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2[高矢禮(고시례)~郊彘仲媒(교체중매)]

efootprint 2022. 9. 21. 20:39

 

高矢禮(고시례)
高:높을 고, 矢:화살 시, 禮:예도 례.
어의: 고시에게 드리는 예, 단군시대에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고시에게 예를 차린다는 뜻이다. 농민들이
들녘에서 참을 먹거나 점심을 먹을 때 맨 처음 술이나 밥을 주위에 던지며 외치는 말이다.
출전: 한국민속담(韓國民俗談)

 

  고시(高矢)라는 말은 단군(檀君) 왕검이 나라를 세운 후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내린 직책으로 지금의 농림부장관과 같은 직위였다. <신시본기(神市本紀)>의 기록에는 당시의 농민들은 고시의 지시에 의하여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다가 참을 먹거나 점심 식사 때 먼저 예를 갖추는 고사(告祀)를 지냈던 것을 오늘날의 고시례(高矢禮)라고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음식에 따라온 귀신을 쫓고 들판에 있는 잡귀를 좇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유래가 지금은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떼서 던지며 ‘고시례’ 하고 외치는 풍습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관습이 나중에는 남의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도 먼저 한 쪽을 떼서 던지며 ‘고시례’ 하는 의례적인 관습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 신화에서 농사를 주관하는 염제 신농씨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더러는 이를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귀중한 민속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선조들이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아 자연과 더불어 친화적으로 나누고자했던 심정적인 미덕도 같은 범주의 예라 할 것이다.
  명절이나 제사의 차례상(茶禮床)을 올릴 때에 차 대신 술을 먼저 모사에 조금씩 세 번 따른 뒤 신주 앞에 올리는데, 이 또한 고시에게 예를 표했던 것처럼 조상님께 에를 표하는 행위다.
  위에서 말한 차례(茶禮) 또한 우리 선조들이 술 대신 차(茶)를 조상께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예물에서 가장 귀한 예물이 차였음은 차가 조선시대의 혼례 필수 예물이었던 점만 봐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앞서 가신 선인들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를 이처럼 잊지 않고 표했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그러니까 위의 예는 우리 선조들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고시의 공을 감사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지방에 따라 ‘고시례’나 ‘고수례’ 등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나 뜻은 위와 같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曲逕凌遲(곡경능지)
曲:굽을 곡, 逕:소로 경, 凌:능가할 능, 遲:늦을지.
어의: 곡경은 부정한 사유로 세력을 잡는다는 뜻이고, 능지는 능지처참의 준말로, 죄인의 사지를 베는 극형을
말한다. 부정하게 권세를 잡아 영화를 누리면 끝에 가서는 극형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출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조선시대 쌍리(雙里) 이이첨(李爾瞻.1569~1625)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해군 때에 정권을 잦아 정국을 좌지우지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여 권력의 문에 들어섰다,
  선조(宣祖)의 후사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그는 광해군(光海君)을 옹립하려는 대북의 영수가 되어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는 소북(小北)을 논박하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 갑산(甲山)으로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아들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이이첨은 일약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권세를 얻게 되자 그는 죽령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잡혀 온 박응서(朴應犀)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하게 했다.
  그렇게 누명을 씌워서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 증살(蒸殺. 삶아 죽임)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게 했으며, 인목대비도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 후 계해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극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세 아들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이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 관아에서 일을 마치고집에 돌아가다가 의관이 부서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맹인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맹인이 대답했다.
  “소인은 점술가인데 공의 아들이 공의 장래에 대하여 길흉을 묻기에 계해년 2월에 흉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더니 화를 내며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이첨은 맹인에게 사과하고 그 대가로 물건을 후하게 주어 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꾸짖었다.
  “너의 물음에 맹인이 점괘대로 대답했는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된다고 매질을 하였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죄를 짓게 했구나.”
  그도 자신의 곡경능지(曲逕凌遲)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가 높아진 사람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진리에 의해 재앙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公鷄不産卵(공계부산란)
公:공평할 공, 鷄:닭 계, 不:아닐 부, 産:낳을 산, 卵:알 란.
어의: 공계(수탉)는 알을 낳지 못한다. 어떤 일을 성사시킬 수 없을 때 변명의 의미로 쓰인다. 명신 이덕형이
선조에게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한국인의 야담(野談).

