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20 [次頓順命(차돈순명) ~ 七歲立春(칠세입춘)]

efootprint 2022. 9. 22. 13:55

 

次頓順命(차돈순명)
次:버금 차, 頓:조아릴 돈, 順:좇을 순, 命:목숨 명.
어의: <차돈>이 목숨을 바치다. 신라시대 이차돈이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순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쓰인다.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 즉 묵호자(墨胡子)에 의해서였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승려로 아버지는 북위(北魏) 탁발왕(拓跋王) 때 사신으로 왔던 아굴마(阿堀摩)다 그가 고구려에 왔을 때 고구려의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통정하여 아도를 낳았다. 아도가 16세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위나라로 갔는데 아버지 아굴마가 만나주지 않고 도첩을 주어 현창(玄彰) 스님 문하에 들어가 법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소수림왕 4년 19세 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440년 어머니의 권고로 신라에 들어와 선산(善山) 지역 지주(地主) 모례(毛禮)의 집에 은거하면서 신라 최초로 도리사(桃李寺)를 짓고 눌지왕의 딸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쳐 주고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그러나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되어 포교하기 시작한 것은 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 때 이차돈(異次頓.506~527)이 순교한 뒤부터였다.
  이차돈의 본명은 박염촉(朴廉觸)이고 갈문왕(葛文王)의 증손으로 법흥왕의 측근에서 불교를 선양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좀더 넓게 포교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무교(巫敎)에 젖어 반대하고 나섰다. 왕과 이차돈은 불교를 선양하려 했으나 따라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이차돈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왕에게 말했다.
  “신의 죽음으로써 불법이 전파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왕이 대전으로 들어가 신하들에게 불교 포교의 찬성 여부를 물었으나 여전히 반대했다.
  “전하! 그들은 기괴한 옷을 입고 요사스러운 말을 하니 지금 막지 않으면 훗날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이차돈이 다시 나섰다.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평범치 않은 사람이 있어야 평범치 않은 길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그 말을 좇겠습니까?”
  사실 이 불란의 씨는 천경림(天鏡林)이라는 곳에 왕이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고 절을 짓는 데서 비롯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불교를 통해 선진 문화를 수입하고 있어 신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절을 지으면서부터 가뭄과 장마로 농사가 되지 않자 대신들이 요망한 종교를 선봉하기 때문이라고 반대했던 것이다. 왕이 어려운 처지에 있게 되자 이차돈이 모든 공사의 책임을 지고 희생을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법을 위하여 죽거니와 불법이 진실로 숭고한 것이라면 내가 죽은 후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침내 이차돈의 목을 베니 그의 목에서는 과연 놀랍게도 하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꽃비가 내렸다. 이에 반대하던 신하들이 입을 닫았고,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借斧無柄(차부무병)
借:빌릴 차, 斧:도끼 부, 無:없을 무, 柄:자루 병.
어의: 자루 없는 도끼를 빌린다는 말로,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취하기 위하여 퍼뜨린 말이다. 배우자나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할 동지를 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선현위인어록(先賢偉人語錄)

 

