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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사성어3[求官不擢(구관불탁)~騎虎之勢(기호지세)]

efootprint 2022. 9. 21. 20:58

 

求官不擢(구관불탁)
求:구할 구, 官:벼슬 관, 不:아닐 불, 擢:뽑을 탁.
어의: 벼슬을 억지로 구하는 사람은 뽑지 않는다는 듯이다. 벼슬을 사사로이 청탁하는 사람에게는 주려던 벼슬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헌: 조선인물고(朝鮮人物考),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조선 명종(明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후백(李後白1520~1578)은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호는 청련(靑蓮)으로 인사관리를 공평무사하게 했던 청백리였다.
  그에게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 한 자리를 은근히 청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관리로 채용하려고 작성해둔 명단에 올려져 있었다. 이후백은 그 명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시게! 나는 그대의 이름을 이렇게 적어 두고, 장차 순서대로 채용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염치없이 벼슬을 달라는 말을 하니 만약 그대에게 벼슬을 먼저 준다면 이는 공평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깝게 되었네, 그대가 벼슬을 청탁하지 아니했다면 벼슬을 하게 되었을 텐데…….”
  벼슬자리를 부탁한 친척은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그는 사람을 관직에 임명할 때에는 여러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인품과 능력이 어떤지 먼저 알아보고 만약 합당하지 못하다는 여론이면 단호하게 배제했다.
  청련은 특별히 명종의 신임을 얻어 부모를 모시면서 공부하라는 사가독서(賜暇讀書. 나라에서 특별히 휴가를 주어 공부하도록 배려하는 제도) 특혜를 받게 되었으며, 그 후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과 대제학을 역임했다.
  그는 함안(咸安)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공(文靑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垢面守節(구면수절)
垢:때 구, 面:얼굴 면, 守:지킬 수, 節:절개 절.
어의; 때가 낀 얼굴로 수절을 하다. 즉 일부러 몸을 더럽게 꾸며 뭇 남자들의 접근을 피함으로써 정절을 지킨 한 기생에게서 유래한 말로 절개가 굳은 여인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조선 영조(英祖) 때 좌의정 조문명(趙文命.1680~1732)은 본관이 풍양(豊壤)이고 호는 학암(鶴巖),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풍채와 인물이 뛰어났었다.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안주(安州)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그 고을의 원과 함께 백상루(百祥樓)에서 술을 마시는데 그 자리에 겨우 열두 살인 어린 기생이 있었다. 그는 그 기생을 귀여워했고, 그 기생도 그를 따랐다. 연회가 끝나고 두 사람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따로 만나서 정담을 나누던 중에 그가 손가락으로 기둥에 성숙한 여체를 그려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가 너무 어린 것이 안타깝구나, 네 몸이 이렇게만 되었다면 우리가 오늘 밤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선물로 부채 하나를 주었다.
  몇 해 후, 그가 또다시 안주를 지나다가 백상루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날 밤,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소인의 누이동생이 이 부채를 대감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부채를 보니 낯익은 부채인데 시가 한 수 쓰여 있었다.
 
   안주 한 번 떠난 뒤엔 소식이 없어 서러워라 (安陵一別黯消魂.안릉일별암소혼)
   기둥에 그렸던 그림 어이 차마 잊으리오. (忍忘當時畵柱恩.인망당시화주은)
   고운 상자 속에 부채를 간직하고 (摩挲篋裏扇猶在.마사협리선유재)
   가을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물을 짓네. (半是秋風半淚痕.반시추풍반루흔)

  그는 몇 해 전의 귀여웠던 어린 기생을 생각해내고 가상하여 안부를 물었다.
  “네, 소인의 누이동생은 이 부채를 받은 후 영원히 수절할 것을 맹세하고, 오직 시를 짓고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 절개가 어찌나 강한지 관가의 지시에도 꺾이지 않고 지금까지 처녀로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급히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만난 그녀의 미모는 그대로 잃지 않고 있었으나, 머리에 빗질도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로 남루한 차림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녀가 말했다.
  “기생의 몸이다 보니 뭇 남정네들이 업신여겨 넘보는지라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더럽게 하고 지냈습니다.”
  참으로 애절하고도 감동적인 대답이었다.
  그는 그녀와 격정의 밤을 지내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서 일생을 행복하게 해로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鳩首會議(구수회의)
鳩:비둘기 구, 首:머리 수, 會:모일 회, 議:의논할 의.
어의: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다. 즉 여러 사람이 모여 진지하게 의논하는 것을 이른다.
문헌: 고사성어 대사전

 

