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官之交(다관지교)
多:많을 다, 官:벼슬 관, 之:어조사 지, 交:사귈 교.
어의: 사다함과 무관랑의 사귐이라는 말로,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친구인 사다함도 7일 만에 따라 죽은 고사에서 유래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의 깊은 우정을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의 사다함(斯多含)은 내물왕(奈勿王)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급찬(級湌)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진골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모가 수려하고 지기(志氣)가 분명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화랑으로 천거하니 마지못해 응했다. 낭도(郎徒)가 된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에 달했으며 사다함은 그들 모두에게서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가락국(駕洛國:가야)을 정벌할 때 나이 15세의 사다함이 종군하기를 청했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지 않았으나 그 뜻이 확고하므로 귀당비장(貴幢裨將. 지방 단위 부대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출전하도록 했다.
사다함이 가락국 국경에 당도하여 먼저 원수(元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앞장서 전단량(栴檀梁. 성문 이름, 양은 가락국 말로 문을 가리킴)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곳 주민들은 갑자기 신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그래서 쉽게 가락국을 점령하였으며 결국은 멸망시켰다.
군사들이 개선하여 돌아오자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을 인정하여 가락국 사람 3백 명을 하인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받는 즉시 모두 방면해주었다. 또 토지를 하사했는데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강권하니 알천(알천)의 불모지를 청해 받았다.
사다함은 무관랑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한 친구였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먼저 죽자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다가 7일 만에 그를 따라 죽었다. 당시 사다함의 나이 17세였다.
사람들은 사다함과 무관랑의 의로운 정을 기리며 사다함의‘다’와 무관랑의‘관’을 따 다관지교(多官之交)라 불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茶山之冊(다산지책)
茶:차 다, 山:뫼 산, 之:어조사 지, 冊:책 책.
어의: 다산의 책이라는 말로 정약용의 횔발한 저술 활동에서 유래했다. 자기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경우를 칭송하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다산선생(茶山先生)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廣州)의 마현(馬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기용되자 상경하여 열 살 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학하고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감명을 받아 민생(民生)을 위한 경세(經世)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글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운 차이를 알겠다.>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예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약용의 눈높이는 이미 산의 아름다움이 아닌 멀고 가까운 거리를 본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과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산의 글을 보고 아들이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았다.
다산은 22세 때인 1789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794년도에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나중에 형조참의를 지내고 규장각의 서지 편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실력을 갖추어 출세의 길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이 전적으로 그의 편만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의 불행은 1791년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함께 시작되었다.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같은 남인이었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처남 이승훈(李承薰)과 함께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천주교와 함께 들어오는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는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더욱 거세졌다. 그리하여 이른바 황사영(黃嗣永) 백서 사건이 일어나 다산은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전라남도 강진康津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고문을 당할 때 이렇게 말했다.
“법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백성을 잡을 목적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그는 백성에 대한 박해와 가렴주구를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평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힘썼다.
유배지 다산 산정에서 19여 년 동안의 귀양살이는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곳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살며 현실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또 경서학(經書學)을 중심으로 한 학문을 깊게 연구하고 체계화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고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책 대부분이 귀양살이 때 쓰여졌다. 그는 훗날 귀양살이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무 살 때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전제・관제・군제 등을 바로잡고, 경전의 풀이도 다시 하려는 정열을 가졌었다.”
귀양살이는 다산을 대학자로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그의 학문은 역경에 처했을 때 오히려 더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는 서양 학문도 우리 실정에 맞게 접목시켰다.
그가 평생 집필한 책은 5백8권이나 되었으며, 70여 편의 다시(茶時)도 썼다. 이러한 엄청난 저술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50년 동안 글을 썼다고 치면 해마다 10권의 책을 펴낸 셈이 된다.
다산은 인문과학 외에 자연과학과 산림경제(山林經濟), 어류(魚類)에 대한 해설을 써 조선의 자연과학 수준을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른한 살 때에는 수원성을 축성하게 되자 기중기(起重機)를 만들어 무거운 바윗돌을 쉽게 옮길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의학에도 관심이 깊어 천연두에 관한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펴내고 종두법(種痘法)도 소개하였다.
한평생을 실천적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바친 다산은 1836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斷腕不筆(단완불필)
斷:끊을 단, 腕:팔목 완, 不:아닐 불, 筆:붓 필.
어의: 손목이 잘린다고 해도 글을 쓰지 않겠다. 영조가 승지에게 폐세자 전지를 쓰게 하자 승지가 “내 팔이 끊어지더라도 전지를 받아쓰지 못하겠다.” 고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한국인물지(韓國人物誌)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 이이장(李彛章. 1703~1764)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하라는 전지를 받아쓰도록 명하자 꿇어 엎드려 말했다.
