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歌

우리 古詩(2)

efootprint 2021. 2. 3. 09:00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욕심(慾心)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노래: 청산은 나를 보고 / 심진스님 - YouTube

- 나옹선사 : 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2&cid=42840&categoryId=42842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 승탑으로 가는 길목의 조사당. 고려 말 기울어가는 불교계에 한가닥 빛이 되었던 소위 3화상이라 불리는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을 모신 곳. 가운데 목조(木造)가 나옹화상

 

권농가(勸農歌)/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남구만: terms.naver.com/entry.nhn?docId=532765&cid=46622&categoryId=46622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의 사당

 

백로가 1/ 이씨(정몽주 어머니)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가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이 시조는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초장에서는 백로에게 까마귀가 싸우는 골짜기에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으며, 중장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백로가 까마귀들이 싸우는 골짜기에 가면 안 되는 이유는 검은색의 까마귀들이 백로의 하얀색을 시샘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종장에서는 까마귀들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맑은 물에 씻어 깨끗해진 몸이 까마귀들을 가까이함으로써 더럽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까마귀는 조선을 개국하려는 이성계 일파와 몽골 항쟁 이후 새롭게 형성된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을 비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권문세족들이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권문세족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집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 일파나 권문세족은 고려의 국운(國運)을 위태롭게 만드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까마귀 싸우는’이라는 표현은 고려 말에 이 두 집단의 세력다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백로는 고려에 충성을 다하려는 사람들을 비유한 표현이다. 종장에서 ‘?? 씻은 몸을 더럽힐까’라는 표현은 까마귀로 비유한 무리들을 멀리 하라는 뜻만은 아니다. 종장의 표현은 까마귀 같은 무리들처럼 나쁜 마음을 갖지 말고 고려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고려의 신하로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시각적 이미지 대비를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검은 까마귀는 간신(奸臣)과 역신(逆臣)을 뜻하며, 하얀 백로는 충신(忠臣)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얀 백로에게 검은 까마귀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간신이나 역신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의 주제는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세력과 어울리는 경계함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김정구(金鼎九)가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희령(李希齡, 1697~1776)의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이 시조를 한역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을 김정구가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조의 지은이를 김정구라 추정하기도 한다.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화원악보』 등에 실려 있으며, 시조집마다 표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백로가 2/이직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 태종조때의 영의정 이직, 호는 형제, 사람을 겉 모습만으로 비평하지 말것이며 겉 모양은 훌륭하여도 마음이 검은 사람도 많다는 경계의 노래다.

- 이직은 고려 말의 신하로서 조선개국에 공을 세운 그를 사람들이 변절자라고 비판하자 자기의 입장과 당위성을 밝힌 내용. 이 시조는 정치인과 지식인의 위선적 이중성을 지적하고 있음. 

 

 

붕우가(朋友歌) 1/ 김육

자네 집에 술 익거던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술 익거던 나도 자네 청하옵세

백년 덧 시름 잊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 김육 (1580~1658) 호는 잠곡, 영의정을 역임. 술도 술이려니와 우정을 잘 표현.

 

붕우가(朋友歌) 2/ 작자 미상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라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오면 지척이라도 천리로다

우리는 각재 천리오나 지척인가 하노라

 

​- 여기 각재의 '재' 는 있을 '在'자,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處世歌 1/ 송인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하매 남의 시비 모르로다

다만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 송인 (1517~1854) 중종~선조 중종의 駙馬. 일일히 참견하지 말고 듣고도 못 들은체, 보고도 못 본체하는 처세술을 노래.

조선 초기~중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庵) · 녹피옹(鹿皮翁),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조부는 영의정 송질(宋軼), 부친은 송지한(宋之翰)이다. 외조부는 남곤(南袞)이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1526년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儀賓府) · 충훈부(忠勳府) · 상의원(尙衣院) 등에서 요직을 지냈으며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 · 조식(曺植) · 이민구(李敏求) · 정렴(鄭) ·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순수하고 근실하였으며 화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효도로 이름났다. 거상(居喪) 때에 잘 견디지 못할까 미리 걱정하여 평상시에 하루걸러 담박한 음식을 먹었다. 놋쇠그릇으로 요강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는 훗날 망가져 사람들의 음식그릇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고 한다.

