佩鈴自戒(패령자계)
佩:찰 패, 鈴:방울 령, 自:스스로 자, 戒:경계할 계.
어의;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의 단점을 경계하다. 즉 일일삼성(一日三省)이나 삼사일언(三思一言)과 같이 행동을 진중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4대 선조 때 좌찬성을 지낸 이상의(李尙毅.1566~1624)는 본관이 여흥(驪興)이고, 호는 소릉(少陵) 또는 오호(五湖)이다.
그는 글씨를 잘 썼지만 어렸을 때에는 성질이 경솔하여 한곳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팔랑개비 같았다. 거기다가 말을 함부로 하여 부모에게 걱정을 많이 끼쳤다. 그래서 어른들로부터 꾸지람 듣기가 예사였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새롭게 결심했다.
“이제부터 작은 방울을 몸에 차고 다니면서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각오를 되새기며 행동을 삼갔다. 경솔한 버릇을 매일 한 가지씩 줄여 나가리라.”
그는 결심한 대로 패령자계(佩鈴自戒)하여 중년이 되어서는 행동이 진중하고 여유로워졌다. 그렇게 자신의 단점을 고쳤기 때문에 마침내 좌찬성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浿不許非(패불허비)
浿:대동강(강이름) 패, 不:아닐 불, 許:허락할 허, 非:그를 비.
뜻: 대동강은 비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평안감사 김종수에게서 유래한 말로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한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22대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수(金鍾秀.1728~1799)는 본관이 청풍(淸風)이요, 호는 몽오(夢梧)이다.
그가 평안감사로 있다가 한양으로 전근하게 되자 여러 고을 원들이 모여서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었다.
술이 몇 잔 돌아가자 기생들의 풍악에 신명이 난 그는 담뱃불로 뱃전을 두들기며 적벽가를 부르다가 실수로 담뱃대를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서 감사로 2년 있는 동안 오직 이 담뱃대가 유일한 공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떠나려 하니 대동강의 신령이 이것마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구나!”
그는 그만큼 청렴결백한 공직자였다.
국사사전에서는 그를 처세에 능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호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鞭造家運(편조가운)
鞭:회초리 편, 造:만들 조, 家:집 가, 運:운세 운.
뜻: 회초리가 그 집안의 운세를 만든다. 즉 가정교육이 엄격해야 집안의 흥성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문헌: 문곡집(文谷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6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洪瑞鳳.1572~1645)의 어머니 유씨는 어렸을 적에 오빠가 공부하는 어깨 너머로 글을 배워 아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여자가 글을 잘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눌려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혼 후 일찍 남편을 여윈 유씨는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자 친히 책을 펴놓고 가르쳤다. 그 지도 방법은 매우 엄격하여 아들이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회초리로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때리며 가르쳤다.
“네가 공부를 못하거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너에게 아비 없이 자란 아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너는 불행히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그처럼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으로 크는 것을 이 어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고는 피 묻은 회초리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이 회초리가 장차 우리 집안의 흥망을 좌우할 것이다. 여기에는 너의 피뿐 아니라 이 어미의 눈물까지 묻어 있음을 명심해라. 나중에 커서 이 회초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유씨는 또 아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면 외간 남자를 대하듯 아들과의 사이에 병풍을 쳤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미는 아버지처럼 아이를 대할 때 엄격할 수 없답니다. 어미이기 때문에 아이가 글을 날 읽으면 나도 모르게 기쁜 빛을 띠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에게 자만심을 길러 줄 염려가 있으므로 내 얼굴을 못 보도록 가리는 것입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捕山沠鷹(포산조응)
捕:잡을 포, 山:뫼 산, 沠움킬(흐를) 조, 鷹:매 응.
뜻: 산을 체포하여 매를 잡다. 어떤 일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그보다 상위의 일을 해결하면 된다는 뜻
이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여담천리(餘談千里)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1691~1756)가 전라도를 순시할 때의 일이었다. 그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해도 뉘엿뉘엿하고, 배도 고파서 하룻밤을 묵을 겸 한 서당(書堂)에 들렀다. 훈장은 마침 자리에 없고, 글 읽는 학동(學童)들만 있었다. 박문수는 난감해져 혼자 중얼거렸다.