“신의 팔이 잘린다고 해도 차마 그것만은 쓰지 못하겠나이다.”
영조는 성이 나서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완강히 거부하니 할 수 없이 다른 승지가 받아썼다.
도승지는 왕의 전지를 받아 써야 할 책임이 있는 직책인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이장은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낸 인재였다. 1748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도승지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答夫之策(답부지책)
答:대답 답, 夫:지아비 부, 之:어조사 지, 策:꾀 책.
어의: 답부라는 사람의 책략이라는 말로, 고구려 때의 국상 명림답부에게서 유래했다. 전투에서 시간을 끌어 상대가 지치게 한 후 싸우면 이긴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5
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 재위165~179) 때 한(漢)나라 현토태수(玄菟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긴급 대책회의를 연 신대왕이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물으니 대신들이 말했다.
“한나라가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으므로 만약 지금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깔보고 더 자주 쳐들어 올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산이 험하고 문이 좁으니 이를 잘 활용하면 한 사람이 적군 백 명도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공격하십시오.”
그러자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 군사는 강병으로서 사기가 충천하오니 그 서슬을 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군이 많을 때는 싸워야 하고, 적을 때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한나라 군사는 천 리 밖에서 군량미를 운반해 와야 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성곽을 높이 쌓아 그들의 침공을 막으며 기다리면 저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지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대왕이 답부의 말에 수긍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과연 한나라 군사들이 지치고 굶주려 결국 퇴각했다. 이때 답부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교전하니, 한나라 군사는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어 격려했다.
그가113세로 죽자 왕이 7일간이나 정무를 쉬며 친히 조상(弔喪)하였다.
신대왕과 명림답부는 특별한 관계였다. 165년 신대왕의 형 차대왕(次大王)의 학정을 보다 못한 답부가 차대왕을 살해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伯固)를 왕위에 등극케 하니 그가 신대왕이다. 그리고 신대왕이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當金如石(당금여석)
當:마땅 당, 金:쇠(돈) 금, 如:같을 여, 石:돌 석.
어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말로, 아버지의 유훈을 끝까지 지킨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뜻.
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한국명인전(韓國名人傳)
고려 말의 장군 최영(崔瑩. 1316~1388)은 본관은 동주(東州)요,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는 1658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적과 대적하여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다. 또 1361년에는 홍건적 4만이 서경(西京. 평양)을 공격하여 개경(開京)에까지 이르자 이를 격퇴시켰으며, 1363년엔 흥왕사(興王寺)의 변을 진압하였다.
1376년 우왕2년에 왜적이 삼남지방(三南地方.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쳐들어와 양민을 괴롭히자 홍산(鴻山)에서 맞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패하여 쫓겨간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그의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난을 모두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가 이렇게 명장이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의 유언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최원직은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을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맡아 왔다.
최영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며 이렇게 유언했다.
“재물을 탐내지 말고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當金如石.당금여석)”
최영은 그 유언을 작은 나무쪽에 써서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평생토록 실천했다. 그는 일국의 제일가는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비좁은 집에서 불평 없이 살았다. 그리고 오직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몰두하여 싸움에 임하면 싸움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 그도 요승 신돈(辛旽)의 참소로 좌천되었다가 공민왕 20년에 신돈이 처형되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최영은 명나라 철령위(鐵嶺衛) 문제를 계기로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그 계획이 서자 팔도도통사가 되어 우왕과 함께 평양에 진출하였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영은 이성계의 일파에 의해 고봉(고양)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막강한 병권을 잡고 있었지만 사사로운 부탁은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로지 옳은 것만을 가려서 받아들인 귀인이었다.
그는 신라의 백결(百結) 선생과 조선의 黃喜 정승과 더불어 3대의인(3大義人)으로 꼽힌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塗貌紙(도모지)
塗:칠할 도, 貌:모양 모, 紙종이 지.
어의: 물 묻힌 종이를 바른다는 말로, 죄인의 얼굴에 물을 적신 종이를 겹겹으로 붙여 마침내 숨이 막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의 하나다.
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한국문화상징사전(韓國文化象徵辭典)
황현(黃玹. 1855~1910)은 호가 매천(梅泉)으로 전남 광양(光陽)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을 잘 지었으며 1885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인 한일병합이 되자 통분하여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데
槿花世界己沈淪(근화세계기심윤) 무궁화 삼천리 강산은 이미 망하였노라.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눈물로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세상에 배운 사람 노릇 이토록 힘들 줄이야.
위의 글은 매천의 심정을 잘 나타낸 절명시 중의 삼편이다. 나라를 잃는 재변(災變)을 겪으면서 선비 매천의 선택은 자결의 길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는 조선인의 꿋꿋한 기상과 정신의 표출이었다.