  비둘기 구(鳩)자는 새 조(鳥)자와 아홉 구(九)자를 결합해서 만들어진 글자다. ‘구(九)’가 붙은 까닭은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구’거리면서 울기 때문에 그 음을 따온 것으로 상형문자(象形文字)이다.
  비둘기는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사는 습성이 있다. 비슷한 말 중에 구합(鳩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규합(糾合)의 뜻으로도 쓰인다.
  비둘기는 그렇게 떼 지어 살면서도 서로 다투거나 무리지어 먹이를 독차지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평화를 상징하고 원앙(鴛鴦)과 함께 금슬 좋은 부부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 구민(鳩民)이라는 말은 중국 고전<춘추좌전>에 나오는데 이는 백성들이 비둘기처럼 편안하게 모여 사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서로 돕고 아끼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구주(鳩酒)하면 독주(毒酒)를 가리키기도 한다.
  비둘기는 머리를 쪼아 먹을 때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 알씩 콕콕 쪼아 먹는다. 이것을 멀리서 보면 마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구수회의란 말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비둘기는 서로 싸우지 않아 우정이나 공존을 뜻하기도 하지만 암수의 사이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새는 둥지를 짓지 못하고 다른 새가 지어 놓은 둥지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 이런 비둘기의 습성을 따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행세하는 것을 구거작소(鳩居鵲巢. 비둘기가 까치 둥지에서 삶)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 집을 말할 때도 겸손한 뜻으로 구거(鳩居)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널리 쓰는 말은 아니다. 허나 윗사람에게 겸손을 나타낼 때 비둘기 집처럼 누추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九容(구용)
九:아홉 구, 容:얼굴 용.
어의; 아홉 얼굴, 즉 심신 수양에 필요한 아홉 가지 태도와 몸가짐을 일컫는 말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과 비
슷한 뜻이다.
문헌: <격몽요결(擊蒙要訣) 지신장持身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쓴 <격몽요결(擊蒙要訣) 지신장(持身章)>에 나오는 구용은 ①족용중(足容重). ②수용공(手容恭). ③목용단(目容端). ④구용지(口容止). ⑤성용정(聲容靜). ⑥두용직(頭容直). ⑦기용숙(氣容肅). ⑧입용덕(立容德). ⑨색용장(色容莊) 등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이는 군자가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①족용중(足容重)은 걸을 때에는 발걸음을 무겁게 해서 경망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고, ②수용공(手容恭)은 손은 공손하게 두어 태만하고 게으른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며, ③목용단(目容端)은 눈의 움직임을 단정하게 해 곁눈질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④구용지는(口容止) 입게 굳게 다물어 언행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고, ⑤성용정(聲容靜)이란 재채기나 기침을 삼가서 주변을 고요하게 조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⑥두용직(頭容直)이란 머리는 곧게 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며, ⑦기용숙(氣容肅)이란 숨소리를 점잖고 엄숙하며 맑게 해야 한다는 뜻이고, ⑧입용덕(立容德)이란 서 있을 때의 자세는 중심을 똑바로 잡고 의젓하게 하면서 덕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⑨색용장(色容莊)이란 표정은 씩씩하고 근엄하되 인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아홉 가지 행위를 말한다.
  이 책은 1577년(선조10년) 학문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10장으로 편찬했으며,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입지(立志)에서는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목표로 하여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으며, 제2장 혁구습(革舊習)에서는 학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게을리 하지 말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모방하지 말고, 안일한 것에 얽매이지 말 것 등 구체적 조항 8개를 들고 있다.
  제3장 지신(持身)에서는 몸을 바르게 지키는 방도를 제시하여 뜻을 어지럽히지 말고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제4장 독서(讀書)는 독서가 도(道)에 들어가기 위한 궁리의 전제가 되어야 하며, 단정한 자세로 깊이 정독할 것을 가르치고, 독서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제5장 사친(事親. 어버이를 섬김)에서는 부모 섬기기를 비롯하여 부모의 뜻이 의리에 어긋날 때에는 자식이 부드럽게 아뢰어 뜻을 바꾸게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제6장 돌아가신 분에 대한 상제(喪制)와 제7장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제례(祭禮)에는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할 것과 반드시 사당을 갖추라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제8장 거가(居家)에는 부부간의 예를 비롯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가산을 관리하는 방법이 예시되어 있으며, 제9장 접인(接人)에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양이 기록되어 있으며, 10장 처세(處世)에는 과거를 거쳐 벼슬 생활을 하는 목민관이 백성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학문에 뜻을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몸을 바로 세우고, 성리학(性理學)의 근본이념을 일상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까지 설명하고 있다. 또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데 이기(理氣)철학이 바탕이 되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효(孝)가 사회 질서의 근본이념임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선비, 즉 사족(士族)들이 사회를 주도하던 조선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지침서다.
  그러나 사회 운영의 철학과 질서가 크게 바뀐 현대에는 그 내용들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내용 하나하나에는 연구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친필본인 이이(李珥) 수필(手筆)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보물 제6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具存方言(구존방언)
具:갖출 구, 存:있을 존, 方:모 방, 言:말씀 언.
어의: 방언을 그대로 둔다는 말로, 자기 나라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제2대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남해왕(南解王, 남해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함)의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그의 비는 운제부인(雲梯夫人. 혹은 운제. 지금 영일의 서쪽 운제산에 모셔져 있는데 가뭄에 기우제를 올리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인 갑신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 노례왕(弩禮王)과 함께 삼황(三皇)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 중의 첫째로 꼽힌다.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 또는 마립간(麻立干)이라 일컬었는데, 진한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귀인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며,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인생의 운명을 점쳐 주는 까닭으로 무당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므로 촌장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잇금, 즉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남해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노례(弩禮 = 儒理王)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치)의 수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떡을 물어 이의 개수를 확인했더니 노례가 많아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했는데 이는 잇금이 변이된 말이다. 노례가 매부 탈해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아름다운 미덕을 보여준 예이다.
  신라 왕으로서 거서간, 또는 차차웅으로 불린 사람은 각각 한 사람이고, 이사금이라 불린 사람은 열여섯, 마립간이라 불린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신라 말기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 경주 최씨의 시조)은 제왕 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으면서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였던지 거서간으로 말하지 않고, 모왕(某王)이라고만 기술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할 때는 구존방언(具存方言), 즉 당시 쓰던 말을 그대로 살려 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참고로 추봉(追封)된 왕은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왕의 생부나 장인 등의 근친에게 주던 봉작(封爵)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九遷十葬(구천십장)
九:아홉 구, 遷:옮길 천, 十:열 십, 葬:장사지낼 장.
어의: 묘지를 아홉 번 옮기어 열 번 장사 지낸다 말로, 무슨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운이 닿아야 이루어짐을 비
유한 말이다.
문헌: 조야집요(朝野集要)