“하룻밤 머물 수 있을까 하여 찾아왔는데 어른들이 안 계시는구나. 해는 지고 어떻게 하지?”
그러자 한 학동이 말했다.
“아이구 손님, 사랑채도 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그럼 그렇게 할까!”
박문수는 못 이기는 척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때는 마침 유월 여름이라 서당의 아이들은 문을 열어 놓고 개구리 울 듯 책을 읽다가 한 아이가 말했다.
“이제 글을 많이 읽었으니 그만 쉬도록 하자.”
그 말에 아이들은 모두 책을 집어던지고는 마당으로 나가더니 한 아이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수령과 감사 놀이를 하자.”
그러더니 그 아이는 대뜸 짚으로 만든 멍석에 양반다리로 앉아 놀이를 주도해 나갔다.
“나는 원님이니까 여기에 앉는다.”
그러자 한 아이가 원님을 시험한다며 말했다.
“저기 노는 까마귀들 중 어느 놈이 수놈인지요?”
“으음! 날아오를 때 먼저 날기 시작하는 놈이 수놈이요. 뒤따라가는 놈이 암놈이니라.”
박문수가 신통하게 생각하며 듣고 있으니 이제는 송사를 벌이겠다고 하였다. 한 아이가 덥석 엎드리더니 말했다.
“제가 매를 잡아서 그 매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매가 갑자기 산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찾아주십시오.”
박문수는 산으로 날아간 매를 어떻게 잡아 줄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러나 원님은 명쾌하게 판결을 내렸다.
“그럼 산이 매를 가져간 거로구먼.
매는 청산의 소유물이어서. (鷹者靑山之物.응자청산지물)
청산에서 얻고 청산에서 잃어버렸구나.(得於靑山 失於靑山.득어청산 실어청산)
그러니 청산에게 물어보고(問於靑山.문어청산)
청산이 대답을 않거든 청산을 잡아오너라.(靑山不答捕來.청산부답포래)
당시에는 고소를 하게 되면 고소인이 상대방을 직접 데려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매를 찾고 싶으면 산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재치 있는 판결에 박문수는 크게 탄복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抱腰投江(포요투강)
抱:안을 포, 腰:허리 요, 投:던질 투, 江:강 강.
뜻: 허리를 붙잡고 강물에 뛰어들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논개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자신을 희생시켜 대의를 이루는 행동을 의미한다.
문헌: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 진주의 관기 논개(論介.?~1592)는 성은 주(朱)씨이고, 장수(長水) 출신이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애첩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진주 남강가의 촉석루(矗石樓)에서 축하연을 열자 그녀는 자원하여 참석, 만취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가 왜장을 끌어안고 투강했던 그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하고, 그 옆에 비석과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또 그의 고향 장수에는 정문(旌門)을 세워 그를 기리게 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논개를 찬양하여 이렇게 읊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람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한용운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그녀의 묘비 앞에 바쳤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 아니라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있는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살육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던 일인 병사들을 본 논개는 ‘오냐, 너희들의 수장을 죽여주마.’ 결심하고 몸치장을 한 뒤 소복단장을 하고 진주성을 점령하고 축배를 들고 있는 남강으로 가 왜장 모곡촌(毛谷村)의 손길이 닿자 그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조국을 사랑하는 불타는 정신으로 장렬히 투신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風梳雨沐(풍소우목)
風:바람 풍, 梳:빗 소, 雨:비 우, 沐:목욕할 목.
뜻: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목욕한다. 장수가 싸움터에 나가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생사의 운명을 같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신라의 화랑 김흠운(金歆運)은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의 8대손이며, 아버지는 잡찬(迊湌) 달복(達福)이었다. 그가 화랑이 되기 전 소년 시절에 문노(文努)문하에서 학문을 익힐 때였다.
“전장에 나가 용감히 싸우다가 그 이름을 역사에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한다.”
스승 문노의 말에 흠운이 굳게 결심했다.
“나도 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이 되리라.”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년,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침범하자 왕은 흠운을 낭당(郎幢)의 대감으로 삼아 출전시켰다. 그는 전장에서 편히 잘 수가 없어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목욕하며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이르러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하니 백제군사가 밤을 틈타 쳐들어와 아군이 혼란에 빠졌다.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그때 대사 전지(詮知)가 권했다.