또 그가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한말의 비사를 기록한 책으로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이 성금을 모아 출간하였으며 최근세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매천은 47년간의 기록을 야록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국정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고종의 즉위와 일본의 관계, 그리고 친일파의 매국행위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 <매천야록>에 민간에서 행한 형사적 문제를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겼다.
윤리,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에게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 그 일가친척이 도모지(도모지)라는 형벌을 시행했다는 내용이다.
혈육을 매로 때려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칼을 사용하여 죽일 수도 없으며 사약을 먹여, 죽일 수도 없을 때 부득이하게 단행했던 방법이다. 즉 죄인을 움직이지 못하게 나무에 묶어 놓고, 물에 적신 한지를 한 장, 두 장 얼굴에 몇 장이고 겹쳐 바른다. 이렇게 하면 형벌을 받는 사람은 앞이 보이지도 않고, 나중에는 소리를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이처럼 여러 겹을 바르고 난 다음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바른다. 그런 다음에는 한지의 물기가 점점 말라가면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어 결국 죽게 된다.
이런 형벌은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킴은 물론 윤리, 도덕적으로 도저히 한 하늘 아래에서 머리를 두고 같이 살 수 없는 금수와 같은 일을 저지른 자에게 내려지는 친족간의 형벌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도무지’라는 말은 바로 이 도모지란 이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都彌之妻(도미지처)
都:도읍 도, 彌:두루(그칠) 미, 之:어조사 지, 妻:아내 처.
어의: ‘도미’의 아내라는 뜻으로,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있는 유부녀를 말한다.
문헌: 삼국사기열전(三國史記列傳)
도마(都彌)는 백제 사람으로 심성이 깊고 가족을 사랑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부역의 대상으로 편입된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절개를 지키는 행실이 바른 여자여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백제의 제14대 개루왕(蓋婁王. ?~166)이 도미의 처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저 여자들이란 비록 지조를 지키고 결백한 것을 제일로 삼는 것 같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라.”
그러자 도미는 자기 부인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고 대답했다.
“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허! 정말 그럴까? 내가 장담을 하니 어디 한번 시험을 해보자.”
왕이 도미를 궁에 잡아 가두고 한 신하에게 왕의 의복을 입혀 밤에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왕으로 변장한 그 신하가 도미의 아내에게 말했다.
“네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를 하여 내가 이겼으므로 너를 궁인으로 삼기로 햇다. 그리 되면 너는 고생에서 벗어나 호강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내 수청을 들도록 하여라!”
그리고 들어가 옷을 벗기려 하자 도미의 아내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허언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시면 저도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고는 물러나 계집종을 치장시켜 들여보냈다.
왕이 후에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노하여 왕을 속인 죄로 도미의 두 눈알을 빼고,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글어다가 강제로 수청을 들도록 시키니 그녀가 말했다.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이 한 몸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감히 어명을 또다시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몸이 더러우니 다음 날 목욕을 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믿고 허락했다.
도미의 아내는 그길로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로 나갔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절망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하니 문득 작은 쪽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흘러왔다. 도미의 아내가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다다르니 남편이 죽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풀뿌리를 캐 연명하다가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에 이르니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倒屣下迎(도사하영)
倒:거꾸로 도, 屣:짚신 사, 下:내려갈 하, 迎:맞을 영.
어의: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내려가 영접한다는 말로, 사람을 진실한 마음으로 공손하게 영접하는 태도를 말한다.
문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6대 인조 때 좌의정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부인은 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딸이었다.
그녀는 부덕(婦德)을 갖추고 검소하여 화려한 비단옷은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은 정명공주(貞明公主) 집에서 잔치가 있어 고관(高官) 부인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참석한 부인들이 한결같이 화려한 비단옷에 비싼 패물로 치장하니, 참으로 화려했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가마를 타고 늙수그레한 한 부인이 왔다. 옷은 비록 베옷이었으나 단정하고 검소한 차림이었다. 그녀가 막 뜰에 들어서자 이를 본 공주가 신을 거꾸로 신고 급하게 내려가 반갑게 맞았다. 자연히 모든 부인들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공주는 정중하게 그 부인을 안내하여 윗자리에 모시고 극진한 예로써 대접하니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잔치의 흥취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그 부인이 먼저 일어나서 돌아가려고 하자 공주가 아직 이르다면서 말렸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저의 집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으니 어서 가서 저녁을 차려야 합니다.”
그의 남편은 조정의 약원도제조(藥院都提調)였고, 맏아들은 이조판서(吏曹判書)였으며, 둘째 아들은 승지(承旨)였다.
이 사실을 안 좌중의 부인들은 크게 놀라면서 자신들의 지나친 사치를 부끄러워했다.
좌의정 이정귀는 경서학에도 밝아 명(明)나라의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가 병조참지로 있을 때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하였다. 이때 조선국의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명나라에 가 정응태가 무고했음을 밝혀 정응태를 명나라 조정에서 파면시키게도 했다.