 

  조선 14대 선조(宣祖)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조회(朝會)를 하고 있었다.
  승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뒤늦게서야 도착하여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데 참석한 대신들이 저마다 품속에서 계란 세 개식을 꺼내 상감마마 앞에 정중히 바치는 것이었다.
  ‘이상한 지고……?’
  지각을 한 터라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한음은 생각했다.
  ‘무슨 일일꼬? 상감마마께 계란을 바치다니……, 상감마마께서 잡수시려고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무슨 곡절이 있는 거로구나.’
  한음은 어제 아내가 앓고 있어서 다른 대신들보다 일찍 퇴청했었다. 때문에 자신이 퇴청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왕이 물었다.
  “계란을 안 가지고 온 사람 없겠지?”
  한음은 잠시 망설이다 갑자기 엉덩이를 푸드득! 푸드득! 치고 나서 ‘꼬끼오’ 하고 수탉의 울음소리를 냈다.
  용상에 앉아 있던 선조는 물론 만좌의 백관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보았다.
  “이 승지(李承旨)! 승지는 평소 짐 앞에서 실수를 한 적이 없었거늘, 방금 그 괴성은 무슨 소린고?”
  “네, 수탉의 울음소리이옵니다.”
  “뭐, 수탉의 울음소리? 왜 그런 해괴한 소리를 내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서 방금 들으신 대로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계란을 가져오지 못했나이다.”
  만좌의 백관들은 천연덕스럽게 아뢰는 한음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선조도 내심 만족스러웠다. 사실은 선조가 이덕형의 재치를 시험해보려고 꾸민 일이었다.
  한음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교섭하여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막게 하고, 자신은 접빈관(接賓官)으로 활약했다.
  그 후, 그는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양근(陽根)에 내려가 죽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公事無私(공사무사)
公:공평할 공, 事:일 사, 無:없을 무, 私:사사 사.
어의: 공적인 일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정실이 없다. 즉 어떤 일을 함에 개인의 욕심이 없이 공명정대해야 한다
는 뜻이다.
문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조선 제3대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검찰총장)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59~1438)은 부하인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같이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면서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 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한주(韓州)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과 도승지 황희(黃喜)의 간곡한 해명으로 풀려나 이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세종(世宗)이 친히 <태종실록>을 보고자 하자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실록에 수록한 사실들은 먼 훗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록입니다. 때문에 이를 보신다 하더라도 내용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들도 전하를 선례로 삼아 모두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관들은 혹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아니 되니, 뒷사람들에게 사실과 신의를 전달할 수 있게 보시지 않는 것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올바른 충정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영전시켜 주었다.
  그는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집의 지붕에서 빗물이 새고, 고향에 갈 때에도 남루한 차람으로 행차하여 그곳 수령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하는 일도 있었다.
  시문(詩文)과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청백리에 추대되었고, 효자정문(孝子旌門)도 세워졌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共水騙賣(공수편매)
共:한가지 공, 水:물 수, 騙:속일 편, 賣:팔 매.
어의: 공공의 물을 속여서 팔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판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감쪽같이 속이는 행위를
 이른다.
문헌: 한국해학소설집(韓國諧謔小說集)

 

  평양(平壤) 선교리에 봉이(鳳伊) 김선달(金先達)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똑똑하고 재주가 많았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가 없었다.

