고 했습니다. 학여역수(學如逆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진 연원(淵源)이지요. 배움을 그치는 것은 학문의 후퇴를 넘어 정신의 쇠락(衰落)을 가져옵니다. 배우고 있는 한 나이와 상관 없이 누구나 성장 중입니다. 배움에 열정적인 자세를 깆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청춘입니다.  

 

 

가수 오승근이 2012년도에 발표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가요는 8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합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인기곡입니다. 우리 <동네글방> 회원님들이 이 노래의 가사 중 "사랑"을 "배움"이나 "공부"로 바꾸어 부른다면 딱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아래에 노래 가사 중 일부를 "공부"로 바꿔 올립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원곡 오승근(노래는 아래를 클릭하세요)

  www.youtube.com/watch?v=_7Bvs_wA2-w

 

야 야 야 내나이가 어때서 / 공부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 공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날 우연히 거울속에 비춰진 /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 /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