이정귀는 이처럼 국제간의 어려운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했던 명신으로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런 인물의 집안에 그 부인이었으니 그 남편에 그 부인인 기부기부(其夫其婦)가 아닐 수 없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刀以逢父(도이봉부)
刀:칼 도, 以:써 이, 逢:만날 봉, 父:아비 부.
어의: 칼로 인하여 아버지를 만나다. 유리왕이 태내(胎內)에 있을 때 아버지 주몽(朱蒙)을 이별했으나 훗날 부러진 칼을 증표로 만나게 된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물건을 근거로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문헌: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瑠璃王. ?~A.D.18)의 휘(諱)는 유리(類利) 또는 유류(儒留)이며, 주몽(朱蒙)의 아들이다. 주몽은 고구려가 통치하던 비류국(沸流國)의 둘째 공주 소서노(召西奴)를 새 황비로 맞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두었다. 유리왕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주몽은 나라를 세우려고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유리도 소년 시절에 아버지 주몽처럼 활을 잘 쏘았다.
어느 날, 유리가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화살이 빗나가는 바람에 지나가던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렸다. 물을 흠뻑 뒤집어 쓴 부인이 몹시 노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천하에 버릇없고, 아비 없는 후레자식 같으니라구…….”
그 말을 들은 유리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엎디어 울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 예씨(禮氏)는 그때까지 숨겨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너희 아버지는 일찍이 큰 뜻이 있으셔서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고구려를 세우신 주몽왕이시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이후 사내아이를 낳거든 증표가 될 물건을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 아래에 묻어 두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찾아오게 하라’ 고 하시었느니라.”
유리는 그날부터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며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 마루 기둥의 주춧돌을 보니 일곱 모로 다듬어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유리는 그 밑을 파 오매불망 찾고 있던 증표, 즉 도막난 칼을 찾았다.
유리는 그 칼을 가슴에 품고 졸본(卒本) 땅으로 주몽을 찾아가 보여 주었다. 주몽이 자신의 칼과 맞춰보니 딱 들어맞았다.
“네가 정녕 내 아들 유리로구나!”
주몽은 감격에 겨워 유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날로 유리를 왕자로 삼았다. 유리의 나이 18세요, 고구려 건국 19년이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9월, 주몽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리는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옆 나라 송양국(宋讓國)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리고 즉위한 지 3년 만에 골천(鶻川)에 이궁(離宮)을 짓는 등 나라의 면모를 새로이 일신했다. 그 후 왕비가 죽자 골천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로 맞아들였다.
그 후 부왕을 계승하여 약탈을 일삼는 선비(鮮卑)와 부여의 대소왕(帶素王) 등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到整累卵(도정누란)
到:이름 거꾸로(이를) 도, 整:정제할 정, 累:쌓을 누, 卵:알 란.
어의: 달걀을 거꾸로 쌓다. 사명당과 서산대사가 서로 도력을 겨룰 때 달걀을 거꾸로 차곡차곡 쌓은 데서 유래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낼 때 이르는 말이다.
문헌: 선조실록, 한국인의 인간상.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 의병장 사명당(四溟堂. 惟政.유정.1544~1610)이 오랫동안 금강산(金剛山) 등지에서 도를 닦은 끝에 축지법을 익히자 혼자 생각했다.
‘묘향산에 도술 높은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휴정1520~1604) 라는 큰 스님이 계시다는데 그와 도력을 한번 겨뤄 봐야겠다. 만약 나의 도력이 모자라면 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더 닦아야지.’
사명당은 이제 막 익힌 축지법을 이용하여 몇 걸음 만에 묘향산 입구에 닿았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 올 줄을 미리 알고 묘향산 골짜기의 물을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르게 해 놓았다. 그 광경을 본 사명당은 큰 감동을 받았다.
“역시 도술이 뛰어난 스님이시군.!”
사명당은 새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서산대사 앞에 가서 물었다.
“대사님, 제가 이 새를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서산대사가 대문 문지방에 다리를 앞뒤로 걸치고 서서 되물었다.
“대사, 그럼 내가 지금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맞혀 보시오. 그러면 나도 맞히리다.”
“그거야 나오시든 지 들어가시든지 대사님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대사님은 저를 맞으러 나오시는 길이니까 아마 나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서산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손안의 새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이 아니겠소. 그러나 대사가 산 목숨을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아오.”
“맞습니다. 스님께서 수수께끼 하나를 못 맞히게 하기 위해서 귀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지요. 허허허.”
사명당은 시원스럽게 웃고 나서 손안의 새를 날려 보냈다.