 

  조선 명종(明宗) 때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으로, 역학(易學), 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법(相法)에 이르기까지 두루 박식한 학자였다.
  그는 예언을 정확하게 잘하여 10년 뒤에 일어날 동서분당과, 30~40년 뒤에 일어날 임진왜란까지도 예언하였다.
  그가 젊어서 말을 타고 울진 불영사(佛影寺)로 가는데 길에서 만난 한 스님이 자기도 태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타고 가다가 부용봉(芙蓉峯)에 올라 큰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면서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스님이 갑자기 외마디 고함을 지르고는 보이지 않더니 한참 만에 나타나 말했다.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왜 무섭습니까?”
  “어허. 그렇다면 가르칠만한 인재로군.”
  스님은 남사고에게 책 한 권 주면서 당부했다.
  “그대는 선택받은 사람이니 이 책을 가지고 꼭 힘써 배우도록 하시오.”
  말을 남긴 스님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는 그길로 동굴로 들어가 현묘한 술법에 통달하여 유명한 지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좋은 터를 잡아 장사를 치르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좋은 땅이 못되었다. 그래서 이장을 하고, 또 살펴보니 역시 자리가 안 좋아 또다시 이장했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하다가 마침내 명당을 찾아냈다.
  “용이 날아서 하늘에 오르는 지형이다.”
  그는 기뻐하면서 이장을 했다. 그런데 봉분을 쌓는 일꾼들의 노래가 괴이했다.
  “아홉 번 이장하여 열 번째 장사하는 남사고야,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터를 두고 용이 날아서 하늘로 오르는 지형이라니 웬 말이냐?”
  그는 놀라서 다시 산세를 살펴보니 과연 일꾼들의 노래가 옳았다. 그래서 급히 그 노래를 한 일꾼들을 찾았으나 온데간데없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운명은 잘 알면서 왜 자신의 운명은 모르고 헛일만 거듭합니까?”
  그는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동기가 사적인 욕심으로 차 있으면 보는 눈이 도리어 어두워지기 때문 아니겠나!”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國運隨王(국운수왕)
國:나라 국, 運:돌 운, 隨:따를 수, 王:임금 왕.
어의: 나라의 운은 임금을 따른다. 고구려 광개토왕에게서 유래한 말로, 나라의 흥성은 통치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은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5년에 고국양왕(故國壤王. ?~391)의 아들로 태어나 드넓은 만주 땅에 나라를 세워 동북 지역에서는 가장 큰 국가를 만들었다.
  그 영토는 중국의 북쪽 송화강에서 동쪽의 요하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되기 전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호랑이를 활로 쏘아 잡을 만큼 용맹스러웠다. 12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고, 18세 때(319년) 왕위에 올랐다.
  담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는 중국 전연(前燕)의 침략을 받곤 했다. 한번은 연나라의 왕 모용성(慕容盛)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국내성에 쳐들어와 궁궐을 불태우고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갔다. 또 왕의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 백성 5만여 명을 잡아갔다.
  그러자 고국원왕은 343년에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하여 조공(朝貢)하고,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왔으며, 355년에 다시 조공하고 어머니도 모셔왔다. 뼈에 사무치는 회한이었지만 힘이 부족한 고구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고국원왕 41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는데, 이때 고국원왕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담덕의 아버지 고국양왕은 중국의 후연(後燕)이 고구려를 넘보자 군사를 일으켜 먼저 후연으로 쳐들어가 요동을 점령했다. 담덕이 태자가 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385년 11월, 고구려는 후연의 반격을 받아 요동성에서 싸우다가 후퇴하였다. 이때 고국양왕이 담덕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담덕아, 너는 반드시 아버지가 당한 이 수치를 씻어야 한다.”
  “예. 아버지 말씀대로 고구려인의 용맹스러움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담덕은 열심히 무술을 닦는 한편으로 병법도 같이 연구했다.
  392년 5월,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담덕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위상을 만방에 선포했다. 그리고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어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으며, 나라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의 문을 넓혀 교육에도 힘썼다.
  392년 7월에는 4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석현(石峴), 관미성(關彌城) 등 백제의 성 10여 곳을 점령하고, 9월에는 거란(契丹)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잡혀가 있던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귀국시켰다.
  그해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주요 요새를 모두 빼앗은 후 새롭게 일곱 개 성을 쌓았다. 이어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방을 괴롭히는 비려국(碑麗國)을 점령했다.
  이 무렵, 백제에서는 진사왕(辰斯王. ?~392)이 물러나고 아신왕(阿莘王.?~405)이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백제를 점령하고자 수군을 앞세워 한강을 넘어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했다. 그러자 백제의 아신왕은 크게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스스로 항복했다.
  광개토왕은 아신왕을 살려 주고, 대신 그의 동생을 포함해 10여 명을 볼모로 데리고 고구려로 돌아왔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의 58개 성을 점령했다.
  한편, 아신왕은 왕자 전지(晪支)를 일본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광개토왕은 그런 정황을 알고 대비를 하고 있는데 신라에서 사신이 왔다.
  “대왕마마, 원병을 보내어 저희 나라를 침범한 왜구를 무찔러 주십시오.”
  광개토왕은 즉각 기병 등 군사 5만 명을 신라에 보냈고, 소식을 들은 왜구들은 곧바로 달아나 버렸다.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군이 왜군을 퇴각시켰다는 말을 듣고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광개토왕이 남쪽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후연의 모용희(慕容熙)가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북방 요새인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점령했다.
  광개토왕은 이를 계기로 북방 정벌을 계획하고 6만 명의 대군을 밤낮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402년, 드디어 요하(遼河)를 건너 숙군성(宿軍城)으로 진군하였다. 숙군성에는 후연의 장수 모용희가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양쪽 군사가 맞붙어 싸운 결과 모용희는 패하여 북문으로 달아났다.
  숙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연의 다른 성주들은 겁을 먹고 달아나 고구려군은 효동성까지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이어서 광개토왕이 고구려 북쪽의 동부여(東扶餘)도 정벌하기로 하자 그 소식을 들은 동부여의 왕은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항복했다.
  동부여를 정벌한 광개토왕은 내친김에 숙신족(肅愼族)까지 정벌하기로 했다. 그래서 얼음이 언 목단강을 건너 적진 속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부상을 입은 숙신족장은 광개토왕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너희는 전에도 우리나라를 괴롭힌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광개토왕은 족장을 죽이지 않고 타일렀다. 이로써 광개토왕은 북쪽으로 동부여, 북부여를 정복하고 송화강 유역의 비려국(碑麗國)과 식신(息愼), 숙진(肅眞)까지 점령하여 시베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광개토왕은 북쪽의 송화강에서 동쪽의 요하(遼河)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40세인 414년에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왕자 거련(巨連)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20대 장수왕(長壽王)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國祖檀君(국조단군)
國:나라 국, 祖:조상 조, 檀:박달나무 단, 君:임금 군.
어의: 우리나라를 세운 시조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군왕검이 아버지 환웅의 도움으로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이 조선이 바로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다.
문헌: 삼국유사

