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개망초꽃/ 남경식
불볕더위 내리쬐는
들이나 길가 아무데나
서러운 사연으로 하얗게 타는 꽃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발길에 채이고 밟히며
피고 지는 한많은 눈물꽃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내 고향은 메리카 메리카 북아메리카
때로는 불타는 자존심과 향수에 목이 메인다
누가 내 이름을 개망초라 했는가
나는 아름다운 꽃이고 싶다
진실로 아름다운 꽃이고 싶다
모진 세월 모순 속에 피는
한 무더기 목숨꽃이여
아름다운 굴욕으로 내일을 산다.
이 꽃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면 亡草입니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철도를 건설할때 침목에 묻어 들어와 철로변부터 번지기 시작한 꽃이 전 국토에 뿌리를 내려 백성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 하여 망국초(亡國草)라 부르다가 그 뒤 망초(亡草)가 되었다고 합니다.나중에 더 비하 되면서 개자가 붙어 개망초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리고 망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요. 다른 어느 야생화보다도 망초는 자생력이 강합니다. 시골에서 밭을 한해만 비워두면 온 밭에 가장 먼저 자라는 것이 이 망초입니다. 이건 어지간한 제초제를 뿌려도 듣지를 않구요. 농부의 입장에서는 농사를 망치는 정말 지겨운 잡초라서 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합니다.
망초에도 여럿 종류가 있지만 통칭해서 망초라 하고 각기의 모습은 비슷하나 자세히 보면 그 모습이 조금씩 다릅니다. 망초에는 큰망초, 애기망초, 실망초, 봄망초, 개망초, 버들개망초, 민망초, 산망초, 뜰망초 등이 있습니다.
개망초꽃/ 김내식
할머니가 호미로 콩밭을 매다
에이- 개 같은 망할 놈의 풀
하시며 밭둑으로 뽑아 던져도
하얗게 나동그라지다가는
웃으며 일어섰다.
같고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한결같다
못 생겨도 있는 그대로
맑은 이슬에 얼굴을 씻고
최선을 다하여 꽃피우는 그 자태
누가 무어라고 욕을 해도
저 홀로 지극정성 아름답다
사람들은 몰라보아도
벌과 나비는 안다
소를 웃긴 꽃/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 마침 꽃이 한 송이 피어올랐다. 간지러움을 느낀 소는 그 꽃을 살리기 위해 순간, 몸을 들어올렸다. 기우뚱하며 쓰러질 뻔한 소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작고 연약한 꽃이 커다랗고 무거운 소를 ‘들어 올렸’다고 표현하는 것은 시인의 재치다. 시인은 “피는 꽃이 소를 웃”기고, 소를 간질이고, “소를 살짝 들어 올”리고, “하마터면,/소가 중심을 잃고/쓰러질 뻔”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소가 뒤뚱거리며 중심을 잡는 모습이 눈 앞에 동영상처럼 펼쳐진다. 이 엉뚱한 상상이 시를 아연 살아나게 한다.
그러나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면 이건 세상을 살짝 비틀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는 시인의 미적 센스만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건장하고 무거운 소나 연약하고 자잘한 꽃, 아니면 자연의 어떤 미물이라도 모두 동등한 가치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 시에는 시인도, 소도, 꽃도 모두 하나의 생명의 그물 속에 있다. 그들은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그 그물의 소유자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우리 역시 그물의 한 가닥일 뿐.
이 시에 표현된 이면도 진실이다. 즉,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밟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잃은 소를 보는 ‘꽃’은 그의 배려에 얼마나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했을까. 그 신사도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이 싱그러운 공생! 이러한 공감 능력과 이타성이 소에게도 꽃에게도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현상을 바로 보는 날카로운 시선도 시에서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과 생물, 모든 생명체들이 조화와 공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은 더욱 중요하다.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와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만연하는 오늘, 인간과 자연, 주체와 세계가 하나로 만나 생명공동체로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감성적인 시 한 편을 읽는 기쁨!
손진은 (시인)
능소화/ 박병식
어이하나
어이하나
여린 내 마음속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불덩어리 품었네
지난 여름 다가도록
뜨거운 땡볕 속
돌 담장에서 초가지붕 위 하늘까지
빨갛게 열정을 불태워도
이루지 못한 사랑
애타는 마음속은
누렇게
누렇게
타들어만 가는데
그리움에 진저리치며
잠 못 이뤄 속앓이 하는
유난히도 달 밝은 밤
요염떠는 능소화
어찌 할까나
어찌할까나
용광로 같은 내 마음속에
시뻘겋게 끓어 오르는
사랑의 불덩어리를 품었네
능소화는 명예, 영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많은 탓으로 독을 품어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능소화
님을 기다리다가 툭 하고 떨어지는 꽃, 단 하나의 사랑. 구중궁궐의 꽃이라는 칭하는 능소화
복숭아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뿐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임금은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내일이라도 오실 것이라 임금님을 기다리던 소화는 그만 상사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대신 덩쿨로 능소화가 피었답니다.
능소화/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되어야지
화무 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되어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되어야지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 피었습니다 /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 피었습니다 /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 피었습니다 /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 노래 : 낙화 -작시. 조지훈 / 작곡, 노래. 지은이(Creator. Jinie) - YouTube
낙화(落花, 落華)/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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