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사자성어/한국 고사성어

한국고사성어10 [射琴匣(사금갑) ~ 善則得福(선즉득복)]

efootprint 2022. 9. 22. 09:10

 

射琴匣(사금갑)
射:쏠 사, 琴:거문고 금, 匣:갑 갑.
어의: 거문고 상자를 쏘라는 말로, 신라 비처왕이 궁중에 숨어 있는 사람을 제거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보름날 곡밥을 지어먹는 유래가 되었다.
문헌: 삼국유사 권1.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知王) 즉위 10년 (서기 479) 어느 날,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행차 중에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 가보십시오.”
  그래서 왕은 기사(騎士)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했었다. 까마귀가 피촌(避村.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이르자 멧돼지 두 마리가 한창 싸우고 있었다.
  돼지 싸움에 정신이 팔려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려 근처를 배회하고 있노라니까 한 노인이 물속에서 나와 서찰(書札)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이 서찰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기사가 돌아와 왕에게 드리니 왕이 말했다.
  “열어보고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게 하는 편이 낫겠구나.”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바로 폐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왕은 일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서찰을 열어보게 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금갑(琴匣.거문고 상자)을 쏘라.”
  왕은 곧 궁으로 돌아가 거문고 상자를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내전(內殿)의 분향수도(焚香修道. 불사를 맡아 하는 일) 중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추궁한 결과 궁주(宮主)와의 불륜 사실이 밝혀져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그때부터 매년 정월의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 까마귀를 기리는 날)이라 하여 오곡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풍속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사색당파(四色黨派)
四:넉 사, 色:빛 색, 黨:무리 당, 派:갈래 파.
어의: 조선 시대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 등의 당파를 가리키는 말.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되는 현상을 이른다.
문헌: 당의통략(黨議通略)

 