두 대사는 마루방에 마주 앉았다. 사명당은 냉수 한 그릇을 청한 다음 그 물에 가지고 온 바늘 백 쌈을 쏟았다. 그러자 바늘이 곧 먹음직스런 국수로 변했다.
“대사, 그 국수 맛이 참 좋을 것 같구려, 내가 먹어도 되겠소?”
서산대사는 순식간에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마셔버리더니 곧바로 바늘 백 쌈을 뱉어냈다.
그러자 사명당은 준비해 온 달걀 백 개를 차례차례 괴어 올리기 시작했다.
“대사의 도력이 참으로 놀랍구려.”
서산대사도 달걀 백 개를 가져오도록 하더니 처음 한 개를 허공에 머물게 한 다음 그 아래쪽으로 연이어 받쳐 내려가면서 거구로 쌓는 것이었다.
분명히 서산대사의 재주가 더 뛰어났다. 그때 사명당이 오른손을 들자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금새 소나기가 쏟아졌다.
“대사의 도력도 참으로 놀랍군요. 허허허…….”
말을 마친 서산대사는 내리는 빗줄기를 거구로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땅에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게 만든 것이다. 이번에는 사명당이 진 셈이다.
“대사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부터 대사님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사명당은 큰절을 하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대사 밑에서 도를 닦은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에 왜장 가토(加藤淸正.가등청정)와 세 번이나 만나 담판을 지었으며, 1604년에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홀홀단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德川家康.덕천가강)을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都知其眞(도지기진)
都:모두(도읍) 도, 知:알지, 其:그 기, 眞:참 진.
어의: 누구나 일고 있는 그것이 진리이다. 즉 진리는 평범한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세수를 할 때 코를 만지는 것만큼 쉽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다.
문헌: 선운사(禪雲寺) 주지승전승(住持僧傳承)
주지(住持)스님에게 한 불자(佛子)가 찾아와 물었다.
“진리(眞理)란 도대체 뭡니까?”
“자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게 무슨 소린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스님은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으음! 진리는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유된 인식과 외계의 존재, 혹은 현실이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는 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러나 자네가 그토록 간절히 청하니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하겠네.
딸만 셋을 둔 홀어머니가 있었다네. 모녀는 늘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사정이 통하게 되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심정이 통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지 툭 터놓고 서슴없이 나누는 아주 돈독한 모녀(母女) 사이였던 게야.
그러던 어느 해에 딸의 나이가 차 시집을 가게 되자 어머니가 딸을 앉혀놓고 다짐을 했어.
‘시집을 가거든 무슨 일이든지 기탄없이 이 에미에게 말해야 한다.’
‘예, 아무렴요. 어머니께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그 후 딸이 혼인을 하여 사위와 함께 신행을 왔는데 어머니가 딸을 골방에 불러 놓고 물었다네.
‘얘야, 첫날밤을 치르는데 남편이 어떻게 했는지 말해 주렴.’
그러자 딸이 약속한대로 대답했다네.
‘맨 처음 머리에 쓴 족두리와 비녀를 빼고…….‘
‘그다음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다음은?’
‘치마끈을 풀고…….‘
‘그 다음은?’
‘남편과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요.’
‘다음은?’
‘그리고 남편이…… 에이 어머니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거야, 어머니도 더 이상은 물을 수 없는 처지라 마찬가지고……. 그 어머니는 새 딸을 두었는데 똑같이 이 대목에서 말을 맺곤 했다네. 진리란 바로 이와 같은 거라네.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都知. 도지), 그런 거 말일세(其眞.기진)_.”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圖版女儿(도판여인)
圖:그림 도, 版:널 판, 女:여자 여, 儿:어진사람 인.
어의: 지도를 그리는 여인(女儿)이라는 말로, 조선 말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의 딸을 이르는 말이다. 효성이 지극한 딸, 또는 어떤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딸을 뜻한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말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4)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위해 30여 년간 조선 팔도를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1861년, 마침내 <대동여지도>2집을 완성했다. 또 <여지승람(與地勝覽)>의 잘못된 곳을 정정하기 위하여 32권 15책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했으며, <지구도(地球圖)>도 제작했다.
김정호의 이런 업적 뒤에는 지도를 그리고 판각을 하면서 그와 함께 고생을 한 딸의 효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정호가 최초로 지도를 보게 된 것은 같은 서당에 다니던 친구 김용희로부터 읍도(邑圖)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야, 이거 정말 신기하구나, 이것만 있으면 이 마을 전체를 앉아서 꿰뚫어 볼 수 있잖아.”
지도에는 산과 내, 그리고 마을의 위치와 가구 수가 적혀 있었다.
김정호는 지도를 들고 현장을 답사해 보았다. 그러나 강 왼쪽에 있다는 산이 오른쪽에 있는가 하면, 마을 앞으로 굽이쳐 흐르는 내가 뒤로 흐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등 잘못된 곳이 많았다.