  선달이라는 직위는 그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자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주위의 사람들이 편의상 붙여준 것이었다.
  김 선달은 자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벼슬길에 들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선교리 동구 밖에 있는 능라도 주막집에서 소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려한 비단옷 차림의 한양 사람들이 때로 몰려와 평양 거리를 쓸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평양의 특산물을 싸게 싹쓸이 해다가 한양에서 비싸게 팔려는 투기꾼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돈을 전대에 차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물건을 후려치는 등 볼썽사납게 굴었다.
  김 선달은 그들의 행위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골탕 먹일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대동강가로 가는데 갑자기 물장수들을 만나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오른 선달은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물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합시다.”
  “아니 선달님께서 어쩐 일로 술을 다 사십니까?”
  “내 술은 술이 아닌가? 마셔 보게나, 아주 달콤할 테니…….”
  마침 출출하던 물장수들은 선뜻 김 선달을 따라나섰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가 입에 침이 돌자 선달이 제안을 했다.
  “여보게들! 내가 재미있는 일을 한번 벌여 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겠나?”
  “좋지요! 무슨 일입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엽전 다섯 냥씩을 나누어 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 갈 때마다 나에게 한 냥씩만 주고 가면 돼! 한 이삼일만 하면 될 게야.”
  “그까짓 일쯤이야 협조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드리지요.”
  “자, 그럼 내일부터 내가 여차저차하면 당신들은 저차여차해주시오 그럼 내 섭섭지 않게 인사는 하리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다섯 냥씩을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 김 선달은 커다란 소쿠리를 챙겨들고 물장수들이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 마을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장수들은 약속대로 엽전을 한 냥씩 소쿠리에 던져 주고 갔다.
  잠시 후, 한양의 패거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물장수들에게서 꼬박꼬박 엽전 한 냥씩을 받는 김 선달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아니 영감은 지금 무슨 돈을 받고 있는 거요?”
  “보면 모르시오? 물값이오. 물값! 내 강에서 물을 길어 가니까 물값을 받아야 할 것 아니오.”
  “아니 저 대동강 물이 모두 당신 것이란 말이오?”
  김 선달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허허! 그렇대두요.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저리들 가시오. 보아하니 한양에서 온 양반들 같은데 꽤나 답답들 하시구만!”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이 밝았다. 김 선달은 또다시 강가로 나가 어제처럼 돈을 받았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한양 투기꾼들이 다시 몰려 나왔다. 그때 물지게를 지고 오는 사람에게 김 선달이 말했다.
  “자네는 밀린 돈이 열 냥인 거 알고 있지? 내일은 모두 가지고 와야 하네.”
  “네! 내일은 틀림없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투기꾼들은 김 선달에게 대동강 물을 팔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김 선달은 못이기는 척 물러나며 말했다.
  “내 자손대대로 편히 먹고 살 소중한 재산인데……, 하지만 어르신네들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구려, 얼마면 사실 생각입니까?”
  “2천 냥이면 어떻겠소?”
  “2천 냥? 어디 셈을 한번 해봅시다. 하루에 오십 냥만 치더라도 열흘이면 오백 냥, 그럼 한달 열흘이면 본전을 모두 뽑는데……, 헤헤! 그걸로는 어림도 없소이다.”
  “노인장, 그러지 말고 우리들의 성의를 봐서 적당한 선에서 넘겨주시오. 그럼 배를 올려 4천 냥 드리리다.”
  “안 되오. 정히 그러시다면 5천 냥을 당장 현금으로 내시오. 그 전에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마시고……,
  투기꾼들은 5천 냥이면 엄청난 돈인데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전대를 풀어 돈을 보이면서 매매를 해버리자고 서둘렀다. 물론 간단한 계약서도 썼다.
  김 선달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들을 두고 돈자루를 지고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한양 양반 패거리들은 길목에 천막까지 치고 느긋하게 앉아서 돈을 받으려 했으나 돈을 내는 물장수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왜 물값을 안 내는 거요?”
  “물값이라니, 무슨 물값을 내라는 거요? 당신들 미쳤소?”
  물장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다.
  “우리가 저 대동강을 샀단 말이오. 그러니 오늘부터는 물값을 우리에게 내고 가슈.”
  젊은 물장수가 나서며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허, 이런 얼간이들을 보았나! 저 대동강 물이 누구의 것인데 누구한테 어떻게 샀다는 거요?”
  그러자 투기꾼들은 계약서를 내밀면서 한사코 물값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 물장수가 말했다.
  “쯧!쯧! 당신들이 속은 거요. 우리는 그 선달 영감이 여차저차하면 저차여차해달라기에 그렇게 해준 것뿐이란 말이요.”
  그제야 한양 양반 패거리들은 땅을 치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김 선달은 이미 물 판 돈 중에서 일부를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양을 떠난 뒤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空心修德(공심수덕)