  신라의 대승 원효(元曉.617~686)는 제26대 진평왕 39년에 내마(奈馬) 설담날(薛談捺)의 아들로, 압량(押梁. 경산.慶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덕여왕 15년(646) 황룡사(皇龍寺)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후 진덕여왕 4년(650)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당항성(唐項城. 남양.南陽)에 이르러 공동묘지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근처를 손으로 더듬어 잡히는 물을 맛있게 마셨다. 다음 날 밝은 곳에서 보니 그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인간사는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닫고 그냥 되돌아왔다. 즉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극락도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평화와 안정이 극락이요, 마음속의 갈등과 불안이 지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어느 날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누구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시오, 그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이다.(雖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그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효가 너무 지나치게 수행하다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어떻게 만들어?”
  “그러게 말일세.”
  그 소문은 궁궐에까지 전해졌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604~661)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여봐라! 원효대사를 공주가 거처하는 요석궁(瑤石宮)에 모시도록 하여라.”
  신하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비록 과부이긴 하지만 어엿한 공주의 신분인데, 승려를 그녀의 거처에 들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엄한 왕명인지라 그대로 따랐다.
  얼마 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훗날 신라의 대학자가 된 설총(薛聰)이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원효대사의 말뜻을 무열왕은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즉 도끼 구멍과 도기 자루를 남녀의 생식기로 비유한 것이니, 자루 없는 도끼는 임자 없는 여인이란 듯이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이라 함은 동량이 될 탁월한 인물을 말한 것이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신하들은 모두 무열왕의 혜안(慧眼)에 탄복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借蟲攻敵(차충공적)
借:빌릴 차, 蟲:벌레 충, 攻:칠 공, 敵:원수 적.
어의: 벌레의 힘을 빌려 적을 공격하다. 조선 중종 때 수구파 남곤 등이 훈구파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축출하
고자 나뭇잎에 꿀로 글자를 써서 벌레로 하여금 파먹게 하여 이를 핑계로 모반, 정적을 축출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조자적공(造字敵攻)도 같은 뜻이다.
출전: 한국천년인물사(韓國千年人物史)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역 남곤(南袞.1471~1527)은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호는 지족당(知足堂) 또는 지정(止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문명을 펼쳤으며 대제학을 거쳐 1523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 그러나 훈구파(勳舊派)의 수장으로서 정권을 주도하기 위해 죄 없는 박경(朴耕)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죽이고, 그 공으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에 올랐다.
  남곤의 반대파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개혁을 주장하며 젊고 유능한 인재를 모아 신진파(新進派)를 형성했다. 그래서 남곤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남곤 일파는 조광조 등을 몰아내려고 같은 파 홍경주(洪景舟)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대궐 안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들이 꿀을 바른 곳만 갉아 먹게 해서 글자가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을 다서 중종에게 바쳐 조광조를 제거하게 했다. ‘주초는 조(趙)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주초위왕이란 말은 조(趙)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의 급진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종의 듯을 안 훈구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는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이다.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사림파로부터 소외된 남곤파, 공신자격을 박탈당한 심정(沈貞), 조광조의 탄핵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졌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 등이었다.
  이들은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다고 주장하며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중종은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金淨), 김구(金絿), 김식(金湜) 등이 투옥되고 이로 인하여 기묘년에 사화가 발생했다.
  조광조는 유교(儒敎)로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그들의 모략적인 나뭇잎 하나로 인하여 투옥되고 그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남곤은 만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로 인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자신의 저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결국 명종 13년에 관작과 시호를 삭탈(削奪)당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搶職開眼(창직개안)
搶:빼앗을 창, 職:맡을 직, 開:열 개, 眼:눈 안.
어의: 직위를 빼앗아 눈을 뜨게 하다. 즉 높은 직위에 올라 안위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서 그 직위를 빼앗음으로
써 새롭게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출전: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최술(崔述)은 일찍 과부가 된 어머니의 엄격한 가르침과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학문 연구와 글씨 공부에 전념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호조판사 김좌명(金左明.1616~1671)은 그런 최술의 재능을 인정하여 아전으로 삼아 중요한 일을 맡겼다.
  하루는 최술의 어머니가 김좌명을 찾아와 아들을 직위에서 파면해 달라고 요청했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아들의 벼슬을 높여 달라고 해야 옳거늘, 그만두게 해달라니….”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일찍이 지아비를 잃고 모든 희망을 그 아이에게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의 학문이 나날이 진전되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대감께서 그 아이에게 벼슬을 내리시고 중히 써 주시니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오히려 저는 봉록을 받아 쌀밥을 먹게 된 지금보다 겨밥을 먹던 지난날이 더 그립습니다.”
  “왜 그렇소?”
  “저의 아이는 아직 학문이 짧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대감님께서 어여삐 여기셔서 중히 써 주시니까 자기가 당연히 그만한 그릇이 되어서 그런 줄 여기는 모양입니다. 이번에 그 아이가 부잣집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에서 밥상을 받고는 반찬이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음식 투정을 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야 어찌 지난날의 가난이 의미가 있으며, 또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고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아이의 직책을 벗겨 새롭게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김좌명은 부인의 말에 크게 감복하여 최술을 면직시킨 다음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뒤에서 도와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菜羹不忘(채갱불망)
菜:나물 채, 羹:국 갱, 不:아니 불, 忘:잊을 망.
어의: 나물국을 잊지 못하다. 청백리 김장생이 공부할 때 소금으로만 밥을 먹다가 나중에 나물국을 먹으니   맛이 좋아 잊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쓰인 다.
출전: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의 대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본관이 광산(光山)이요,

호는 사계(沙溪)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개장의(改葬儀)>

,<제의정본(祭儀正本)>,<예기기의(禮記記疑)>,<송강행록(松江行錄)> 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예론(禮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潗)에게 계승시켰으며,

조선예학(朝鮮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고 난 다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들의 교육에 전심하여,

 문하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그가 84세로 일생을 마치자 제자 송시열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렸다.
  “사계 선생은 젊을 때부터 한 번도 자기 집 밖에서 여색을 범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황강공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아버지를 다라 평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도사(都事). 감사 밑에 있는 벼슬아치)로 있던 사람이

기생을 시켜서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게 했으나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장생은 엄격한 스승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가 송익필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할 때 스승의 집이 가난하여 간장 하나 없이 소금만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집에 올 일이