“지금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으니, 공이 비록 죽는다 해도 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공은 신라의 귀골이고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에게는 자랑이지만 우리에게는 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흠운이 말했다.
“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면 그 죽음을 다른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 명예에만 연연하겠는가?”
그가 곧게 서서 음직이지 않자 시중드는 사람이 말고삐를 당기며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뽑아들고 적진으로 들어가 여러 명을 죽이고 끝내 자신도 죽었다. 그때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전사했다. 그러자 소기당주 보용나(寶用那)는 흠운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말했다.
“그는 지체가 높고 권세가 있는데도 나라를 위해 죽었다. 하물며 나는 살아도 이익 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이 없다.”
하며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그도 죽었다.
훗날 태종무열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一吉湌)의 벼슬을 추증하고,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내마(大柰麻) 벼슬을 추증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들을 애도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彼曲我直(피곡아직)
彼:저 피, 曲:굽을 곡, 我:나 아, 直:곧을 직.
뜻: 굽은 것은 상대 쪽이고 나는 곧다. 즉 잘못은 저쪽에 있고 나는 한 치의 잘못도 없이 정직하다는 뜻.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김유신(金庾信)이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있을 때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술과 풍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자 주민들이 그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백성이 오랫동안 안정된 생활을 하는 터라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면 훌륭히 해낼 만한 여력이 있는데, 군주가 게을러 놀기만 하면 어찌하자는 것인가?”
유신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건의했다.
“민심을 살펴보니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의욕이 대단합니다. 하오니 지금 백제를 쳐서 지난번 대량주(大梁州) 싸움의 패배를 보복하게 해주십시오.”
“장군의 의욕은 충분히 이해하오. 그런데 수적으로 적은 군사를 데리고 성공할 수 있겠소?”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의 동향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은 한뜻으로 뭉쳐 생사를 같이할 만하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유신의 설명을 들은 왕이 허락했다.
유신이 병사를 뽑아 충분히 훈련시켜 대량성을 공격하니 백제군사가 대항해 왔다. 유신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고 옥문곡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백제는 신라군을 업신여긴 나머지 생각 없이 밀고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신라군이 백제장수 8명을 사로잡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으로 사람을 보내 말했다.
“우리의 군주 품석(品釋)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지금 너희나라에 묻혀 있다. 이제 너희 장수 8명이 우리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애걸하니, 여우와 범 같은 짐승도 죽을 때면 머리를 제 굴 쪽으로 두는 뜻을 이해하는지라 그들을 차마 죽일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 너희 나라 땅에 묻혀 있는 두 사람의 유해와 맞바꾸면 어떻겠는가?”
그러자 백제의 좌평 중상(仲商)이 이 말을 왕에게 보고했다.
“신라인의 유해를 여기에 두어봐야 무익하니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저들이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고 정직은 우리에게 있으니 명분도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백제에서 먼저 품석 부부의 유해를 독에 넣어 보냈다.
그를 받은 유신이 말했다.
“나뭇잎 하나 따낸다고 해서 무성한 숲이 손상될 리 없고, 티끌 하나 더하였다 해서 태산이 높아질 리 없다. 하니 약속대로 그 장수들을 돌려보내주어라. 처음부터 잘못은 저들에게 있었고,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니 나의 마음을 반드시 알리라.”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必隨師言(필수사언)
必:반드시 필, 隨:따를 수, 師:스승 사, 言:말씀 언.
뜻: 스승의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선조 때의 명신 이항복에게서 유래한 말로, 스승의 권위를 강조한 말이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와 제15대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로 호종(扈從)하고, 왕비는 개성으로, 두 왕자는 평양으로 피신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명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중책을 맡아 무난히 처리했다. 그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더불어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었다.
그는 각종 관직을 거쳐 나중에 영의정이 되고, 1604년 48세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奉)되어 줄곧 국정을 맡아오다가 1617년 폐모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북청(北靑)에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해에 복권이 되었으며, 평소 대단히 검소해서 청백리로 지정되었다.
어느 날, 청지기가 아뢰는 말에 항복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뭐? 스승님께서 오셨다고?”
그는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놀랐다.