空:빌 공, 心:마음 심, 修:닦을 수, 德:큰 덕.
어의: 마음을 비워야 덕을 닦을 수 있다는 뜻이다. 찻잔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다른 물을 부을 수 없듯
이 아집과 사심을 버려 마음을 비워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욕심을 버려야 덕을 쌓을 수 있다는 뜻.
문헌: <한국인의 야담(野談) 잡기(雜記)>

 

  오재두(吳再斗) 스님이 오랜 수행 생활을 통하여 학문이 깊어지자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삶의 도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법문(法文)을 열었다. 그러자 원근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절 문이 닳도록 붐볐다. 스님은 누가 찾아와도 마다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사는 선비 셋이 스님을 시기하여 헛소문을 퍼뜨리며 헐뜯었다.
  “겨우 땡중 주제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염불 몇 줄 외우고, 불경(佛經) 몇 권 뒤적인 주제에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양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틀림없이 그저 사술(邪術)이나 펴는 똘중일 게야.”
  그들은 스님의 학덕을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지식이 우월함을 내세우려고 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가 골탕을 먹여줍시다.”
  이렇게 작당한 세 선비가 스님을 찾아가서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척하면서 말을 걸었다.
  “저희는 산 아래 사는 선비들이온데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스님은 선비들의 인사를 받고 방으로 안내한 다음 찻잔을 내놓더니 아무 말 없이 찻잔에 뜨거운 작설차(雀舌茶)를 넘칠 만큼 가득 부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은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그때 스님이 선비들에게 말했다.
  “소승이 미련하여 물을 너무 뜨겁게 했군요. 여기 찬물이 있으니 이걸 부어 식혀서 드시지요?”
  그러자 선비들은 웬지 자기들이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다.
  “여보시오, 스님! 이렇게 찻잔이 넘칠 지경인데 어떻게 여기에 찬물을 더 부으라는 거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소승에게 배우러 왔다는 분들이 자기의 아집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소승의 말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제 말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선 마음을 깨끗이 비우셔야 됩니다. 마음에 빈 자리가 많을수록 많이 배울 수 있는 법이지요. 자만과 아집이 가득한 마음은 찻잔에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스님의 얘기를 듣고 선비들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암자를 떠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箜篌引(공후인)
箜:공후 공, 篌:공후 후, 引:이끌 인.
어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음을 슬퍼하여 부른 노래. 고조선시대의 노래 <황조가>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절개를 지킨 백수 광부의 처가 부른 노래다.
문헌: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시가(詩歌)인 <공후인(箜篌引)>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대동강에서 뱃사공을 하던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어느 날 새벽에 강으로 나갔는데 백수광부(白首狂夫:흰 머리의 미친 사람)가 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화급히 따라가며 건너지 말라고 소리쳐 불렀으나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물속으로 들어가 결국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강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그래도 임은 기어이 건너가셨네.
      墮河而死(수하이사)  결국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하오리.
  노래를 다 마친 그녀는 남편이 빠져 죽은 강물로 들어가 목숨을 끊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처 여옥(麗玉)에게 나루터에서 있었던 일을 노래와 함께 이야기해 주었다. 여옥은 그 사연을 듣고 몹시 슬퍼하면서 공후를 가지고 남편이 불러 주는 시가에 곡조를 붙여 <공무도하가>를 완성했다.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노래는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의 <황조가(黃鳥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過慾敗家(과욕패가)
過:지나칠 과, 慾:욕심 욕, 敗:패할 패, 家:집 가.
어의: 욕심이 지나치면 집안을 망친다는 뜻이다. 즉 허망한 과욕은 자신을 망치게 하는 것은 물론 가족까지 잃

       게 한다. 과욕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 고금청담(韓國人의 智慧 古今淸談)

 