“뭐야? 사실과 너무 다르잖아, 이런 지도를 어떻게 믿어, 좀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없을까?”
세월은 흘러 어느덧 그의 나이 스물이 되었다. 청년 김정호는 지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바닥 보듯이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내 일생을 걸겠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김정호는 괴나리봇짐 하나만을 등에 진 채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0년, 때로는 사람 사는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꼬박 밤을 새워야 했고, 때로는 눈 속에 파묻혀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다가 사냥꾼에 의해 간신히 구출되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심한 설사 때문에 잠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의 집 방아품으로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던 아내는 몇 해 만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딸 순녀만이 다 해진 버선발로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도가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집 내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싸돌아다니는 거요? 나랏님이 그 일을 하랍니까? 아니면 벼슬을 내려준답디까?”
아내가 매섭게 투정부터 해대자, 딸 순녀는 어머니에게 그만하라고 말리며 아버지를 방으로 모신 후 큰절을 올렸다.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병까지 얻은 김정호는 그날 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이윽고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그제야 남편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간호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식구 굶기고, 본인 병들어 죽게 되는 고생을 무엇하러 사서 하는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순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나타났다.
“어머니. 여기 아버지 약 지어 왔어요. 어서 달여 드리세요.”
“갑자기 네가 무슨 수로 ……?”
김정호의 아내는 무심코 딸을 돌아보다 짧게 잘려진 머리카락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여보! 순녀가 제 머리카락을 팔아 약을 지어 왔소. 효녀를 둔 덕분에 살아난 줄이나 아시우.”
김정호는 딸의 까까머리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혼잣말로 되뇌었다.
“순녀야, 고맙다. 내 지도를 꼭 완성해서 보답해 주마.”
몸이 회복되자 김정호는 울며불며 붙잡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세 번 째 답사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시집을 갔던 딸 순녀는 남편을 여의고 돌아와 홀로 친정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정호는 돌아오자마자 조사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 작성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여 도본을 완성했으나 목판 새기는 일이 문제였다. 목판 조각가를 구할 돈이 없던 김정호는 딸에게 목판 파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순녀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김정호의 훌륭한 조수가 되었다.
순녀는 자신의 신세는 까마득히 잊고 목판을 새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아버지를 돕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목판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철종 12년인 1861년, 김정호는 처음으로 종이에 지도를 찍어 내었다. 그 감격은 아버지와 딸의 가슴을 울렸다. 김정호는 지도 이름을 ‘대동여지도’라고 붙였다.
김정호는 본관이 청도(淸道)이고, 황해도 출신인데 어려서 한양으로 올라와 공부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지도 만드는 일에 뜻을 품고 오직 지도 만드는 일에만 나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처럼 32권 15책의 <대동여지도>를 딸과 함께 그리고 판각하여 이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바쳤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대신들은 지도의 정밀함에 놀라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刻板)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구금해 마침내 옥사하게 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讀如取食(독여취식)
讀:읽을 독, 如:같을 여, 取:취할 취, 食:밥 식.
어의: 책을 읽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독서의 중요성과 유익함을 강조한 말이다. 밥은 몸의 양식이지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학자 조위한(趙緯韓.1567~1649)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하고 있는데 한 학동(學童)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갑자기 책을 내던지며 말했다.
“책을 덮기만 하면 읽었던 내용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달아나 버리니, 이래 가지고야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그러자 조위한이 그 학동을 조용히 깨우쳐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삭아서 똥이 되어 빠져나가 버리고, 그 영양분만 남아서 신체를 윤택하게 하는 이치와 같은 거라네. 따라서 당장은 그 내용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엇인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있는 법이야. 그러니 책 읽기를 쉽게 포기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네.”
조위한은 1624년 이괄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직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그는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어려운 민생을 그린 <유민탄>이라는 작품을 썼으나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
東:동녘 동, 家:집 가, 食:밥 식, 西:서녘 서. 宿:묵을 숙.
어의: 동쪽에서 밥 먹고, 서쪽에서 잠잔다. 즉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고려의 정권 밑에서 녹을 받아먹던 신하들이 지조 없이 조선의 태조 밑에 들어가 다시 녹을 먹는다는 비아냥에서 연유했다.
문헌: 고사성어사전(故事成語事典).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고려 말 송헌(松軒)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자춘(李子春)의 아들로 영흥(永興) 출신이다. 그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나 그의 의사가 묵살되고 도리어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되어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최영(崔瑩)을 숙청하고, 우왕(禑王)을 폐위한 뒤 창왕(昌王)을 옹립한 다음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에는 다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후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구세력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전제(田制)를 개혁했다.
1392년에는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하고 마침내 태조(太祖)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이렇게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국한 후 공신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고려 왕조의 대신들이었다.