“아니, 저 어른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정승인데, 누가 왔기에 저리도 어려워하며 맞이하실까? 상감마마께서 납시는 것은 아니겠고 대단한 분께서 오시는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우리도 나가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항복은 초라한 모습의 노인 한 분을 모시고 들어오더니 자기 자리에 모셔놓고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음, 잘 있었소이다.”
“스승님, 말씀을 놓으십시오.”
“아니, 상감 다음으로 큰 어른인데 일개 백성이 어찌 말을 함부로 하겠소?”
“지난날 제가 철부지 아이였을 때 스승님께서 글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처럼 불러주십시오.”
“그때는 개구쟁이였으나 지금은 정승이지 않소.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저의 스승님이십니다. 그리고 모처럼 오셨으니 하룻밤 유(留)하고 가십시오.”
“허허! 야인인 내가 관사(官舍)에서 잠을 자다니…….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훌륭한 제자를 두니까 내가 출세를 한 것 같구만!”
이튿날 항복은 관사로 선생님을 찾아가서 면포(綿布) 십여 단과 쌀 두 섬을 노자로 드렸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허허, 이것은 노자라기에는 너무 많아. 노자라면 이보다 훨씬 적어야 하네.”
“아닙니다. 그냥 받아 주십시오.”
“아닐세! 명분이 노자라면 노자일 뿐이야. 더구나 이것은 나라의 재산이 아닌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 봉록에서 드리는 사용(私用)입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자네에게 필요할 터인데 어찌 옛날 스승의 몫이 따로 있겠는가? 여러 말 할 것 없네. 쌀 두어 말만 있으면 넉넉하네. 그래야 내가 지고 가기도 좋고……. 피차 부담이 안 되는 것이 좋아. 자, 나 가네.”
“아이구, 스승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로는 스승님이라고 하면서 나의 뜻을 거역할 것인가? 제자라면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안 그런가?”
그 말에 이항복은 아무 말도 못하고 스승의 말에 따랐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何生何死(하생하사)
何:어찌 하, 生:날 생, 死:죽을 사.
어의: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신라의 고승 원효에게서 유래한 말로, 인간의 생사에 대해서 자문자답하는 말이다. 인간 삶의 허무함을 빗대어 쓰인다.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元曉.617~686)는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39년(617년) 때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押梁.상주)에서 내마(柰麻) 벼슬에 있던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설(薛)씨이고, 아명은 서당(誓幢)이며, 원효는 법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 청소년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화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서당의 어머니는 서당을 낳기 전날 밤 별 하나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압량의 북쪽 제단에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다가 밤나무 밑에서 서당을 낳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때문에 서당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서당은 체격도 당당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인물도 좋아 모두들 장차 큰일을 해낼 거라고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죽음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인생문제에 골몰했다.
서당이 화랑으로 뽑혔을 때 가족들은 설씨 집안에 경사 났다며 잔치까지 베풀어 축하를 해주었지만 자신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을, 뭇 때문에 으뜸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좀 더 많이 알고자 밤을 새워 글을 읽는 것일까? 나도 그렇다. 내가 화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들보다 나은 게 뭐 있다고 떠받침을 받으며 우월감을 갖는가?’
서당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 때마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 엎디어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한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왔다.
“젊은이, 보아하니 화랑인 듯한데, 그 무덤 속에 누가 묻혔소?”
“네, 제 어머니입니다.”
노승은 말소리를 죽여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젊은이는 그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다고 믿나?”
“예. 그렇습니다.”
“어허, 안타깝도다. 어머니는 거기에 계시지 않네.”
“그렇다면 어디에 계십니까?”
“그걸 알려면 우선 불교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네. 인간이 죽고 사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어머니가 계신 곳을 알게 될 걸세.”
서당은 늘 품어왔던 의문을 풀 수 있다니 귀가 번쩍 띄었다.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어머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됩니까?”
“물론이지, 어머니가 계신 곳뿐만 아니라 만날 수도 있지.”
“네? 그게 진정입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불교에 제 몸을 맡기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서당은 자기 발로 황룡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원효란 법명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恨無二蛙(한무이와)
恨:한탄할 한, 無:없을 무, 二:두 이, 蛙:개구리 와.
어의: 개구리 두 마리가 없는 것이 한이다. 즉 뇌물로 줄 물품이 없어 한스럽다는 말로 부패함을 꾸짖는 말이다.