  조선 인조(仁祖) 때, 사헌부에 윤후길(尹厚吉)이라는 나졸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옥문을 지키고 있는데 한 죄수가 자기를 풀어주면 평생 먹고살 만한 돈 삼천 냥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생각해 보니 그 돈만 있으면 고된 나졸직을 그만두더라도 평생토록 배부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 죄인과 함께 달아났다.
  하지만 이내 잡혀 사헌부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 끝에 범죄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편히 살려던 꿈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고문으로 얻은 상처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가스로 목숨을 유지하여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니 가족들은 물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욕은 신세를 망치게 되고 끝내는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패가(敗家)의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寡子倍學(과자배학)
寡:홀어미 과, 子:아들 자, 倍:곱 배, 學:배울 학.
어의: 홀어미의 아들은 남보다 갑절이나 더 배우고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즉 편모슬하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 없이 자란 버릇없다는 욕(辱)을 먹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명종(明宗) 때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호는 동고(東皐)이다. 중종(中宗) 17년에 생원이 되는 것으로 관직에 올라 명종(明宗) 20년(1565년)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와중에 죄인을 변호했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 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다시 복귀되었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덕망이 높았다.
  준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는데, 어머니 신씨는 효경편(孝敬編)의 내용대로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
  “효경에 과부의 아들과는 사귀지 말라 했느니라, 이는 과부의 자식은 자칫 버릇이 없을 수 있어 그를 경계한 말이니, 너는 반드시 남보다 열 갑절이나 더 조심하고 잘 배워서 모범이 되도록 하여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여, 형 윤경(潤慶)과 함께 종형 연경(延慶)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마침내 문신정시(文臣庭試)장원하여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사헌 때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나중에 풀려나 함경도 순변사가 되어 북족 변방의 국방을 맡았고, 다시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호남지방에 침입하는 왜적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애까지 올랐으나 1567년 명종이 승하하자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정적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그가 죽을 때 붕당(朋黨)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견을 하여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실제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혜안을 인정받기도 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胯知玉龍(과지옥룡)
胯:사타구니 과, 知:알 지, 玉:구슬 옥, 龍:용 룡.
어의: 허리 아래 옥룡(남근)은 알고 있다. 즉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 말이다.
또한 남성의 강한  기개를 나타낸 말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장렬한 기개를 뜻한다.
문헌: 일계집(日溪集).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의 무신 문기방(文紀房.?~1597)은 본관이 남평(南平)이고, 자는 중률(仲律)로,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더니 자라서도 역시 힘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명회(明會)와 함께 의병을 모아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남원에서 싸웠다. 그때 왜적은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오고, 관군은 순천을 지나 남원에 이르렀는데, 의병들은 무장한 일본군을 보자 겁을 먹고 달아나 겨우 50여 명만 남아 있었다.
  왜적의 선봉이 남원성 아래로 바싹 다가오자 그는 명회에게 강한의지로 말했다.
  “나는 오늘 이 싸움에서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그는 활을 당겨 쏘느라고 오른쪽 손가락이 문드러지자 왼손으로 쏘고, 왼쪽 손가락마저 문드러지자 이렇게 시를 읊었다.
      평생토록 순국은 나의 뜻이다.
      허리 아래 옥룡은 알고 있으리.

  허리 아래 옥룡이란 대장부를 상징하는 남근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자 아우 명회가 화답했다.
      힘을 다해 싸웠건만 고성이 되었구나.
      그 누가 나라의 위태함을 구해 주려나?