실록에는 그의 인품에 대하여 "예서(隸書)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 으뜸이었으며, 시도 잘 지었으나 서예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그의 인품의 고매함은 서예나 시문보다 더 뛰어났다."라고 하였다.1)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풍채가 빼어난데다 예절에 익숙하였으므로 종백(宗伯)을 삼거나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는 평을 들었다.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기 위한 영위사(迎慰使)로서는 종척(宗戚) 중에 으뜸으로 물망에 올랐다. 송인은 특히 글씨에 능하여 조맹부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이황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 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행장에 이르기를 "그 필적이 여러 금석문(金石文)에 흩어져 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쓴 강릉(康陵)의 지문(誌文)이야말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글씨이니, 다른 글씨는 모두 이만 못하다.'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글씨로는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비롯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양주(楊州)의 영의정 한효원(韓效元)의 비, 감사(監司) 이충작(李忠綽)의 묘갈,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苕)의 비, 송지한(宋之翰)의 비, 광주(廣州)의 함성군(咸城君) 이종생(李從生)의 묘갈, 한림(翰林) 정령(鄭苓)의 비, 덕평군(德平君) 이항(李沆)의 비, 참의(參議) 정원령(鄭元狑)의 비, 판서 심광언(沈光彦)의 비, 판서 신거관(愼居寬)의 비, 양천(陽川)의 곽한방(郭翰邦)의 비, 파주(坡州)의 곡산(谷山) 양윤정(梁允精)의 묘갈, 장단(長湍)의 찬성(贊成) 김안국(金安國)의 비, 고양(高陽)의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의 비,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비, 금천(衿川)의 영의정 상진(尙震)의 비, 첨지(僉知) 이희손(李希孫)의 비, 포천(抱川)의 이천(伊川) 이국주(李國柱)의 비, 부평(富平)의 영의정 유순정(柳順汀)의 비, 진산(晉山) 유홍(柳泓)의 비, 김포(金浦)의 참찬(參贊) 신영(申瑛)의 비, 양천(陽川)의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의 비, 교하(交河)의 병사(兵使) 윤여해(尹汝諧)의 비, 여주(驪州)의 병사(兵使) 김공석(金公奭)의 비, 남양(南陽)의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비, 통진(通津)의 정승(政丞) 심연원(沈連源)의 비, 문의(文義)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묘갈, 운봉(雲峰)에 있는 태조대왕대첩비(太祖大王大捷碑), 부안(扶安)의 진사 김석옥(金錫沃)의 묘갈, 곡성(谷城)의 일재(一齋)이항(李恒)의 비, 함양(咸陽)의 참봉(參奉) 노우명(盧友明)의 비, 삼척(三陟)에 있는 소공대비(召公臺碑) 등이 있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있다. 1636년 문단(文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處世歌 2/ 김인후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몸이 늙기도 절로하여라

- 김인후 (1510~1560) 호는 하서, 중종~명종 학자. 조선 중기의 문신.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 김온(金穩)은 서울에서 살았으나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부친은 종9품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 총명했으며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에게도 지도를 받았다. 1528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쳤고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인종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술과 시로 방황하였다고 전한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嘆老歌 1/ 우탁

1.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2.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덩굴) 쥐고

   늙은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자기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3.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우탁(禹倬: 1262 ~ 1342) 고려 후기의 유학자.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도 불렸다.

본관 단양(丹陽).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다.
우탁을 제향하는 역동서원은 1696년(숙종 22년) 안동군 월곡면 송천동에 창건되었으나, 1991년 안동대학교가 명륜동에서 송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역동서원이 교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해 4월 안동대학교에 기증하게 되면서 안동대학교 부속서원으로 박물관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있는 사인암은 그의 행적 때문에 지어진 기암절벽으로 유명하다.

 

嘆老歌 2/ 김정구 

뉘라서 날 늙다던고 늙은이도 이러한가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면 웃음난다

추풍에 흩날리는 백발이야 낸들 어이하리요

- 김정구 (연산군때 사람), 이 노래에서의 꽃은 여자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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