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歌 20

시로 납치하다(1)

생에 감사해 / 칠레가수 비올레타 파라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눈을 뜨면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알아보는 샛별 같은 눈을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귀뚜라미 소리, 새 소리, 망치 소리, 기계 소리, 개 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밤낮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소리와 글자를 주어 그것들로 단어들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해주어서. ‘엄마, ‘친구’, ‘형제자매’ 그리고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추는 ‘빛’ 같은 말들을.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지친 다리로도 도시와 물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들판을 그리고 ..

詩 & 歌 2023.06.22

마음이 머무는 시(1)

마음/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내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백비(白碑)/ 이성부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

詩 & 歌 2021.07.30

말(言˙語)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같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결이라는 말/ 문성해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詩 & 歌 2021.04.22

詩, 詩人

시(詩)/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

詩 & 歌 2021.04.03

비(Rain)

가슴에 내리는 비 / 윤보영 ​ 비가 내리는군요. 내리는 비에 그리움이 젖을까 봐 마음의 우산을 준비했습니다. 보고 싶은 그대, ​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은 그대 찾아갑니다. 그립다 못해 비가 됩니다. ​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 비 내리는 날은 하늘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맑은 하늘이 보입니다. 그 하늘 당신이니까요. 빗물에 하루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대 생각 넣을 수 있어 비 오는 날 저녁을 좋아합니다. ​ 그리움 담고 사는 나는 늦은 밤인데도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을 보면 그대 생각이 비처럼 내 마음을 씻어주고 있나 봅니다. ​ 비가 내립니다. 내 마음에 빗물을 담아 촉촉한 가슴이 되면 꽃씨를 뿌리렵니다..

詩 & 歌 2021.03.02

우리 옛 시(聯詩調)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맹사성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로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는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한 강파는 보내느니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있다 소정에 그물 실어 흘리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봄이 찾아드니 참을 수 없는 흥취가 저절로 나는구나/ 막걸리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서 잡은 싱싱한 물고기(쏘가리)가 안주로 좋구나./ 이 몸이 이렇게 한가롭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여름이 찾아드니 별채에서 할 일이 없다 / 더위를 잊..

詩 & 歌 2021.02.04

우리 古詩(2)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욕심(慾心)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

詩 & 歌 2021.02.03

화(花)2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개망초꽃/ 남경식 불볕더위 내리쬐는 들이나 길가 아무데나 서러운 사연으로 하얗게 타는 꽃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발길에 채이고 밟히며 피고 지는 한많은 눈물꽃 고향이 어디냐고 ..

詩 & 歌 2020.12.27

삶(2)

청춘/ 신미균(1955~) 꽃 청춘 이모티콘/ 신미균 멋대로 살겠다고 집 나갔던 언니가 모처럼 들어 왔습니다 막무가내로 돈 달라고 망치로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엄마의 가슴이 석고처럼 부드러워서 못이 쑥쑥 잘 들어갔는데 이제는 콘크리트 벽이 되었나봅니다. 못이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못대가리에서 불꽃이 튀기는 소리도 들립니다. 언니가 못을 박다 자기 손을 내리쳤나 봅니다. 아프다고 펄펄 뛰는 소리도 들립니다. 엄마의 가슴에 바람이 부딪히나 봅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립니다. 잠시 후, 전기드릴 소리가 들립니다. 망치로 안 되니까 더 강력한 걸 가져왔나 봅니다. 전기드릴의 회전소리에 집이 흔들립니다. 참지 못한 내가 전원 스위치를 내립니다. 갑자기, 나를 발견..

詩 & 歌 2020.11.19

술(酒)을 부르는 시(詩)

서울 막걸리/ 정연복 홀로 마시는 / 막걸리도 내게는 과분한 행복이지만 벗과 함께 마시는 / 막걸리 한 잔은 더욱 황홀한 기쁨이다 나를 내 동무 삼아/ 집에서 혼자 따라 마시는 서울막걸리는 / 왠지 쓸쓸한 우윳빛 하지만 벗과 눈빛 맞대고/ 서로의 잔에 수북히 부어주는 서울막걸리는/ 색깔부터 확 다르다 벗과 다정히 주고받는/ 투박한 술잔에 담긴 서울막걸리의 색깔은 남루한 분위기의/ 희뿌연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왜 그리도 눈부신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뽀얀 살결 같다 막걸리/ 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산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

詩 & 歌 2020.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