  사색당파는 조선시대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사대당파(四大黨派)를 말하며, 제14대 선조(宣祖) 8년(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을 계기로 3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당파가 생긴 것은 16대 인조(仁祖), 17대 효종(孝宗) 때였는데, 서인(西人)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파생되었고, 동인(東人)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갈라졌다. 그 중에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양분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권세를 잡게 되자 대북은 전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소북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니 북인이 바로 그들이다.
  당쟁의 원인은 첫째가 유학파(儒學派)의 대립이었으며, 둘째는 왕실 내 외척들의 내홍이었고, 셋째로는 정치적 제도의 미비였다. 구체적 원인은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에 의한 동서 대립을 들 수 있으나 그 뿌리는 유학의 주자학(朱子學)에 있다.
  충청도 남포의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로 계승되어 조선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어받고 그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의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은연 중 정치적으로 연대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렇게 반목과 숙청이 반복되는 당쟁은 중앙에 집중한 양반 관리들의 치열한 권력 쟁탈 경쟁 때문이었다.
  선조가 즉위한 뒤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직위인 이조전랑(吏曹銓郞)에 이해(李澥)가 천거되자 사림파의 구세력인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이를 거부했다. 이해가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으로 신세를 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끝내 전랑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김효원(金孝元)이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사람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김효원이 동대문 밖 낙산에 살았다하여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이 서쪽 정동에 집이 있었으므로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전랑(銓郞)이란 이조(吏曹) 정랑과 좌랑을 일컬으며 내외 관원을 천거, 전형하는 정5품 직책이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삼사(三司)인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했다.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요직이다 보니 그 인사권을 두고 치열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게 마련이었다.
  또 양반들은 국가로부터 과전(科田)과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는데 그들은 관직을 떠나면 그를 중심으로 동족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는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모자라 과전법(科田法)을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직전법이란 현직에 있는 사람에 한하여 토지를 지급해 주는 제도였다.
  그마저 나누어 줄 토지가 없어 신진 관료와 구 관리들 간에 대립이 생겼다.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대립도 이와 갚은 관련이 있다.
  서인은 다시 노(老), 소(少) 양당으로 갈라지면서, 노론은 송시열(宋時烈), 김익훈(金益勳)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고, 소론은 조지겸(趙持謙), 윤증(尹拯)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말기까지 정권 쟁탈을 벌였다. 당시 부제학(副提學)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인이면서도 1584년 선조 1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양 파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산해(李山海),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등 동인의 쟁쟁한 인물들이 등용됨으로써 서인의 세력은 기울고, 동인의 세력이 강화되자 내부 분열이 생기어 1591년 선조 24년에는 남인과 북인의 두 갈래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 등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등이 영수가 되었다.
  남인, 북인의 명칭의 유래는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으므로 남인(南人)이라 했고, 이발(李潑)은 북악산 밑에 살았으므로 북인(北人)이라 불렀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그로부터 7년간은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던 관계로 파쟁을 벌일 겨를이 없었으나 전란이 끝나자 곧 남인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실각되었고, 북인(北人)의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북인의 득세로 동인(東人)의 명칭은 없어졌다.
  그러나 북인 또한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내분이 일어나 대소양북(大小兩北)으로 다시 나누어지고, 대북은 다시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 피북(皮北), 탁북(濁北) 등의 6파로 분열되었으며, 소북 또한 청(淸), 탁(濁) 양북으로 분파되었다. 대소 양북은 광해군(光海君)의 즉위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이 세력을 잡아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집권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대북은 몰락했다. 그 후 서인은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분파되었으며, 김유(金瑬)를 중심으로 한 노서(老西)와 이를 반대한 소장파 소서(少西)로 다시 나뉘었다. 그리고 이들은 원당(原黨), 낙당(洛黨), 산당, 한당 등으로 세분되어 대립했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동안에도 남인은 이원익(李元翼)의 등용으로 명맥을 이어왔고, 북인 중 대북은 전멸했으나 소북은 남아서 남, 소북의 3파 대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3색이라 일컬었고, 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 양론으로 분파되니 남인, 서인, 노론, 소론을 4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세자 책립문제를 둘러싸고 노소론이 충돌한 결과 소론이 승리하고 노론이 참패했으며, 또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인하여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 수십 명의 서인 지도자들이 숙청을 당하여 노론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경종 다음에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신임사화의 참상을 목도한 왕은 노소 양파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다음 왕인 정조(正祖) 또한 전왕의 시책을 계승하여 탕평에 주력했으므로 이로부터 당쟁은 크게 완화되었으나 권세는 노론이 장악했다. 그러나 영조 때에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의 3대간은 외척의 세력 다툼은 잦았으나 이전과 같은 참극은 없었고, 고종(高宗)의 등극 후는 대원군(大院君)의 파당 타파와 인재등용 시책으로 당파 관념이 점차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당쟁은 백성들로 하여금 상전 앞에 아부해야 살아남는 풍토를 조성하게 해 서로 중상하고 반목하는 불신 풍조가 계속되었다.