 

  중국 북위(北魏)의 정사(正史) <위서(魏書)>와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기원전2333년, 천제(天帝) 환인(桓因.제석천왕.帝釋天王)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가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태백(太伯)을 내려다보니 과연 인간이 살아갈 만한 곳이므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묘향산) 신단수(神壇樹) 밑으로 내려오니 그곳을 일어 신시(神市)라 하였다. 그는 풍백(風伯.바람), 우사(雨師.비), 운사(雲師.구름)를 거느리고 곡(穀.농업), 명(命.생명), 병(病.질병), 형(刑.형벌), 선악(善惡.도덕) 등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하니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함 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벡 일 동안만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자 곰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말대로 시행하여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호랑이는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굴 밖으로 뛰쳐나가 햇빛을 보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곰,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날마다 신단수(神壇樹) 밑에서 아기 갖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군(檀君. 일명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때는 요(堯) 임금 50년이었다. 이후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므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옮기고, 거기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
  건국신화는 천지가 개벽한 후 음양이 생기고, 그 속에서 사람과 삼라만상이 발생하였으며, 하늘로부터 통치할 사람이 내려와 국가를 건설하고 다스린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 숭배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대중화되었으며, 조선조 세종은 평양에 사당을 짓고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단군(檀君)을 함께 모시고 국조(國祖)로 받들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단군교와 대종교가 생겨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國重比父(국중비부)
國:나라 국, 重:중할 중, 比:견줄 비, 父:아비 부.
어의: 나라가 아버지보다 더 중하다. 즉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부모보다 나라를 중히 여겨야 한다는 충
절을 강조한 말이다.
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의 충신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본관이 여산(礪山)이고, 호는 천곡(泉谷)인데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도 존경할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현감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 태어나 10여 세에 경사(經史)를 읽었으며, 벼슬길에 올라서는 질정관(質正官. 특정의 사안에 대하여 질의하거나 해명, 학습을 담당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동래부사로 있었는데,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포위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함께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켰다. 그러나 불행히 정발이 적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니 전세가 불리해져 성을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옆에서 분전하고 있는 신여로(申汝櫓)에게 말했다.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책임자로서 마땅히 이 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지만 그대에게는 노모가 계시니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있거라.”
  전황이 악화되어 왜적이 성을 넘어 들어오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북쪽을 향하여 큰 절을 올리고 난 다음 아들에게 주는 유언을 시로 남겼다.
      

       원병이 끊겨 성은 외롭고, 중천에 든 달에는 달무리가 졌구나.
       군사의 진을 줄지어놓고 베개를 높이 베고 생각에 잠겼노라.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엇보다 중하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은혜는 그것보다는 가볍도다.