 있어 오는 도중에 하인의 집에 들러 나물국을 얻어먹게 되었다. 소금반찬만 먹던 그의 입에는

나물반찬이 어지나 맛이 있었던지 그 나물국을 평생 못 잊어 했다.
  그는 제자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서인(西人)의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더불어 학문의 쌍벽을 이루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柵累造獄(책루조옥)
柵:목책 책, 累:더할 루, 造:만들 조, 獄:감옥 옥.
뜻: 울타리를 자꾸 만들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앉은 자리가 감옥이 된다. 즉 반대파를 배척하기 위하여 외부와 대화를 단절시키면 종래에는 자신이 고립되어 외톨이가 된다는 뜻이다.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살쾡이가 어쩌다 한 나라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그렇게 나라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불안했다. 자기의 힘이 권좌를 누리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손아귀에 들어온 권좌를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뜻을 공포했다.
  “그대들의 뜻이 곧 나의 뜻이요. 나의 뜻이 곧 그대들의 뜻임을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기탄없이 내가 하는 일에 각자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많은 동물들이 살쾡이가 하는 일마다 어쩌니 저쩌니 시비를 걸었다.

불안해진 살쾡이는 급히 늙은 산양을 불렀다.
  “이러다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그러니 불평분자들을 모조리 나라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먼저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법입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한다고 나라 밖으로

하나 둘 몰아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자고로 백성이 성하면 나라도 성하고, 백성이 쇠하면 나라도

쇠한다고 했습니다. 불평을 하는 백성들을 추방하다 보면 마침내 백성도 쇠하고 나라도 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살쾡이는 쓴 입맛을 다시며 여우를 부르자, 여우가 말했다.
  “고을 밖에 사방으로 높게 울타리를 둘러치고 불평을 하는 자들을 그 울타리 밖에서 살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 나라와의 경계에는 망루를 세워 단단히 감시를 하면 이웃 나라로 도망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늙은 산양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렇게 된다면 온 나라 안을 감옥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 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어느 때나 백성들에게는 적고 많고 간에 불평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너그러이 받아 주시는 것이

 바르게 다스리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일에 반대하는 놈들은 바로 나를 업신여기는 놈들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관대하란 말인가?”
  살쾡이는 산양의 말이 못마땅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여우에게 당장에 불평분자들을 가려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살쾡이가 하는 일에 불평을 하던 백성들이 하나하나 가려졌다. 그리고 고을 밖에는

높은 울타리가 사방으로 쳐지고 불평분자들은 울타리 밖으로 모두 쫓겨났다. 늙은 산양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울타리 안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 평온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병아리처럼 순종하던 백성들 사이에서

또 불평의 소리가 수군수군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여우가 아뢰었다.
  “이들도 역시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다면 결국 그 전에 쫓겨난 무리들과 합세하여 불평은 더욱 커지고 후에

더 큰 화근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이놈들은 전번 울타리 안쪽에 또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서 별도로 살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래서 먼젓번 울타리와 새 울타리 밖에는 쫓겨난 백성들이, 그리고 새 울타리 안에는 말없이 순종하는

백성들만 살게 되었다. 그러나 새 울타리 안의 평온도 잠깐일 뿐, 순종하던 백성들 사이에 또 불평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번에도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또 안쪽으로 새로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불평분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자꾸자꾸 울타리를 만들다 보니 살쾡이는 마침내 자기가 거처하는

 바로 밖에까지 울타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늙은 산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불평하는 백성을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 자기가 울타리 속에 갇혀 버렸군.”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處善之勇(처선지용)
處:곳 처, 善:선할 선, 之:어조사 지, 勇용기 용.
뜻: <처선>의 용기라는 말로, 조선 연산군 시절의 내시 김처선의 강직한 행동에서 유래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

     칠 것을 알면서도 불의에 맞서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이르는 말이다.
문헌: 조선오백년야사(朝鮮五百年野史),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조선의 10대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성품이 날로 포악해지고 방탕이 극에 달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직언을 했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번했으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오히려 아첨만 일삼았다.
  환관 김처선(金處善.?~1505)은 나라꼴이 이 지경인데도 아무도 용기있게 나서서 간언(諫言)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이 죽음으로써 바로잡을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입궁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 그리 알라.”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연산군은 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창안한 음란한 놀이 처용희(處容戱)를 벌이고 있었다.
  김처선이 분연한 자세로 연산군에게 말했다.
  “늙은 놈이 지금까지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글도 조금 읽었습니다마는, 고금에 전하와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부디 이성을 찾으시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푸시옵소서!”
  배석했던 대신들은 질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같이 노한 연산군이 김처선을 향해 직접 활을 쏘니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래도 그는 의연하게 말했다.
  “늙은 내시가 어지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용상을 지키시지 못할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더욱 화가 난 연산군은 이번엔 김처선의 다리를 쏘았다. 그가 스러지자 연산군이 소리쳤다.
  “일어나서 걸어라. 어서 걸으란 말이다!”
  김처선은 연산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다닐 수 있습니까?”
  그래도 김처선이 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자 연산군은 그의 다리와 혀를 자르게 하여 죽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가족들까지 참수하고, 그래도 모자라 그의 부모의 무덤까지 파헤치게 했다.
  비록 환관(宦官)이긴 했으나 김처선은 용기 있는 신하(臣下)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處容之哀(처용지애)
處:곳 처, 容:얼굴 용, 之:갈 지, 哀:슬플 애.
 뜻: <처용>의 슬픔이라는 말로, 신라시대에 아내를 역신에게 빼앗긴 <처용>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연인의   