  이런 붕당(朋黨)은 내정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와 국방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쳐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국란을 초래하여 나라 발전에 엄청난 지장을 가져왔다.
홍경래란(洪景來亂)과 동학혁명(東學革命) 등도 당쟁의 산물이었다.
  또 밖으로 청(淸), 일(日), 러(露) 등 인접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된 것도 340여 년간 지속되어온 당쟁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獅熊之鬪(사웅지투)
獅;사자 사, 熊:곰 웅, 之:어조사 지, 鬪:싸움 투.
어의: 사자와 곰의 싸움이라는 말로, 근대 불교계의 거두 만공 스님과 만해 스님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곰과 사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다툼을 이른다.
문헌: 만해한용운연구(萬海韓龍雲硏究)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제 백담사(白潭寺)로 가서 연곡(連谷)에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의 계명은 봉완(奉琓)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홍성(洪城)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東學革命)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시베리아 등지로 방랑하다가 돌아와 불교를 개혁하고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불교 대중화와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만해는 일제 때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치욕적으로 생각하여 민적이 없이 살았다. 그로 인하여 받은 대가는 혹독했다.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식량과 의류 등 일체의 생활필수품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런 고초 속에서도 무남독녀 외딸 영숙(英淑)은 왜놈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며 집에서 손수 공부를 가르쳤다.
  1937년 봄, 조선총독부에서는 불교를 친일화시키려고 전국 31개 본산의 주지(住持)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자리에서 마곡사(麻谷寺)의 만공(滿空) 송도암(宋道巖. 1871~1946)선사가 총독부를 향해 일성을 토했다.
  “옛날에는 시골 승려들이 감히 장안에 들어서지도 못했고, 어쩌다 몰래 들어오면 볼기도 때리고 엄한 법률로 다스렸는데, 이제 총독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볼기 맞던 시절이 그립도다. 우리를 여기에 부른 것은 소위 사찰령을 내려 승려의 조직을 휘어잡으려는 속셈 같은데, 만일 그리한다면 총독부가 무간지옥(無間地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음모를 꾸미는 총독이야말로 진짜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만공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자 장내는 아연 긴장하여 총독 미나미 지로((맘차랑)를 주시했다. 금방 무슨 날벼락이라도 내리지 안겠는가 마음을 졸이며 만공이 무모하다고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헌병이 들이닥쳐 만공 스님을 체포하려 했다. 그런데 총독이 무슨 생각에선지 이를 제지시켰다. 그리고 참석한 스님들을 전부 총독관저로 초대하여 다과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만공의 호통에 스님들의 친일화 계획을 포기했던 것이다.
  만공은 한달음에 만해 스님을 찾아갔다. 만공이 총독을 호되게 꾸짖은 서식은 삽시간에 장안에 퍼졌다. 그런데 그 일을 미리 알고 있던 만해는 만공이 찾아오자 매우 반가이 맞았다.
  만해가 입을 열었다.
  “기왕이면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의 주장자(拄杖子)로 총독의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겼더라면 시원했을 걸…….”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막대기 싸움은 곰(熊.웅)이나 하는 짓이고, 호령은 사자라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까 만공 자신은 사자가 되고, 만해는 곰이라는 이야기였다.
  만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령은 새끼 사자가 하고,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법이지.”
  그리되면 만공은 새끼 사자이고, 만해는 큰 사자라는 뜻이다.
  당대 불교계의 걸출한 두 선사는 서로 자웅을 겨룰 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만해가 떠나자 만공은 ‘이제 한양에 가도 만날 사람이 멊구나.’ 하면서 한양에는 발걸음을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三馬太守(삼마태수)
三:석 삼, 馬:말 마, 太:클 태, 守:지킬 수.
어의: 세 마리의 말만 가진 태수라는 말로, 숙종 때 사람 송흠에게서 유래했다. 청백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헌: 고사성어 대사전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이 임기를 마친 다음 다른 부임지로 떠날 때에는 고을에서 감사의 표시로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중종(中宗) 때 송흠(宋欽.1459~1547)은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있다가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부임해 갈 때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그 세 마리 말 중 한 필은 본인이 탈 말이었고, 나머지 두 필은 어머니와 아내가 탈 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그는 그처럼 청렴하기도 했지만,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이 심할 때에는 물러나 후진들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며 조용히 지낸 처세가이기도 했다.
  이와 흡사한 이야기로 <고려사(高麗史)> 권121 열전34에 최석(崔奭)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최석(崔奭)은 어렸을 때 이름은 최석(崔錫)이라 했는데 청렴한 관리였다. 그때에도 역시 임기가 끝나는 부사에게는 일곱 필의 말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평(昇平. 지금의 순천)부사였던 그는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일곱 필의 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초 그에게 주려던 말이 새끼를 낳아 여덟 필이 되자 그 새끼 말까지도 그곳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의 듯을 기려 비를 세우니 바로 팔마비(八馬碑)다.
  지금도 순에서는 ‘팔마의 고장’이라 하여 청백리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蔘復三斤(삼부삼근)
蔘:인삼 삼, 復;돌아올 부, 三:석 삼, 斤:무게 근.
어의; 인삼 세 근을 되찾다. 즉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해 찾지 않았던 물건이 뜻밖에 다시 되돌아 왔음을 의미한다.
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오리집(梧里集)>