 

  그리고 나서 밀려오는 적을 맞아 분투하다가 적병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는 끝가지 싸우다가 전사한 그의 충절과 감투정신에 왜장 히라요시(平義智.평의지)도 감동하여 그의 시신을 동문 밖에 장사지내고 ‘충절 송상현의 무덤(忠節 宋象賢之墓)’이라는 비명과 함께 시를 지어 바치고 장례식을 지내 주었다고 한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君子而騙(군자이편)
君:임금 군, 子:아들 자, 而:그리하여 이, 騙:속일 편.
어의: 점잖은 사람(군자)이기 때문에 속는다는 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속는다는 뜻이다. 즉 순수하기
때문에 남에게 이용 당하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동정하는 말이다.
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 제19대 숙종 때 조태채(趙泰采. 1660~1722)는 호가 이우당(二憂堂)이었으며, 우의정을 지냈다.
  그가 부인 심(沈)씨를 잃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하급직의 서리 한 명이 근무 시간에 늦게 출근하여 벌로 볼기를 때리려 하자 울면서 호소했다.
  “소인은 잘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사정 말씀이나 드리고 벌을 받아도 받겠습니다. 소인은 상처를 하여 어린 것 셋을 데리고 있사온데 큰 놈이 다섯 살, 다음이 세 살, 끝이 딸년으로 난 지 여섯 달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아비 겸 어미 역할을 하며 키우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 어린 것이 울고 보채어 이웃집 아주머니께 젖을 좀 먹여 달라고 부탁하고 나니 나머지 두 놈이 또 배고프다 울기에 죽을 끓여 먹여 주고 오느라 이렇게 되었사오니 그저 죽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조 정승은 눈물을 지으며 동정했다.
  “네 처지가 정녕 나와 같구나.”
  그런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보니 그 하급 서리의 행위는 모두 매맞는 것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상관의 정에 호소하여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태채 정승은 노론(老論)의 네 대신 중 한 사람으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지만 천성이 워낙 착해서 이처럼 하급직 서리에게도 속을 정도였다. 그는 나중에 소론(少論)에 의해 세력이 밀리자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후에 소론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權心常守(권심상수)
權:권세 권, 心:마음 심, 常:항상 상, 守:지킬 수.
어의: 권력자의 마음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 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권
력자는 항상 권력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동물 나라에서 호랑이 임금이 노경에 접어들자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옥좌를 더듬다가 불현 듯 자기의 권좌를 노리는 자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급히 산속의 짐승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많은 짐승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심을 받자옵고 황급히 달려왔사옵니다. 무슨 긴한 분부라도?”
  호랑이 임금은 위엄을 갖추고 한번 둘러본 다음
  “빠진 자가 없으렷다?”
  하고 물었다. 표범의 얼굴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여우가 말했다.
  “표범 어르신께 전갈을 했으나 출타 중이라 아직 대령치 못했사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심히 불쾌한 듯 입속에서 큰 숨을 한번 죽인 다음 입을 열었다.
  “짐이 그대들의 도움을 받아 권좌에 오른 후 참으로 긴 세월이 흘러갔다. 이 긴 세월 동안 짐이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짐을 보좌한 노고 때문이라는 것을 짐은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짐도 노경에 접어들고 보니 하루하루 기력은 쇠약해지고,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 또한 흐려져 예전과 같지 못하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보다 강력하고 총명한 후계자를 골라 이 권좌를 물려주려고 한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여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금님의 그 깊으신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부디 그 결심을 거두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제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찌 자기의 노쇠함을 탓하여 나라와 백성을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오니 그 뜻을 거두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늙은 산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은 늘 그대의 깊은 경륜을 높이 사오고 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뜻도 같은 줄로 아뢰옵니다.”
  호랑이 임금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늙은 산양은 호랑이 임금이 여우의 말을 듣는 순간 입가에 흘린 웃음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는 늦게 당도한 표범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늘 마음속 깊이 그대를 후계자로 점찍어 왔었다. 자,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송하옵니다.”
  표범은 일단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당당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자기를 알고 모르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영광이 다하기 전에 자리를 물러나면 길이 영광을 누릴 수 있으나, 영광이 다한 연후에 물러나면 남는 것은 회오와 모멸뿐이라 하였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모두가 짐의 듯을 거두도록 만류하는데 그대만이 그렇지 않으니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랑이 임금은 표범을 한 입에 물어 쓰러뜨리고 나서 한탄하듯 말했다.
  “짐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짐은 이보다 더 슬플 수가 없구나! 바라건대 앞으로는 짐이 또다시 이런 슬픈 일을 겪지 않도록 하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金頭麗臣(금두려신)
金:쇠 금, 頭:머리 두, 麗:빛날 려, 臣:신하 신.
어의: 금으로 된 머리의 고려 신하라는 말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이 주군 왕건을 위하여 목이 잘린 고사에
서 유래했다. 목숨을 바칠 정도의 충절을 의미한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고려의 충신 신숭겸(申崇謙.?~927)의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었으며, 시호는 장절(壯節)로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이다.
  918년,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패악무도를 일삼자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의 집에 모여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결의를 했다.
  신숭겸이 왕건에게 말했다.
  “폭군의 폐위는 대세이자 천명(天命)입니다. 그러니 하(夏)나라의 걸(桀)과 주(周)나라의 주(紂)와 같은 궁예 왕을 폐위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왕건이 주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오, 그런데 비록 왕이 난폭하다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로 어찌 두 마음을 가지겠소?”
  그러자 좌우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피폐한 백성들의 원성 또한 하늘을 찌르는데 장군께서 이를 외면하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 됩니다. 또 하늘이 주는 운(運)을 제때에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됩니다. 대세의 좋은 기운은 만나기 어려운 법,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모인 사람들이 이번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자 왕건은 할 수 없이 허락했다. 고려의 개국 위업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개국이 완성되고 평화롭던 어느 날, 신숭겸이 태조(太祖) 왕건을 따라 평주(平山)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 있겠는가?”
  신숭겸이 나서서 말했다.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힐까요?”