그런 자리에는 으레 기생들도 참석했는데 마침 명기 설매(雪梅)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흥에 겨워지자 한 정승이 술에 취하여 설매에게 수작을 걸었다.
“내 듣자하니 너는 동쪽 집에서 아침을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던데 나하고도 한번 놀아보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설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지요! 저도 나으리 말씀대로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몸이요, 대감께서도 왕씨를 섬겼다가 다시 이씨를 섬기는 몸이니, 같은 사람끼리 노는 것도 격에 맞는 일이겠지요.”
그러자 그 정승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물론이고 곁에서 듣던 다른 대신들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은 흔히 할 일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건달, 놈팽이들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同穴之友(동혈지우)
同:한가지 동, 穴;굴 혈, 之:어조사 지, 友:벗 우.
어의: 같은 굴에 사는 친구라는 말로, 부부를 뜻한다. 한 수도자가 여인을 흠모하여 꿈에 그 여인과 살았다는 내용으로, 사찰 정토사가 세워지게 된 설화에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때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에서 토지 관리인으로 조신(調信)스님을 임명했다. 그런데 조신은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깊이 사랑하여 낙산사(洛山寺)의 관음보살에게 그 여자와 혼인하게 해줄 것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른 배필이 생겨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결혼하고자 했던 낭자가 반가이 웃으며 다가왔다.
“저는 일찍이 스님을 잠깐 보고 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함께 무덤에 들어갈 동혈지우가 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조신은 자기가 바라던 여자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뻐 함께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사십여 년을 같이 살며 아들딸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집이라곤 벽뿐이요,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겨우 구걸하여 연명을 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명주 해현령(蟹縣嶺)에서 열다섯 살 된 큰아이가 굶어 죽어 나머지 네 자녀를 데리고 다시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띠풀로 집을 짓고 살았다.
세월은 흘러 그는 늙고 병들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딸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와 눕자 부인이 흐느껴 울며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산 지 사십 년이 되어 정도 깊게 들고, 숨은 사랑도 굳어졌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쇠약해져 병이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를 짊어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처 돌보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어여쁜 얼굴과 웃음도 풀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렸고, 아름다운 난곡 같은 백년가약도 한 조각 구름이 바람에 날아가듯 없어져 버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이 되니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슴만 아픕니다. 역경을 당하면 버리고, 순경에 있으면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니,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 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맞는 말이라 생각하여 각기 아이 둘씩을 나눠서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오.”
막 헤어져 길을 떠나려 할 때 깜짝 꿈을 깨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조신 스님은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어져 몰골이 한평생 고생을 격은 것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그리고 탐염(貪染)의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져 버려 마음 깊이 참회해 마지않았다.
해현(蟹縣)에 찾아가 꿈에 묻었던 아이를 파 보니 둥그런 돌부처가 나왔다. 그는 사찰의 토지를 관리하는 일을 그만두고 전 재산을 쏟아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쌓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杜門之義(두문지의)
杜:막을 두, 門:문 문, 之:의(어조사) 지, 義:옳을 의.
어의: 문을 막아 의로움을 지킨다는 말로,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조선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고사리만을 캐 먹고 산 데서 유래했다.
문헌: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고금청담(古今淸談)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1392년)을 건국하니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모든 영화와 명예를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골짜기에 들어가 고사리를 따다 연명하며 끝까지 고려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때 고려 충신들이 몸을 씻은 샘을 세신정(洗身井)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머물었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고, 그들의 충의를 두문지의(杜門之義)라 했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의 충신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장성 사람 서중보(徐仲輔)를 비롯하여 우헌(迂軒) 허옹(許邕), 김해 사람인 허기(許麒) 등을 두문동 72현으로 꼽는다.
둘째. 개별적인 기록으로는 부평 사람 이의(李倚), 개성 사람 고천우(高天佑), 김해 사람 김진문(金振門), 인천 사람 채귀하(蔡貴河), 변숙(邊肅), 성산 사람 전신(全信), 파평 사람 김인기(金仁奇), 청송 사람 심원부(沈元符), 진주 사람 강회중(姜淮仲) 부자 등 10인과 신규申珪(), 신혼(申琿), 조희생(趙羲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등이 있었다.
셋째. 태학생(太學生. 성균관 소속의 생원, 진사의 총칭) 69명이 분신자살했거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굶어 죽었다.
넷째. 무신(武臣) 48인이 있으며, 조선에 충성하지 않아 끝내 몰살당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을 위해 제21대 영조(英祖) 때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다섯째. 두문동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궁녀동(宮女洞)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고려의 궁녀들이 의롭게 죽었다.