 

  오리정승(梧里政丞)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억재(億載)의 아들이었다. 이원익이 금부사(禁府使)로 있을 때 난리가 날 것이라는 등 시국이 뒤숭숭해서 선조(宣祖)는 인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다. 그러자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들어와 말하였다.
  “어명대로 구하긴 했습니다만 그가 워낙 쇠약해 있으니 삼(蔘) 서 근만 하사해주시면 기력을 키워 봉사할 것입니다.”
  선조는 어련하랴 싶어 믿고 삼 서 근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데리고 들어온 인물이 석 자 세 치 관복이 끌릴 정도로 작은 체구에 얼굴은 말처럼 길쭉하여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선조는 어이가 없어 내뱉듯이 말했다.
  “삼 서 근만 버렸군!”
  그 사람이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었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진(蒙塵) 길이라 해도 수라가 번번이 늦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라 상궁을 불러 나무라니 그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원익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와서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보고는, 뙤약볕에 한참씩 드러누웠다가 그제야 들여보내기 때문에 이렇게 늦었사옵니다.”
  그래서 이원익을 불러 탓하자 그가 말했다.
  “이 혼란 중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사옵니까? 그래서 신이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본 것이고, 만약에 독이 들었을 경우 볕에 누워 있으면 빨리 퍼질 것이라 여겨 그렇게 신의 소견껏 하였을 뿐이옵니다.”
  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 참, 삼 서 근 다시 찾았군!”
  이원익은 1573년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사(黃海道使)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뒤에 원익은 팔십을 넘기고, 원로대신으로서 광해군 때 여주로 귀양가 있다가 인조반정엔 영의정(領議政)에 있었으며, 광해군을 죽이고자 할 때 대비(大妃)에게 간청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세상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보고야 눈을 감았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三寸舌擊退敵(삼촌설격퇴적)
三:석 삼, 寸:치 촌, 舌:혀 설, 擊:칠 격, 退:물러갈 퇴, 敵:원수 적.
어의: 세치 혀로 적을 물리치다.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서희 장군이 이론으
로 따져 물리친 고사에서 유래했다. 웅변의 중요성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야기 한국사(韓國史)