  형제는 치열한 싸움 중에도 이 글을 적삼 소매에 피로 써 놓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하니 충신의 일생이 그렇게 끝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觀命昇進(관명승진)
觀:볼 관, 命:목숨 명, 昇:오를 승, 進:나아갈 진.
어의: 관명의 승진이라는 말로, 숙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관명의 승진에서 유래했다. 공적인 일을 소신껏 추
진하여 인정받고 성공함으로써 고속 승진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조선 숙종 때 당하관 (정3품) 이관명(이관명. 1661~1733)이 어명으로 영남에 내려가 백성들의 실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수의어사 이관명 알현이오.”
  옥좌에 정좌한 숙종은 용안에 희색이 만연하여 그를 맞았다.
  “얼마나 객고가 많았는가? 그래, 백성들을 직접 살펴본 소회는 어떠한고?”
  “상감마마께서 정사를 바르게 펴신 덕택에 지방 관리들도 모두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통영에 있는 섬 하나기 후궁의 땅으로 되어 있사온데, 그곳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이 너무 많아 원성이 자자하였기로 감히 아뢰옵니다.”
  숙종은 후궁의 땅이라는 데 크게 노하였다.
  “과인이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주었기로서니 그것을 탓하여 감히 나를 비방하다니……!”
  숙종이 주먹으로 앞에 놓여 있는 상을 내리치니 박살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궐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관명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뢰었다.
  “소신이 예전에 경연에 참여하올 때에는 전하께서 이러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런데 소신이 외지에 나가 있던 동안에 전하의 성정이 이처럼 과격해지셨으니 이는 전하께 올바르게 간쟁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오니 모든 신하들을 파직시키옵소서.”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숙종은 시립(侍立)하고 있는 승지에게 명하였다.
  “승지는 전교를 쓸 준비를 하라.”
  신하들은 관명에게 큰 벌이 내려질 것으로 알고 숨을 죽였다.
  “전 수의어사 이관명에게 부제학을 제수한다.”
  숙종의 분부에 승지는 깜짝 놀라 붓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생각 밖의 일이었다. 주위에 함께 있던 신하들도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왜 그런 교지를 내리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숙종이 다시 명했다.
  “승지, 나의 말을 다 썼는가?”
  “예!”
  “그럼 다시 부제학 이관명에게 홍문제학을 제수한다고 쓰라.”
  괴리하게 여기는 것은 승지만이 아니었다. 만조백관이 웅성거렸다. 숙종은 잇달아 명을 내렸다.
  “홍문제학 이관명에게 예조참판을 제수한다.”
  숙종은 이관명의 관작을 한자리에서 세 번이나 높이어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경의 간언으로 이제 과인의 잘못을 알았소. 하여 경을 예조참판에 제수하는 것이오.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짐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오.“
  이 고사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갑자기 고속 승진하는 것을 관명승진이라 했다.
  그는 훗날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병산집(屛山集)>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官物不受(관물불수)
官:관청 관, 物:물건 물, 不:아니 불, 受:받을 수.
어의: 관청의 물건은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 엄격하여 청렴한 경우를 이른다. 공공의
물건을 사사로이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중종 때, 홍순복(洪順福)은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고암(顧庵)으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은 선비였다.
  그의 장조부(丈祖父. 아내의 조부) 김맹유(金孟鍒)가 고을 원님으로 부임하여 오자 인사차 방문하니 장조부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대의 집은 가난하여 무엇인가 재화가 될 만한 것은 하나쯤은 달라고 할 법도 한데 왜 그런 말을 하자 않는가?”
  그러자 순복이 단호하게 말했다.
  “관가의 물건이라면 저는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이에 장조부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사소한 것일 뿐인데 무에 그리 흥분하는가? 그러지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인사가 끝나고 돌아오려고 일어서자 벌꿀 5홉과 개가죽 반 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못하여 받아왔으나 집에 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받아 온 물건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정중히 말했다.
  “개가죽으로 말안장을 만들어 쓰다 보면 닳아 끊어질 걱정을 해야 되고, 달콤한 꿀을 먹고 먼 길을 가다 보면 갈증이 더해 오히려 치료를 해야 할 염려가 있어 아예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순복은 이처럼 매사에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官必崇民(관필숭민)
官:벼슬 관, 必:반드시 필, 崇:숭상할 숭, 民:백성 민.
어의: 국가의 녹을 받는 벼슬아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받들어야 한다.
즉 관리들은 국민들에게 친절하게 봉사해야 한다는 공직자의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문헌: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조선 제4대 세종(世宗) 때의 무신으로 좌의정에까지 올랐던 최윤덕(崔潤德. 1376~1465)이 모친상을 당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창원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중에 어느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서너 명의 수령들이 냇가에 천막을 치고 천렵(川獵)을 하다가 말을 타고 가는 최윤덕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저런 고얀 놈이 있나? 상복을 입은 채로 말을 타고 가다니……. 그리고 이 부근의 시골 놈이 분명한데, 어찌 수령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게야?”
  “저런 놈은 잡아다가 호되게 다스려야 해.”
  수령들은 하인을 시켜 최윤덕의 종을 잡아오게 하고 캐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느냐?”
  “예! 최윤덕이라 하고 지금 창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뭐라구? 좌의정 최윤덕 대감을 말하는 것이냐?”
  “예.”
  “어허! 이거 난리 났군. 난리가 났어!”
  수령들은 금방 사색이 되어 서둘러 천막을 걷고 술자리를 치웠다. 그리고 최윤덕의 숙소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최윤덕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백성을 종 보듯 하는 너희들의 마음부터 고치도록 하여라. 목민관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을 떠받드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수령들은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驕王之末(교왕지말)
驕:교만할 교, 王:임금 왕, 之:어조사 지, 末:끝 말.
어의: 교만한 왕의 끝이라는 말로, 태봉국 왕 궁예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덕을 베풀
지 않고 교만하면 그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삼국사기