      변심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나라가 평안하여 서라벌 성안 백성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이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엔 항상 피리소리가 흐르고, 기후가지도 사철 온화하여 삶이 매우 순조로웠다.
  어느 날, 헌강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 바닷가로 소풍을 나갔다. 그런데 대낮에 갑자기 바다에서 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니 일관(日官)이 말했다.
  “전하! 이것은 동해의 용(龍)이 무언가 불만이 있어 조화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오니 이를 풀어주는 조치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에 왕이 그 근경에다 절을 짓겠노라고 약속을 하자 날씨가 금방 개었다. 왕은 일행이 머물던 그곳을 구름이 걷힌 곳이라 하여 개운포(開雲浦)라 명명했다.
  약속을 받은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일곱째 아들 처용(處容)을 왕에게 딸려 보내 정사를 보좌케 했다. 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 벼슬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짝지어 주었다. 처용은 밤만 되면 달빛이 밝게 비치는 월명항(月明港)에서 춤추며 놀았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때문에 그녀를 흠모하는 역신들이 사람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찾아와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늦게 돌아와 보니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러자 그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지마는 앗긴 것을 어찌할꼬.

  그러자 역신이 처용의 노래를 듣고 그 너그러움에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다가 오늘 밤 그녀를 범했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참으로 감복하는 바입니다. 맹세하노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만 보아도 그 안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후로부터 사람들은 귀신을 물리치고자 할 때에는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였다.
  헌강왕은 개운포에서 돌아와 곧 영취산 동쪽 기슭에다 절을 세우니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擲橘之情(척귤지정)
擲:던질 척, 橘:귤 귤, 之:어조사 지, 情:뜻 정.
뜻: 귤을 던져 애정을 표시한다는 말로, 고려시대 궁중여인들이 외간 남자를 유혹할 때 귤을 던졌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남몰래 은근히 통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문헌: 고려사최세보전(高麗史崔世輔傳)

 

  고려 제19대 명종(明宗) 때 무관 최세보(崔世輔. ?~1193)는 판이부사(判吏副事)로 있으면서 뇌물을 많이 받아 거부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아들 최비(崔斐)는 동궁(東宮)의 태자를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최비는 외모가 출중하여 그 모습에 반한 태자의 비첩(婢妾)들이 귤을 던져 은근히 유혹하여 마침내 사통하게 되었다.
  당연히 엄중 처단될 일이지만 대장군 이의민(李義珉)이 그를 아껴 왕에게 직접 변호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정을 통한 비첩들에게는 그 죄를 물어 모두 비구니로 만들어 버렸다.
  최비는 여전히 간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궁중의 풍기가 대단히 문란하고, 무신들의 행패가 심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궁중에서 여인이 남자를 유혹할 때는 귤을 던져 주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후일 최충헌(崔忠獻)이 집정(執政)하자 최비를 남방으로 귀양 보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天生配匹(천생배필)
天“하늘 천, 生:날 생, 配;짝 배, 匹:짝 필.
 뜻: 태어날 때 하늘이 정해준 배우자. 조선 선조 때 재상 윤명렬 부부에게서 유래한 말로, 운명적으로 맺어진
부부를 말한다.
문헌: 매산집(梅山集),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때, 윤명렬(尹名烈.1762~1832)은 대단한 추남이었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과거에 합격하였으면서도 정승 채제공(蔡濟恭)의 눈 밖에 나 이름을 삭제당할 정도였다. 실의에 빠진 윤명렬이 어느 날 관상을 보니 관상쟁이가 말했다.
  “당신은 지극히 가난한 궁상(窮相)이니 그냥 가시오.”
  그 자리에는 여러 재상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있어서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분하기도 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뜻밖에도 관상쟁이가 윤명렬의 집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어제는 아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어제 한 말은 전혀 거짓말이고 어른의 상은 어제 내가 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지극히 귀한 사람이 될 상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말하면 다른 대갓집 자제들이 시기를 하여 어른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것이니 널리 이해하십시오.”
  몇 해 후,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싸움이 심하여 청나라 황제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독촉을 받고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보고자(報告者)로 윤명렬을 파견했다.
  그는 청나라에 가서 그 임무를 원만히 마무리 지었고, 그 공으로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다.
  그런데 윤명렬의 부인도 처녀 적에 얼굴이 못생겨서 나이가 먹도록 출가를 못하다가 뒤늦게 윤명렬에게 시집와서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맏아들은 판관(判官), 둘째아들은 목사(牧使), 셋째와 막내아들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윤명렬 자신도 훗날 재상에 이르니 가문이 두루 번창하였다.
  노년에 접어들자 윤명렬이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그 얼굴로 시집갈 길이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얼굴로 장가를 들 수 없었을 것인데, 이제 우리는 등과한 아들 4형제를 둔 훌륭한 부부가 됐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으로 맺어진 천생배필(天生配匹)인가 보오.”
  그는 새삼 감회에 젖어 지난날을 회상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靑紗燈籠(청사등롱)
靑:푸를 청, 紗:깁 사, 燈:등 등, 籠:대그릇 롱.
 뜻: 조선시대에 궁중이나 벼슬아치들이 사용하던 등• 대나무나 쇠살로 둥글거나 사각으로 틀을 만들고 