  그러자 태조가 신숭겸에게 말했다.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보시오.”
  신숭겸이 즉시 활시위를 당기자 날아가던 세 번째 기러기가 땅에 떨어졌다. 확인해 보니 과연 왼쪽 날개를 맞고 떨어져 있었다.
  태조는 신숭겸의 활 솜씨에 감탄하고 근처 땅 300결(結)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도록 하고, 본관(本貫)을 평산(平山)으로 지정해주었다. 사람들은 그 땅을 궁위(弓位)라고 불렀다.
  태조 10년, 서기 927년에 태조는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졍기(精騎)5천 명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치고자 공산(公山)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접한 견훤(甄萱)은 야음을 틈타 고려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신숭겸이 태조에게 말했다.
  “제가 대왕의 용모와 비슷하니 대왕으로 변장하여 어차를 타고 출전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틈을 이용하여 탈출하십시오.”
  그리하여 태조 왕건은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탈출하고,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출전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견훤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군사를 몰아 사로잡아 놓고 보니 복장만 왕의 것이었을 뿐 왕건이 아니었다. 견훤은 속은 것에 대해 화가 났지만 한편 신숭겸의 행동을 가상하게 여겨 말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충성심이 장하구나,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사지로 뛰어들다니……, 그러나 너는 나를 속인 적의 장수이니 어찌하겠느냐,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견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숭겸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견훤이 말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시신이나마 돌아가게 해주어라!”
  그리하여 신숭겸의 머리를 그가 타고 있던 말에 매달아 쫓으니 말은 태안사(泰安寺)로 달려가 절 앞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주지 스님이 놀라 나와 보니 신숭겸 장군의 두상인지라 양지바른 곳에 안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왕건은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금으로 그 머리를 만들어 붙인 후 시신과 함께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사찰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야말로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위주현명(위주현명)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氣過必禍(기과필화)
氣:기운 기, 過:지나칠 과, 必:반드시 필, 禍:재앙 화.
어의: 기가 지나치면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말로, 조광조의 어머니가 남곤의 어렸을 적 지나친 기세를 보고 그
의 성정을 예측한 데에서 유래했다. 너그럽고 온화한 성품을 장려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象)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남곤(南袞.1471~1527)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부터 1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총명과 슬기는 스승을 늘 흐뭇하게 하였다.
  그들이 과거를 눈앞에 두고 학문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으로 가는 길에는 예쁜 처녀 아이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조광조는 그 처녀들을 보는 순간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마음은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시선은 줄곧 처녀들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앞으로 해야 할 공부가 많고, 어머니 말씀대로 나라의 동량이 되어야 할 텐데…….”
  조광조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선 안 되지, 장차 어쩌려고…….’
  조광조가 마음고생으로 뒤처져 걷는 동안 남곤은 저만치 앞서서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조광조는 걸음을 빨리 하여 남곤을 따라갔다.
  ‘역시 남곤은 나보다 낫구나. 난 아직도 수양이 부족한 거야.’
  집으로 돌아온 조광조는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아들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가 말하였다.
  “애야.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네 나이 때에 처녀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까 그건 잘못이 아니다. 네 또래의 사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란다.”
  “어머니,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간 남곤은 처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이 걸어갔습니다.”
  “음, 그랬어?”
  “예, 어머니. 남곤은 확실히 저와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밤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사를 가야겠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이사라니요?”
  “아무 말 말고 조용히 이삿짐을 싸도록 해라.”
  조광조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결정에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에 따라 짐을 꾸려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 이렇게 야반도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얘야, 사람은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예쁜 처녀가 옆을 지나가면 너 같은 총각이 눈길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남곤은 자기 감정을 숨기고 목석처럼 행동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얼마나 차디찬 사람인지 알 수 있겠다. 사람은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란다. 엄격함과 꼿꼿함만 가지고는 너그럽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엄히 다스려야 할 때도 있지만, 너그러이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앞으로 남곤은 여러 사람을 피 흘리게 할 것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참으로 냉혹한 사람이야.”
  조광조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훗날, 남곤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실제로 칼날처럼 냉엄한 정치를 했다. 그는 훈구파(勳舊派)의 선봉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집권자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며 화를 입을까봐 자기의 저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其父其子(기부기자)
其:그 기, 父:아비 부, 子:아들 자.
어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로, 조선 초 무기 제조 기술자인 최무선과 그의 아들 해산 부자에게서 유래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무기의 중요성을 알고 조정에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케 주청하여 화약과 화포(火砲), 신포(信砲), 火㷁 등 각종 화기를 만들어 대마도의 왜선 500쳐 척을 격파했다. 그런데 왜군의 침입이 잦아들자 화통도감(火㷁都監)을 폐지하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것은 최무선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대포는 해전에서 그 위력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뭍에서 더 필요한 무기였다.
  여론에 밀린 창왕(昌王)이 마침내 화통도감을 없애버리자 최무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내 나이 이제 육십, 화약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지만 그 기술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까 염려스럽구나.”
  그는 화약 제조에 몰두하다가 늦게서야 아내를 맞는 바람에 아들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라도 화약 제조의 비밀을 전하리라 결심했다.