 

  애꾸눈 왕 궁예(弓裔.?~918)의 출생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성은 김(金)씨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후궁한테서 태어난 서자로 알려져 있다.(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의 신라는 정치가 혼란하여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지엄한 왕의 명령도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이용한 음모가 판을 치게 된다. 궁예 역시 왕가의 권력다툼이 있을 때 태어났다. 갓 태어난 궁예의 생명에 위협이 닥쳐오자 후궁이 궁 안에서 담 너머에 있는 유모에게 아기를 던졌는데, 그때 유모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다쳐 피를 흘리는 궁예를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맡겨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궁예 앞에 ‘왕(王)’자가 씌어져 있는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궁예는 그것을 보고 언제인가는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 후, 청년이 된 그는 절에서 나와 도적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과 마음이 맞지 않아 그를 버리고 이번에는 북원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웠다. 양길은 궁예를 신임하여 군사까지 맡기며 후하게 대해 주었다.
  궁예는 그 힘을 빌어 명주와 철원을 함락시키고, 부자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진 장군이라는 칭송과 함께 민심을 모았다.
  그를 따르는 군사의 수효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겨서 강원도의 여러 고을을 차지했는데, 이 무렵 송악(松嶽) 출신 왕건(王建)도 그의 부하로 들어왔다. 왕건의 세력까지 합친 궁예는 도읍을 송악(松嶽)으로 정하고 왕건을 태수(太守)로 삼았다.
  양길은 부하인 궁예가 크게 성공하자 자기의 지위가 위태로워짐을 느껴 먼저 궁예를 쳤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반격하게 하여 양길을 죽이고, 신라 효공왕 5년에는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그라고 왕건에게 금성과 나주를 치게 하여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효공왕 8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개칭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 뒤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앙관청으로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나랏일을 토의케 하는 한편, 각 지방에 관청을 둠으로써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또 궁궐과 누대 등을 호화롭게 꾸며 자신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양까지 점령하여 신라의 북쪽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함으로써 그 세력이 신라를 앞지르게 되었다.
  그러자 신라의 많은 장수와 학자들이 투항하였으나 신라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잔악한 본성이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궁예는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했다. 그리고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고, 맏아들은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方袍. 중의 옷)를 걸치고 다녔다. 그는 불경 20권을 만들어 승려 석총(釋聰)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석총은 ‘이것은 불경이 아니라 사악하고 괴상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직언을 했다. 궁예는 몹시 노하여 석총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백성들의 마음은 차차 궁예에게서 멀어져 갔다.
  궁예의 왕비가 그의 난폭한 행동을 염려하여 평상심을 찾으라고 간곡히 간하였다. 화가 난 궁예는 왕비에게 말했다.
  “감히 미륵불을 가르치려 하다니……, 너 요즘 다른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지? 나는 미륵불이야, 미륵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觀心) 능력이 있어서 상대방의 눈동자만 보아도 속마음을 훤히 알 수가 있어.”
  그리고는 끔찍하게 왕비를 인두로 지져대자 아들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 말렸다. 더 화가 난 궁예는 그 자리에서 철퇴로 두 아들을 때려 죽여 버렸다. 또 신하들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장수 신숭겸(申崇謙),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이 그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궁예는 몰래 달아나다가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태봉국은 28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끝나고 고려가 열리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郊彘仲媒(교체중매)
郊:들 교, 彘:돼지 체, 仲:버금 중. 媒:중매 매.
어의: 산돼지가 중매를 하다. 고구려 산상왕에게서 유래한 말로,
뜻하지 않은 일이나 사물이 계기가 되어 일이 잘 이루어짐을 뜻한다.
문헌: 삼국사기

 

  고구려의 제8대 신대왕(신대왕. 재위165~179)은 4형제를 두었다. 첫째 남무(남무.고국천왕), 둘째가 발기(발기), 셋째가 연우(연우), 넷째가 계수(계수) 4형제였다.