몸체는  파란 운문사(雲紋紗)로 두른 후 위아래에 붉은 천으로 동을 달아서 만들었다. \인생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풍물기(朝鮮風物記)


  청사등롱은 조선시대 정삼품에서 정이품의 벼슬아치가 밤에 사용하던 등롱이다. 그 모양은 대나무로 둥글게, 또는 사각으로 틀을 만든 후, 푸른 운문사(雲紋紗)로 몸체를 감고, 붉은 천으로 위아래에 동을 달아서 그 안에 촛불 혹은 등불을 밝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등롱의 용도가 전통 혼례에서 신랑(新郞)이 신부(新婦) 집으로 갈 때 앞세우고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우주 만물의 음양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와 함께 집안의 번성을 축복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혼례는 두 집안의 만남임과 동시에 하늘이 점지해 준 천생연분을 맞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한 집안의 잔치이자 마을의 잔치이기도 하였다.
  또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 또는 ‘장가든다.’고 하는데 이는 혼례식을 여자의 집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또 장가가는 날 신랑이 백마(白馬)에서 내려 신부 집에 들어설 때 얼굴의 하반부를 가리는 파란 부채나, 신부가 초례청(醮禮廳)에 나올 때 수모(手母: 신부를 시중드는 여자)가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붉은 부채는 신랑 신부가 총각 처녀라는 표시이고, 부채를 거두는 것은 동정(童貞)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혼례식을 올리고 신랑이 신부 집에서 3일 밤을 보낸 후 비로소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시집간다.’고 한다.
  청사초롱에서 홍색은 발전과 번영으로 양의 기운을 뜻하고, 청색은 포용과 탄생으로 음의 기운을 상징한다. 청사초롱에 밝히는 촛불은 축원, 제사, 고사 등 정성을 드리는 의례에 사용되는 불빛이다. 그래서 촛불은 어둠을 밝힘은 물론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여 신성을 일깨우게 한다고 전한다.
  그래서 초는 성체이고 불꽃은 신성을 의미한다. 또 붉은색과 청색은 우리나라의 태극기의 홍색과 청색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역학(易學)에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본체(本体)라고 한다.
  어쨌든 청사초롱 불 밝히는 날은 좋은 날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草繩爲決(초승위결)
草:풀 초, 繩:줄 승, 爲:할 위, 決:맺을 결.
뜻: 새끼줄이 결정하다. 즉 새끼줄의 상태에 따라 일이 결정된다는 말로 두 머슴에게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결정함에는 그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어느 마을에 두 젊은이가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다. 둘은 집안이 가난해서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넛마을 대감댁에서 머슴 두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곧장 찾아가서 자기들을 써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너희 둘이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보아하니 힘든 일을 해보지 않은 것 같은데 할 수 있겠느냐?”
  “예. 대감마님. 농사일이라면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또 머리를 써서 효율적으로 하는 명석함이 아니겠습니까?”
  대감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좋다. 그런데 얼마 동안이나 내 집에 있을 생각이냐?”
  “예, 삼 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여 새경을 모을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그날부터 성실하게 일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익힌 터라 어떠한 일이든 척척 해냈다. 힘겨운 일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대감은 마음이 흐뭇했다.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받은 새경으로 얼마간의 땅을 마련한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그들이 떠날 때가 되자 대감은 몹시 섭섭했다.
  “여보게들, 몇 년 만 더 있어 주게. 내 새경을 두 배로 올려 줌세.”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니 이제 돌아가서 부모님을 봉양하며 살까 합니다.”
  기특한 그들의 말에 대감도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떠나야지. 그동안 일을 열심히 해주어서 고맙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오늘 저녁에 가는 새끼를 한 다발씩만 꼬아 주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시원하게 대답을 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기랄! 떠나가는 날까지 일을 시킬 게 뭐람.”
  “하지만 대감님의 마지막 부탁인데 모른 척해서야 되겠나?”
  “하고 싶으면 너나 해. 나는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까.”
  한 사람은 나가고 남은 젊은이는 혼자서 부지런히 새끼를 꼬았다.
  한편, 밤이 깊어서야 돌아온 젊은이는 친구가 꼬아 놓은 새끼를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새끼를 꼬기 시작했으나 졸립기도 하고 성의가 없다 보니 새끼가 되는 대로 울퉁불퉁 꼬아졌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각각 자기가 꼰 새끼줄을 가지고 대감에게로 갔다.
  “대감마님, 말씀하신 새끼줄을 여기 가져왔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떠나도 되겠지요?”
  “그래, 수고들 했네. 떠나는 날까지 내 청을 들어주었으니 그 대가로 선물을 주고 싶네. 그 새끼를 들고 나를 따라오게.”
  대감은 두 사람을 광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자네 두 사람이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에 나는 더 큰 부자가 되었네. 자, 보게나.”
  그러고 보니 그곳에는 엽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자, 여기 있는 엽전들을 자네들이 꼰 그 새끼줄에 꿸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꿰어 가지고 가게.”
  너무 뜻밖의 말이라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들 하고 있나? 어서 엽전을 꿰지 않고…….”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엽전을 새끼줄에 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끼줄을 가늘고 고르게 잘 꼰 젊은이는 엽전을 많이 꿸 수 있었으나, 굵고 거칠게 꼰 젊은이는 도무지 꿸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일했던 젊은이는 제대로 된 새끼줄 덕분에 엽전을 많이 꿰어 와 부자가 되고, 게으름을 피운 젊은이는 엽전 몇 닢만을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라는 말처럼 처음과 끝이 같을 때 아름다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追鷄之犬(추계지견)
追:따를 추, 鷄:닭 계, 之:어조사 지, 犬:개 견.
뜻: 닭을 쫓는 개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의 낭패감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한국문화상징사전(韓國文化象徵辭典)
 