출전: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방과.1357~1419)가 나중에 보위에 오르니 바로 2대 정종이다. 정종은 어진 정치를 펴기 위해 자주 대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특히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들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종이 하루는 평복을 입고 성 밖의 한 동네를 지나다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싸리문에 붙어 있는 ‘오한평생무이와(吾恨平生無二蛙)’라는 글씨를 보았다. 정종은 옆에 있는 신하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인고?”
“글자대로 새겨 보면 ‘내 한평생 개구리 두 마리가 없는 것이 한이로다.’ 라는 뜻이온데, 그 속에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하옵니다.”
두 사람이 문 앞에서 서성이자 한 늙은이가 나와 물었다.
“뉘신지요?”
“지나가는 과객인데 잠시 쉬어 가도 괜찮겠소?”
“예! 마루 위로 오르시지요.”
정종은 마루 위에 올라 집주인과 마주앉자 먼저 말을 꺼냈다.
“주인장, 저 싸리문에 붙여놓은 글이 무슨 뜻이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 생각대로 써놓은 것입니다.”
“그래도 무슨 뜻이 있는 듯한데, 말해 보시오!”
정종이 재차 되묻자 늙은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꾀꼬리, 뻐꾸기, 따오기가 논두렁에서 만났습니다. 이들은 서로 제 목소리가 제일이라고 자랑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부엉이에게 판결을 해달라고 부탁했지요. 다음 날, 따오기는 논고랑에서 개구리 두 마리를 잡아서 부엉이에게 갖다 주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판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엉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 들어보고 ‘꾀꼬리는 소리가 좋긴 하지만 간사한 여자 목소리 같고, 뻐꾸기도 소리는 좋지만 너무 구슬프고, 따오기는 소리가 거세긴 해도대장부 소리 같아서 제일이다.’ 하고 판결했답니다.”
정종은 그제야 집주인이 가난해서 벼슬을 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벼슬을 주고 싶어서 말했다.
“주인장, 우리는 지금 과거 보러가는 길인데 함께 가지 않겠소?”
“가봐야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들러리만 서게 될 테니 헛일이지요. 당신들도 돈이 없으면 아예 가지 마시오!”
“그런 것은 우리가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고 함께 갑시다.”
집주인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런데 과거를 본다고 해서 가보니 시제가 기이하게도 ‘개구리 와(蛙)’자가 나왔다. 집주인은 일필휘지로 ‘오한평생무이와(吾恨平生無二蛙)’라고 써서 제출했다. 그가 장원급제를 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평생의 소원을 성취했고, 정사를 잘 보살펴서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恨比辱强(한비욕강)
恨:한할 한, 比:견줄 비, 辱:욕될 욕, 强:힘쓸 강.
어의: 원한 보다 욕이 낫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원한을 사는 것보다 화풀이로 하는 욕설을 듣는 것이 차
라리 낫다는 뜻. 남에게 원한이 될 일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출전: 지장집략(誌狀輯略).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퇴궐하는데 어염집 아녀자가 아무 예도 갖추지 아니하고 이항복의 앞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무엄하도다. 감히 정승영감 행차이신데 앞을 가로질러 가느냐?”
수행하던 하인들이 그 여인을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여인은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으며 하인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인들은 여인을 거칠게 길 밖으로 내몰고 다시 가마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한 이항복은 하인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집에 오는 길에 길 가던 여인을 내동댕이친 것은 너희들의 큰 잘못이다. 아무리 예의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조용히 말하여 비켜서게 할 것이지, 어지 힘없는 아녀자를 다치게 하였느냐?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여라.”
그런데 뒤쫓아온 여인이 대문 앞에서 악을 썼다.
“머리 허연 늙은이가 하인들을 시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어서 나와 나를 치료하거라, 도대체 당신들이 뭐길래 힘 없는 백성에게 이렇게 주먹질을 한단 말이냐?”
한낱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정승을 모욕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대감님. 잡아다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하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항복을 쳐다보았다.
“대감님.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잡아다가 …….”
“조용히 하고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여라.”
이항복은 하인들을 물리치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이 이항복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도대체 누구한테 저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겁니까?”
“머리 허연 늙은이가 나밖에 더 있소?”