고국천왕 남무가 죽자 후사가 없었던 황후가 이를 숨기고 둘째 시동생 발기를 찾아갔다.
  “대왕께서 왕자가 없으니 왕위를 계승하십시오.”
  그러자 발기는 형수인 왕후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알고, 엄연히 형님이 계신데

경솔한 행동을 삼가라며 단호히 말했다. 왕후는 부끄러웠으나 대권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셋째 시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형수인 왕후를 정중히 맞았다.
  “제가 찾아 온 까닭은 대왕이 승하하여 발기 시동생을 찾아갔으나 나를 의심하기에

숙아자비를 찾아왔습니다.”
  연우는 왕후를 맞아 상을 차리는데 고기를 썰다가 일부러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흐르자

왕후가 치마끈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었다. 궁궐로 돌아온 왕후는 고국천왕 시신을 향해 말했다.
  “연우를 왕위에 계승하라 하셨죠?”
  거짓말로 던진 말이지만 이 말이 공식화되어 연우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형 발기가 군병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궁문을 굳게 닫은 연우는 3일을 버텼는데 발기가

스스로 물러서더니 요동 땅으로 가 공손강(공손강)에게 동생 연우를 처단하겠다며 군사 3만을 요청하였다.

 공손강은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같은 고구려를 치려고 기회만 보고 있던 침이라 잘 되었다 싶어

군사 3만을 내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괘씸한 아우를 무찌르고 왕위를 탈환하시오.”
  산상왕에 오른 연우는 형 발기가 3만의 군사를 앞세워 쳐들어오자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맞서도록 했다. 막내 아우 계수가 형 발기를 향해 말했다.
  “연우 형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고 잇는 것은 의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망치려고

요동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니 죽은 뒤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겠습니까?”
  발기는 계수의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 달아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궁궐이 평정을 되찾자 산상왕은 잔치를 열고 동생 계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예우를 다하여

발기 형을 장사 지내고 온 계수에게 형제의 우의를 다한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례 후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형수 우씨를 왕후로 맞이했다.
  산상왕 7년(203) 3월에 왕은 아이 갖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흰옷을 입은 조상이 나타나더니 말했다.
  “연우야, 네가 소후(小后)첩으로 하여금 아들 낳게 될 것이니라.”
  꿈을 꾼 산상왕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산상왕 12년(208) 왕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산돼지를 보고 시위를 당겼으나 맞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자 신하들이 산돼지를 쫓아가 주통촌(酒桶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한 처녀가 뛰쳐나오더니 달아나는 산돼지를 낚아 채 쫓아오던 사람에게 주었다.

장정이 몰아도 잡지 못하던 것을 처녀가 잡아주자 신하들은 의아해 하면서 왕 앞으로 가지고 갔다.
  “누가 잡았느냐?”
  “주통촌의 처녀가 잡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산상왕이 그 집으로 가 인사를 받고 전날의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산상왕은 주통촌에 뜻하지도 않았던 소후를 두게 되었다.
  주통촌에 소후를 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후는 군사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소후는 남장을 하고 산속으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잡히고 말았다. 군사들이 칼을 빼 그녀를 죽이려하자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대왕의 명령이냐? 그렇지 않으면 왕후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입니다.”
  “그럼 듣거라. 내 뱃속에는 대왕이 남겨 준 새 생명이 있다. 내 죽음은 곧 왕자의 죽음이니
그래도 죽이겠느냐?”
  이 말을 듣고 대궐로 돌아가 왕후에게 고하자 펄펄 뛸 뿐 어찌하지 못했다.

산상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주통촌을 찾았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아이를 낳으니 산돼지로 말미암아 낳은 아기이므로 이름을 들교(郊)자에 돼지체(彘)자를 써 ‘교체’라 하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 소후로 삼았다. 서기 218년 산상왕이 승하하자 교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11대 동천왕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