새벽을 알리는 닭은 빛의 도래를 예고하고,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생활하는 태양의 새이다. 그래서 닭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이행하는 우주적 질서를 예고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황이란 닭이 머리를 고고하게 쳐드는데서 유래했고, 지황이란 날개를 가지고 퍼덕거리는 데서 유래했으며, 인황은 꼬리를 치켜세우면서 크게 우는 데서 유래했다. 그래서 닭을 신성조(神聖鳥)로 치기도 한다.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닭에게 황소가 말을 건넸다.
  “나는 허구한 날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먹는 것은 겨우 콩 껍질 아니면 짚 나부랭이인데 너는 온종일 하는 일도 없이 놀면서 맛있는 곡식만 먹으니 참으로 부럽구나.”
  황소의 이야기를 듣고 닭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 너는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힘든 일을 해도 먹는 게 변변찮은 거야. 나는 학문이 깊어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일을 안 하고도 좋은 곡식만 먹는 거란다.”
  옆에서 보고 있던 개가 끼어들었다.
  “닭, 이 고얀 녀석아.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함부로 하는 거냐? 황소는 그렇다 치고 나만 해도 밤잠을 자지 않고 도둑을 지켜 주는 대가로 겨우 버리는 밥이나 얻어먹는데, 뭐? 네가 학문이 깊어서 좋은 쌀을 먹는다고?”
  개의 질타에 닭이 다시 거만하게 말했다.
  “무슨 섭섭한 말씀! 나는 이렇게 좋은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 붉은 관을 썼으니 벼슬한 양반이 분명하잖아.”
  “흥! 잘도 끌어댄다.”
  “너희들은 멍청해서 모르겠지만 내가 먼동이 터 올 때마다 ‘꼬끼요’ 하고 우는 것도 다 뜻이 있는 거란 말이야. 한자로 쓰면 고할 고(告)자와 그 기(其)자, 중요 요(要)자, 즉 ‘고기요’이니, 이는 중요한 것을 알린다는 뜻이란 말이야. 생각해 봐! 개, 네가 짖는 소리엔 아무런 뜻도 없잖아?”
  닭은 한껏 뽐내며 말을 이었다.
  화가 난 개는 분을 참지 못해 닭에게 달려들어 볏을 물어뜯어 버렸다. 그러자 닭이 홱 뿌리치고 지붕으로 올라가 개를 내려다보며 놀렸다.
  “이 녀석아, 여기는 올라올 수 없지?”
  개는 닭을 놓치고 씩씩거리며 지붕만 쳐다보고 있었다.
  닭의 볏이 톱니처럼 된 것은 이때 개에게 물렸기 때문이고, 이렇게 해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抽卒倒首(추졸도수)
抽;뺄 추, 卒:군사 졸, 倒:쓰러질 도, 首:머리 수.
 뜻: 부하들을 빼내 그 대장을 쓰러지게 하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던 송립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기둥을 빼내 집이 무너지게 하는 것처럼 어떤 일을 타개하는 결정적 전략을 뜻한다.
문헌: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무관 송립(宋岦)은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다.
  그의 나이 1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립의 아버지는 의병이 되어 왜군과 사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때문에 송립은 집안을 이끌어 가느라 나이 30이 넘어 광해군 8년 때서야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성격이 대담하고 두뇌가 명석해서 급제하자마자 대번에 이괄(李适) 장군의 마음에 들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후 평안병사가 되자 송립을 데리고 임지로 갔다. 그때 벌써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던 이괄은 임지에 도착하자 송립에게 말했다.
  “송 군관, 당장 자산 고을로 가서 군량미를 모아 주게, 필요하면 강권을 써도 좋네.”
  이괄의 속뜻을 모르는 송립은 그의 지시대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에 이괄의 반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군인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로 자원해서 이괄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그러자 송립의 숨은 뜻을 모르는 이괄은 매우 좋아하며 말했다.
  “송 군관, 고맙소. 후일 거사가 성사되면 그대를 크게 중용하겠소. 지시한 군량은 어찌 되었소?”
  “네, 명령하신 대로 자산 고을에 모아 두었습니다.”
  “잘했소. 앞으로 송 군관을 절대 신임하겠소.”
  이괄은 새삼스럽게 송립의 손까지 잡으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장병 3천을 줄 테니 선봉장이 되어 관군을 격파해 주시오.”
  그렇게 해서 이괄의 신임을 얻은 송립은 되도록 많은 군사를 배정 받은 후, 그 군사들을 모두 거느리고 탈출함으로써 이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송립은 난을 평정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 후, 송립은 병자호란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 벼슬이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畜心同人(축심동인)
畜:짐승 축, 心:마음 심, 同:같을 동, 人:사람 인.
뜻: 동물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과 같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권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 지봉유설(芝峰類說)