“그럼 당장 잡아들이지 왜 그냥 두십니까?”
이항복은 잔잔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내가 잘못했으니 욕설을 듣는 것은 당연하오, 저 여인은 가슴에 맺힌 화를 저렇게라도 풀어야 나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대감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원한을 사는 것보다 잠시 욕을 먹는 것이 훨씬 낫지요.”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항복의 너그러운 인품에 고개를 숙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海東孔子(해동공자)
海:바다 해, 東:동녘 동, 孔:심히 공, 子:아들 자.
어의: 고려시대 문인 최충의 별호로서, 문장과 학문을 비롯하여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을 이른다.
출전: 해동공자최충소고(海東孔子崔沖小考)
고려 제11대 문종(文宗) 때 사람, 최충(崔沖. 984~1068)은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해주(海州)로, 현종(顯宗), 덕종(德宗), 문종(文宗) 삼대에 걸쳐 벼슬에 올랐으며 의결기관의 최고 수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추앙되었는데 1047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는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또 1050년에는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흉년에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기도 했으며, 퇴임한 후에는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우매한 백성들을 교육하고자 학당을 여니 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학도들을 위해 새로 아홉 개의 글방을 더 지으니, 이는 각각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 불렸다.
당시의 일반적인 교육은 문학 방면에만 중심을 두어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만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구재학당은 그런 폐단에서 벗어나 여러 방면의 인격을 닦는 데 힘썼다. 그러니까 인격도야라는 확실한 교육 목표를 가지고 교육을 했던 것이다.
또한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에는 조용한 절방을 빌려서 공부를 시켰다. 때로는 고관이나 유명한 선비들을 초청하여, 초에다 금을 긋고 그곳까지 촛불이 타는 사이에 시를 읊도록 하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구재학당은 날로 번창하여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이 인품도 훌륭하고,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숫자도 많아지자 유학자(儒學者)들도 다투어 그와 같은 사숙(私塾.글방)을 차렸다. 그러니까 사숙은 일종의 사립 학교였고, 사숙을 차린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거나 학문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사숙은 전국적으로 11개소나 되었으며, 사학을 12공도(公徒)라 불렀는데, 그 중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리는 최충의 학당이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했다. 12공도는 나중에 유학 중심의 단체가 되어 안향(安珦)에게 계승되었고, 안향은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여 학문발달과 인격 도야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반하여 공립 교육기관인 관학은 매우 부진하였다. 국가 시책에 따라 불교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마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거란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아 교육기관이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최충의 이러한 시도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는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다음까지도 인기가 이어져 문헌공도는 날로 번창하였다. <고려사>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학교는 최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충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그를 기려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解髮携琴(해발휴금)
解:풀 해, 髮:터럭 발, 携:끌 휴, 琴:거문고 금.
어의: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껴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자 그를 비관하여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끼고 산으로 들어간 물계자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세상 일의 허무함을 한탄하는 의미로 쓰인다.
출전: 삼국사기 열전 제8 물계자
신라 제 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195~230) 때 장군 내음(㮈音)의 수하에 물계자(勿稽子)라는 군사가 있었다. 그는 인품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커서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당시 팔포상국(八浦上國)들이 연합하여 아라국(阿羅國. 가락국,김해)을 점령하려 하자 아라국에서는 신라로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사금이 손자 내음을 시켜 물계자와 함께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8국의 군사를 물리치게 했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내음은 그의 공로를 밝힐 경우 자신의 공적이 깎일 것을 염려하여 그의 공을 품신하지 않았다. 그러자 물계자의 친구가 물계자에게 말했다.
“자네는 공이 막대했는데 인정해주지 않으니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데 물계자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가 취할 바가 아니네, 다만 뜻을 이룸에 힘쓰며 뒷날의 때를 기약함이 장부가 취할 바일 것이네.”
3년 후, 또다시 골포(骨浦. 창원),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등 3국 사람들이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해 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물리쳤다. 물계자는 이 싸움에서도 수십여 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으나 포상할 때 또 빠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신하의 도리는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전일 포상과 갈화의 어려운 싸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이를 어찌 최선을 다했다 하겠으며 무슨 면목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겠소?”
인간사의 허무함을 느낀 그는 머리를 풀고 거문고 하나만을 들고 사체산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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