  1392년 7월, 고려는 5백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 왕조로 바뀌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대포의 위력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최무선에게 무기 만드는 관청을 맡도록 했으나 그는 몸이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1395년 3월, 최무선은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아들 해산(海山. 1380~1443)에게 화약 제조법인<화약수련법(火藥修練法)>과 <화포법(火砲法)>의 책자를 주며 당부했다.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여 화약 만드는 법은 물론이고, 내가 발명한 대포보다도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내도록 하여라. 대포는 옮기기가 불편한 게 흠이니 그 점도 개선하도록 하여라.”
  그는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400년, 태조(太祖) 때부터의 충신 권근(權近)이 태종(太宗)에게 아뢰었다.
  “장차 왜구의 침입이 염려됩니다. 고려 때에도 그들이 극성을 부렸으나 그때는 최무선의 대포가 있어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오니 그 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잇게 하여 대포와 같은 위력 있는 무기를 생산하도록 어명을 내리시옵소서.”
  권근의 추천으로 해산은 20세의 나이로 무기를 다루는 군기감(軍器監)의 관리가 되었다. 해산은 아버지 이름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보람이 있어 1407년, 전에 비해 두배나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기술자만도 33명이나 길러 내었다.
  해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409년에는 사방을 방패로 막은 바퀴 달린 수레식 대포, 즉 화차를 발명했다. 그로써 적진 속으로 들어가 공격할 수가 있어 파괴력이 훨씬 높아졌다.
  화차 덕분에 오랑캐와 왜구를 물리치자 사람들은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먼(其父其子.기부기자).”
  2년 뒤, 최해산은 완구(碗口)라는 새로운 대포를 발명했다. 밥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크기는 대, 중, 소의 세 종류였는데, 그 위력이 대단해서 집채나 성문이 단번에 날아갈 정도였다. 이런 최해산의 노력이 인정을 받아 태종은 그에게 정4품 군기감승(軍器監丞)의 직책을 내렸다.
  실제 그의 공은 엄청났다. 그가 처음 관직에 몸을 담았을 때는 화약이 겨우 4근 4냥 밖에 없었으나 나중에는 1천5백 배가 넘는 6천9백 근으로 늘어났다. 대포도 2백 문이 채 안 되었으나 그가 군기감으로 일한 뒤에는 1만3천5백 문으로 증가되었다. 또 포병도 1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어마어마하게 큰 무기고도 건립되었다.
  최해산이 죽은 뒤 1471년에는 그가 생시에 그렇게 바라던 화약제조공장인 ‘화약감조청’이 세워졌으며, 정이오(鄭以吾)라는 사람은 <화약고기(火藥古記)>라는 글을 지어 최무선의 공을 역사에 길이 남도록 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起死臥死(기사와사)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臥:누울 와.
어의: 서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즉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한가지라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때 무인 출신 우의정 이완(李浣. 1602~1674)은 본관이 경주이고, 호가 매죽헌(梅竹軒)이며, 시호는 정익공(貞翼公)이다.
  사냥을 좋아하였던 그가 하루는 노루를 쫓다가 날이 저물어 깊은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산중에 대궐 같은 큰 집이 있어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갓 스물이 될락 말락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서 말했다.
  “여기는 손님이 머물 곳이 못 되니 그냥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이 깊은 산중에 날은 저물고 인가도 없는데 어디로 가겠소? 아무데라도 좋으니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시오.”
  “잠자리를 드리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손님께서 여기에 머무시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들어오시지요.”
  “좋습니다. 나가서 맹수의 밥이 되나 집 안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그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인이 홀로 깊은 산중에 있게 된 사연을 물었다.
  “이곳은 도둑의 소굴입니다. 저는 본래 양가의 딸이었으나 여기에 잡혀 와서 벌써 한 해를 넘겼습니다. 비록 비단으로 몸을 감고 구슬로 치장했으나 감옥살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여인은 밥을 짓고, 도둑들이 사냥해온 고기로 반찬을 장만하여 술과 함께 상을 차려 왔다. 이완은 배부르게 먹고 거나하게 취하여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수작을 벌였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소, 또 정절을 지켜 몸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 주겠소?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생사는 하늘에 맡겨 두고 귀한 인연이나 맺어 봅시다.”
  이완은 여인을 꼬여 한바탕 뜨거운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때 뜰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재촉했다.
  “큰일 났습니다. 도둑의 우두머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완은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당신이나 나는 일어나도 죽고, 누워 있어도 죽을 거요. 그냥 이대로 있도록 합시다.”
  이윽고 도둑의 우두머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웬 놈이 감히 이곳에 들어왔느냐?”
  이완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말했다.
  “노루를 쫓다가 길을 잃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이다.”
  “그러면 행랑에나 머물 것이지 감히 남의 유부녀를 범하다니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법이오.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도둑은 굵은 새끼로 그를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여인으로 하여금 멧돼지를 삶고 술을 가져오게 했다. 도둑은 고기를 썰어 우물우물 씹으며 술 한 동이를 다 마셨다. 묶여 있던 이완이 말했다.
  “여보시오. 나도 한잔합시다. 아무리 인심이 야박하기로서니 어찌 사내가 옆에 사람을 두고 혼자만 술을 마신단 말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나도 고기 맛이나 보고 죽읍시다.”
  “참으로 큰 그릇이로다.”
  도둑은 포박한 것을 풀어 주면서 말했다.
  “이제 비로소 대장부를 만났습니다. 장차 나라의 큰 간성이 될 인재를 내 어찌 죽이겠습니까? 우리 같이 한잔합시다.”
  도둑은 다시 술상을 차려오게 하여 서로 취하게 마셨다.
  “저 여인은 이제까지는 나의 아내였으나 그대와 이미 정을 통했으니 지금부터는 그대가 가지시오.”
  도둑은 이완에게 형제의 의를 맺자고 하며 말했다.
  “내가 뒷날 어려움을 당하여 내 목숨이 그대의 손에 달리게 될 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오늘의 정의를 잊지 않는다면 고맙겠소.”
  이완은 그의 말대로 뒷날 과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 군수, 부사 등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리고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金自點)을 도와 정방산성(正方山城) 싸움에서 크게 승리했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과 북벌을 계획하자 신무기 제조, 성곽 개수 및 신축 등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해냈다. 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런 별세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수어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가 포도대장 시절 어느 날, 큰 도둑을 잡아 처형하려다가 자세히 보니 바로 옛날 형제의 의를 맺었던 그 도둑이었다.
  이완은 효종에게 도둑과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 용서케 하여 인재로 등용했다.
  도둑은 무과에 급제하여 성을 지키는 부장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碁敗寄馬(기패기마)
碁:바둑 기, 敗:질 패, 寄:맡길 기, 馬:말 마.
어의: 바둑에 져서 말을 맡긴다는 말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싸움이나 경쟁에서 일부러 져주는 경우를 이른다. 작전상 후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문헌: 조선오백년기담(朝鮮五百年奇譚)