 

  고려 말기에서 조선 세종(世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문신 황희(黃喜.1363~1452)는 본관이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庬村)이며, 시호는 익성(翼城)으로 영의정을 18년간이나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후덕하고 생활 또한 청렴했다.
  그가 젊었을 때, 하루는 누런 소와 검은 소 두 마리로 논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었다.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가까이 와서 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짐승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만약 잘하고 못 한다는 평을 직접 듣는다면 잘한다는 말을 들은 소는 기뻐하겠지만 못 한다는 말을 들은 소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황희는 짐승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농부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여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忠不避死(충불피사)
忠:충성 충, 不:아니 불, 避:피할 피, 死:죽을 사.
뜻: 충절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다. 선조 때의 충신 고종후의 삼부자가 왜적을 무찌르려다 모두 순절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충성이 대단한 것을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고종후(高從厚.1554~1593)는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사람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큰아들이다.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나이가 60이 넘어 노쇠한 고경명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나는 누구보다도 나라의 녹을 많이 먹은 사람이니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그래서 의병을 모집하여 주상(主上)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말 속에는 분연한 기개가 넘쳤다. 고종후가 말했다.
  “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아들 인후(因厚)도 따라나섰다.
  “형님, 저도 아버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고경명은 친구 유팽로(柳彭老)와 협동하여 천 명이 넘는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잘 훈련되고 신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라 갑자기 편성된 의병과는 전력 차이가 심했다. 그래서 아버지 고경명과 동생 인후를 비롯하여 많은 병사들이 죽고 말았다.
  고종후는 스스로 나서서 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길을 바꾸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부대가 하동에 이르렀을 때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진주성(晋州城)으로 갔다.
  그들이 진주성에 들어간 날은 성이 왜군에게 포위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 최선을 대해 싸웠으나 장수 황진(黃進), 김준민(金俊民), 정상윤 등이 속속 죽어 가자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진주목사마저 도망쳐 버려 왜병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고종후는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어서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는 훗날, 나라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바친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衝意突厄(충의돌액)
衝:부딪칠 충, 意:뜻 의, 突:나타날 돌, 厄:재앙 액.
뜻: 의견이 충돌하면 뜻하지 않은 재앙이 돌발한다는 말로,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한다는 뜻.
문헌; 유달순한담(劉達順閑談)

 