이상의 인원 수만 해도 199명, 궁녀를 합하면 200명이 훨씬 넘는 숫자다. 기록에 빠진 것을 감안하면 이 외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또 두문동이 아닌 명산대천을 헤매다가 죽거나, 벼슬하지 않고 의(義)를 지켰던 숨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 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豆粥侍中(두죽시중)
豆:콩 두, 粥:죽 죽, 侍:모실 시, 中:가운데 중.
어의: 콩죽만 먹는 시중이라는 말로, 고려 말에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던 문하시중이 조선 초에 태종 이방원의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콩죽만 먹으며 지조를 지킨 고사에서 유래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가 굳은 사람을 이른다.
문헌: 고려사(高麗史).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말에 좌시중(左侍中) 우현보(禹玄寶. 1333~1400)는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피살된 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곳으로 가기를 꺼리자 천마산의 스님을 시켜 장사를 지내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의 건국 주역 태종(太宗)과는 매우 친한 벗이었다. 태종이 우현보를 청백리에 봉하고 나라의 중책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망국지신임을 내세워 극력 사양했다. 또한 조선에서 주는 녹미는 안 먹겠다는 결벽으로 그의 의복은 언제나 철에 맞지 않았고, 조석의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항상 콩을 맷돌에 갈아서 나물과 함께 죽을 끓여 먹었으므로 사람들은 우왕 때 시중을 지냈다 하여 그를 두죽시중(豆粥侍中)이라고 불렀다.
그는 쓰러져 가는 고려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자신의 무덤조차 선영에 쓰지 않고 따로이 쓰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頭懸上梁(두현상량)
頭:머리 두, 懸:매달 현, 上:윗 상, 梁:들보 량.
어의: 머리를 상량에 매단다는 말로, 수양하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적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뜻이다. 신라 자장법사에게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신라의 대덕 자장(慈藏)의 속명은 김선종(金善宗)으로 그의 아버지 소판(蘇判) 무림(茂林)은 진한의 진골(眞骨)로서 관리직을 맡고 있었는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관음보살에게 자식 하나만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만약 아들을 낳게 해주시면 불법에 귀의케 하겠습니다.”
그 후 아내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았는데, 석가세존과 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그래서 선종(善宗)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선종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렵게 결혼했으나 세속의 번거로움이 싫어져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세운 후 입산했다. 그리고 깊고 함한 산속에서 독실하게 불법을 수행했다.
그는 수행할 때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주위에 가시덤불을 둘러치고, 맨몸으로 들어앉아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찌르도록 하고, 머리카락을 들보에 매달아 졸음을 막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재상의 자리가 비게 되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칙령을 내렸다.
“명령에 불응하면 목을 베어버리리라.”
그러자 자장이 여왕에게 말했다.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어기고 백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의 단호한 뜻이 조정에 알려지자 왕도 더 이상 속세로 돌아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비바람을 피해서 바위 사이에 틀어박혀 수도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상한 새가 곡식을 물어다 주어 그것으로 공양을 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하늘 사람이 와서 다섯 가지 계(戒)를 주었다. 꿈을 깬 그는 비로소 골짜기를 나오니 마을의 부녀자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그 후 더 깊은 불법을 연구하고자 636년에 승실(僧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唐)나라의 청량산으로 갔다. 그 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에 의하면 제석천(帝釋天. 불법을 지키는 신)이 장인(匠人)을 데리고 와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건데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범게(梵偈)를 주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처음 보는 스님이 와서 해석해 주며 말했다.
“비록 만 가지 교(敎)를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오.”
말을 마친 스님은 자기가 지니고 있던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는 사라졌다. 자장은 불경과 불상이 없었으므로 대장경 1부와 번당(幡幢)・화개(花蓋. 불당을 장식하는 깃발) 등 불교를 알릴 수 있는 자료들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당태종(唐太宗)에게 청해서 모두 가져왔다.
그가 신라에 되돌아오자 조정에서도 뜻을 같이 하여 의논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주관하고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이를 통괄해서 관장할 필요가 있다.”
논의가 이에 이르자 칙령을 내려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불교의 일체 규범을 주관하도록 했다. 자장은 중책의 소임을 느끼고 궁중과 황룡사(皇龍寺)에서 대승론(大乘論)을 활발하게 펴 불교를 포교했다. 그래서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이가 열 집 중에 여덟, 아홉 집이나 되었고, 스님이 되기를 청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세워 스님 지망자들을 받아들였다. 또 자기 집에 세웠던 원녕사를 고쳐 짓고 낙성회를 열어 잡화(雜花. 화엄경)를 강했다.
자장은 황룡사9층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고,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했으며, 10여 개의 사탑(寺塔)도 건립했다. 또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하고, 그들의 의관제도를 도입하여 정리하니 외관상으로 신분을 구분 짓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자장은 말년에 태백산에 정암사(淨巖寺)를 세운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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