 

  덕원군(德源君. 본명:李曙.1449~1498)은 세조(世祖)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종부서 도제조의 직을 맡아 종실의 규찰과 선왕 제향소를 관리했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였으며 잡기 중에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실력도 뛰어나서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한 군졸(軍卒)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소인은 향군(鄕軍)이온데 이번에 번을 들기 위해 한양에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대군마마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한 수 가르쳐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알겠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한번 두어 보자꾸나!”
  덕원군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애기가(愛碁家)는 원래 서로 적수만 되면 상대 신분의 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군졸이 입을 열었다.
  “바둑은 그냥 두면 재미가 없고 내기 바둑이 재미있는 줄 아옵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쌀 한 가마니를 주시고, 소인이 지면 제가 몰고 온 말을 드리면 어떠할지요?”
  “좋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로구나. 어서 바둑알을 놓거라.”
  그러나 처음에는 팽팽하던 바둑이 결과는 덕원군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제가 졌습니다. 약속한 대로 제 말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업네. 자네 덕분에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으니 말은 그냥 가져 가도록 하게나.”
  “아닙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군졸은 말을 두고 돌아가서 번을 서고, 석 달 뒤에 다시 덕원군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말을 건 내기 바둑을 두자고 제의하였다. 덕원군은 반가워하며 마주 앉았다.
  “그동안 바둑 실력은 좀 늘었느냐?”
  “예.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덕원군은 초반부터 그의 실력에 당황했다.
  ‘이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걸.’
  덕원군은 끝내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방적인 패배에 덕원군은 약속대로 그의 말을 되돌려주면서 말했다.
  “너의 솜씨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어찌해서 나에게 졌느냐?”
  “예. 죄송하오나 그래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한양에 말을 타고 오긴 했지만 먹이고 재울 방법이 없어서 대군마마께 잠시 맡겨 둘 요량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번이 끝나서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황공합니다.”
  덕원군은 그 군졸의 남다른 기지에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덕원군은 신숙주와 더불어 국사를 돌보기도 했으며, 성종 2년에는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禪雲寺)를 중건하도록 하여 행호(幸浩)선사에게 발원문을 직접 초하기도 했다.
  덕원군은 성현의 학문을 전수하여 유종(儒宗)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騎虎之勢(기호지세)
騎:말탈 기, 虎:범 호, 之:어조사 지, 勢:형세 세.
어의; 호랑이를 탄 기세라는 뜻이다. 즉 이왕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는 데까지 갈 수밖에 없음을 이르는 말. 사
람이 범의 등에 탔다면 내릴 수는 없고 가는 데까지 가 본다는 것이 기호지세이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은 개성 부근 예성강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왕륭(王隆)이었으며 지방 사찬(沙湌) 호족으로 덕망이 높았다. 896년 궁예의 세력이 확장 일로에 있자 왕륭은 송악의 궁예 예하로 들어가 금성태수가 되었다.
  그 후 왕건이 성장하여 20세에 이르자 광주와 충주, 그리고 당성 등을 공략하여 성공하자 아찬(阿湌)이 되었다.
  왕건은 예성강에서 훈련된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錦城. 나주.羅州)을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평정했다.
  왕건이 어느 날 정주(貞州)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여인은 물을 길은 다음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배려였다. 그녀의 지혜가 마음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의 집에 들어가 여인의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은 다음 그녀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가 바로 토호(土豪) 천궁(天弓)의 딸 유씨(柳氏)부인이었다.
  당시 왕건은 궁예(弓裔)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였다. 왕건은 전장에서 쉴 새 없이 싸우다가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하니 절에 들어가 수절하고 있다고 했다. 왕건은 먼저 가정을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불러 올렸다. 그리고 개국을 이룬 후에는 그녀를 왕후로 맞으니 신혜왕후(神惠王后)가 되었다.
  그 무렵, 궁예는 난폭한 행동으로 실정(失政)을 거듭하여 군왕으로서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래서 부하 장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왕건은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였다. 이를 눈치 챈 유씨 부인은 남편에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기호지세이니 장수들의 말대로 추대를 수락하라고 격려했다. 이로써 왕건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
  수나라 황제 양견(楊堅)의 부인 독고(獨孤)씨나 왕건의 부인 유씨는 영리하여 사세 판단과 내조를 잘한 왕후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