  홀어머니를 모시고 옹기(甕器) 장사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심성(心性)이 착하여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모셨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입맛이 없다며 진지를 드시지 않았다.
  청년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고기를 사 드리기 위해서 옹기그릇을 지게에 지고 시장으로 팔러 나섰다.
  그가 산 중턱에 올라 옹기 지게를 세워놓고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지게를 넘어뜨려 옹기그릇들이 다 깨지고 말았다.
  상심한 청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생각 끝에 고을 원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저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옹기장사를 하는데 오늘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옹기그릇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식사도 드시지 못한 채 저만 기다리시는 어머니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오니 좋은 방도를 좀 강구해 주십시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원님이 이방을 불러 말했다.
  “여봐라, 지금 부둣가로 나가서 남쪽으로 가려는 배 주인과 북쪽으로 가려는 배 주인을 찾아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두 선주가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 오자 원님이 물었다.
  “너는 언제 북쪽으로 떠나려고 하느냐?”
  “예, 남풍이 불기만 하면 떠날 겁니다.”
  “그래? 그럼 지금까지 물 하고 있었느냐?”
  “어서 남풍이 불어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원님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가려던 배 주인을 향해 물었다.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느냐?”
  “예, 북풍이 불기만을 기도드리고 있었습지요.”
  원님은 두 배의 주인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불호령을 내렸다.
  “너희 둘이 서로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 하고 빌고 있으니 바람이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뱅뱅 돌다가 회오리바람이 되어 여기 이 사람의 지게를 넘어뜨려 옹기그릇이 모조리 깨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너희 둘의 죄가 적지 않으니 벌을 받겠느냐, 아니면 옹기그릇 값을 내놓고 가겠느냐?”
  원님의 불호령에 놀란 선주들은 옹기그릇 값을 내놓고 도망치듯 가 버렸다. 원님은 청년에게 옹기그릇 값을 주면서 말했다.
  “네 효성이 지극하도다. 어서 가서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해서 청년은 고기를 사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七朔偉人(칠삭위인)
七:일곱 칠, 朔:달 삭, 偉:훌륭할 위, 人:사람 인.
뜻: 일곱 달 만에 태어난 큰 인물이라는 말로, 한명회에게서 유래했다. 태어날 때에는 부족해도 나중에 잘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문헌: 추강냉화(秋江冷話),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 제7대 세조(世祖)에서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누렸던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호는 압구정(鴨鷗亭)이며,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그는 칠삭둥이로 태어났으나 일등공신을 네 번, 영의정을 두 번,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의 부친)를 두 번이나 지내는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는 안을 수도 없는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가 부모까지 일찍 여의어 늙은 여종이 돌봐 길렀는데 뜻밖에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 후 영통사(靈通寺)라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 동안 권남(權擥.1416~1465)과 막역지우로 사귀며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세조(世祖)로 등극하자 우승지(右承旨)가 되어 단종 복위 운동을 저지했다. 그 공로로 도승지(都承旨), 이조, 병조판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이어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453년에 단종(端宗)이 폐위될 때는 김종서(金宗瑞),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을 참형하게 한 후, 일등공신이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尹妃)의 폐위에 가담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어 목을 베는 극형)를 당했다가 훗날 다시 복원되었다.
  지금 서울 강남구의 압구정동이라는 이름은 그곳에 있었던 그의 별장, 압구정자에서 유래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七歲立春(칠세입춘)
七:일곱 칠, 歲:해 세, 立:설 립, 春:봄 춘.
뜻: 일곱 살에 입춘방을 쓰다. 즉,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한다는 뜻. 글씨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서 유래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로서 역대 명필들의 글씨 중 장점을 모아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 즉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그는 벼슬을 이조참판까지 지냈고, 학문연구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유난히 호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추사(秋史), 완당(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써서 일곱 살 때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입춘방을 써 붙였다. 그런데 마침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그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는 사이가 좋지 못한데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노경은 의외인지라 놀라 물었다.
  “대감이 어인 일이십니까?”
  “아, 대문에 붙어 있는 글씨가 너무 좋아 누가 썼는지 궁금해서 들렸소이다. 대체 누구의 글씨입니까?”
  김노경이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하자 채제공이 말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크게 될 것이오. 그러나 글씨의 대가가 되면 운명이 순조롭지 않을 터, 그러므로 글씨 공부는 그만두고 글공부에 힘스는 것이 좋은 것이오.”
  그러나 그의 글씨 공부는 멈추지 않았고, 글공부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나중에 김정희는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는 역경을 겪었다.
  그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막역하게 사귀면서 그들의 필체를 연구, 그들의 장점을 모아 자기만의 독특한 서체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글씨는 패기가 충천하며 필력이 힘차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일가를 이루었다.
  예서(隸書), 행서(行書) 외에 모든 서체에 뛰어났지만 그 중 예서와 행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내외의 격찬을 받았으며, 조선 후기의 서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채제공의 말대로 글씨 탓이었는지 그의 일생은 순탄치 못했다. 벼슬도 이조참판에 그쳤고, 자손 또한 없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