 

  거란(契丹) 916년, 고려 건국 2년 전에 중국 북쪽에 생성된 나라로, 발해(渤海)를 멸하여 동단국(東丹國.동쪽 글안)을 세우고, 또 진(晋)나라를 합쳐서 국호를 대요(大遼)라 했다.
  고려 태조(太祖)는 거란을 오랑캐로 여겨 거란에서 보낸 사신 30명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보낸 낙타 50필도 굶겨 죽여 버렸다. 그것은 거란이 무도한 나라임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거란에게 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송(宋)나라를 쳐서 중국을 통일하려던 거란은 고려의 제4대 광종(光宗)이 송나라와 국교를 맺자 제6대 성종(成宗)12년에 요동을 지키고 있던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치게 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993년 윤서안(尹庶顔)을 선봉장으로 내세웠으나 청진강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고려는 시종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942~998)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임명해서, 오랑캐를 막도록 조치하였다.
  왕은 안북부(安北部)까지 나가 장수들을 독려하는 한편, 예부소경(禮部少卿) 이몽전(李蒙戰)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적진으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적진의 정황을 살피고 온 이몽전이 말했다.
  “적장의 말이 고려가 압록강까지 나온 것은 거란 땅을 침범한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왕은 서희 등 장군들과 중신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적장은 누구이고, 병력은 얼마나 되는고?”
  왕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적장은 소손녕이고, 80만은 되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저들 거란은 송나라를 쳐서 중원(中原)을 통일하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으니 우리를 먼저 쳐서 송과 손을 끊게 하겠다는 심산이 아니겠소? 따라서 송과 손을 끊으면 물러가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이오?”
  박양유(朴良柔)가 나서서 말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발해의 옛 땅 대동강 이북을 떼어 주면서 화평책을 써야 할 줄 압니다.”
  이에 서희(徐熙)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태조대왕께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시려는 큰 뜻으로 확장해 놓으신 것을 쉽사리 적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거란이 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싸우지도 않고 국토를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 고려의 수치입니다. 신이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서희의 자신 있고 강경한 태도에 좌중은 잠잠해졌다. 이지백(李知白)이 말했다.
  “신도 중군사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싸우지도 않고 국토를 내준다는 것은 태조대왕께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려의 조정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거란군 진영에서는 사신 이몽전이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므로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게 되었다.
  거란군은 벌판 싸움엔 능하였으나 험준한 산이 우뚝우뚝 솟은 고려 땅에서는 어떻게 공격을 해야 좋을지 지지부진했다.
  적장 소손녕은 당황하여 고려로 사람을 보냈다.
  “귀국의 대신을 우리 진으로 보내면 서로 회담을 한 뒤에 적절한 결정을 내리겠소이다.”
  그러나 거란군의 진중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서희가 나서며 말했다.
  “신이 어리석고 부족하오나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짓겠나이다.”
  “장군이 간다면 과인도 안심하겠소. 그러나 중군사의 중책은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폐하! 중군사나 상군사가 없어도 반드시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만약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사오니 만수무강하소서.”
  서희는 적진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소손녕의 군막으로 인도된 서희는 소손녕과 미주 앉았다.
  소손녕은 점잔을 빼며 위협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장군! 고려국은 신라 땅을 근거로 건국된 나라임에 틀림없소. 그리고 우리 거란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난 나라임이 확실하오. 그런데 귀국이 우리 거란의 영토인 옛날 고구려 땅을 침범했소. 그리고 귀국은 국경이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적대시하고 멀리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소.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 이유도 여기에 있소. 그러므로 첫째, 귀국에서 즉시 우리 영토인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조공을 바칠 것이며, 둘째 송나라와 단교를 하면 군사를 돌이키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건너 개경을 무찌를 것이니 이에 대한 장군의 의견을 말하시오.”
  서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목조목 따지며 설득했다.
  “우리 고려가 신라에서 일어났다고 장군은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분명히 고구려의 후신이오. 때문에 국호도 고구려를 줄여 고려라고 하였소. 국경문제를 말한다면 거란의 동경부까지가 모두 우리 고려의 영토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째서 우리나라가 침범하였다고 하시오? 그리고 우리가 귀국에 조공을 못한 것은 압록강 연안의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혀서 그런 것이었소. 이제라도 여진족을 좇아버리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돌려준다면 조공을 하겠소.”
  소손녕이 말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귀국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귀국이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우리나라를 오랑캐처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군사를 움직인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송을 친다면 귀국에서는 어떻게 하겠소?”
  “남의 나라를 먼저 쳐들어간 일이 없는 우리가 어찌 다른 나라의 싸움에 끼어들겠소? 우리 민족은 예부터 평화를 즐기는 순박하고 온후한 민족이오.”
  이렇게 논리 정연한 서희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회담의 내용을 자기 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그 회답을 서희에게 전하였다.
  “우리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국은 압록강 이남의 땅에 성을 쌓아 공로(貢路: 조공을 바치러 다니는 길)를 개척하여 매년 사신을 보내고 서로 교통하겠다면 군사를 회군시키라고 했소. 그리하겠소?”
  “좋소. 그리하겠소.”
  이리하여 중군사 서희 장군은 세 치의 짧은 혀 하나로 소손녕이 거느린 80만 대군을 물리쳤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삼촌설 격퇴적(三寸舌 擊退敵)’ 또는 ‘서희담판(徐熙談判)’이라 이르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尙不開箱(상불개상)
尙:아직 상, 不:아니 불, 開:열 개, 箱:상자 상.
어의: 아직 상자를 열지 않았다는 말로, 숙종 때 한 청렴한 선비의 삶에서 유래했다. 곧고 깨끗하며 고고한 사
람을 이른다.
문헌: 금계필담(錦溪筆談)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남산의 가난한 선비들을 생각해서 약밥 한 상자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남산골에 가서 굶주림이 가장 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도록 하라.”
  어명을 받은 내관(內官)은 남산골에 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한 집을 살펴보니 집이 반쯤은 헐어지고, 뜰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 사람의 발자국이 없었다. 그래서 희미한 등잔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뒤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아낙네의 힘없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좋으련만…….”
  그러자 역시 힘이 없는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구들에 불기가 끊어진 지도 사흘이 지났으니 어디서 따뜻한 물을 구하겠소?”
  내관은 이 집이 가장 가난한 집이라 생각하고, 그 약밥 상자를 창문을 열고 밀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정월 대보름날, 숙종은 옛일을 생각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낸 약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홍문관 이서우(李瑞雨.1633~?)가 말했다.
  “전하! 소신이 그때 그 약밥을 받았었나이다. 신은 그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아내와 함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창문으로 약밥 한 상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약밥을 물에 말아 아내와 함께 여러 날을 연명하여 주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 있었나이다.”
  “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럼 그 약밥 상자 속에 다른 물건은 들어 있지 않았던가?”
  “예, 은덩이 하나가 함께 들어 있었나이다.”
  “그것이면 한 재산으로 족했을 것인데?”
  “네에! 신은 그것이 어디의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까닭으로 지금까지 상자를 열지 않고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나이다.”
  숙종은 사경을 헤매는 가난 속에서도 함부로 남의 재산은 추l하지 않은 이서우의 청렴함에 감탄하고, 그를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써 문주사(文珠寺) 풍담대사비(偑潭大師碑)를 썼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床廛之女(상전지녀)
床:책상 상, 廛:가게 전, 之:어조사 지, 女:계집 녀.
어의: 상전에 간 여자라는 말로, 공연히 싱겁게 피식피식 웃는 사람을 이른다.
직접 거론하기 거북할 때 묵시적으로 지칭하는 경우를 비유한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야담(野談)

 

  왕정(王政)시대의 궁중(宮中) 나인(나인)들의 생활은 남녀 관계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주고자 동성끼리 결혼을 시켜 일반가정과 같이 영감. 마누라라고 부르며 살게 하였다. 이때 임금은 그들에게 살림 도구 일체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들은 가구로 자개장을 애용했는데 그 때문에 자개장을 동성결혼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암소 뿔을 깎아 ‘각신(角腎)’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생활의 도구로 썼다. 만드는 법은 암소의 뿔을 두께 한 푼 정도로 얇게 속을 후벼낸 후 그 안을 솜으로 채우고 더운 물에 담가두면 부드럽게 탄력이 생겨 남성 대용품으로 제법 쓸 만했다고 한다.
  이 각신은 아녀자들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상전이라는 일용 잡화상에서 팔았다. 그래서 장옷을 쓴 여인이 상전(床廛)에 들어와 말을 하지 않고 씽긋이 웃으며 돈을 내밀면 주인은 눈치로 알아차리고 종이에 싼 그것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하나같이 생존 기간이 짧았는데 남녀관계를 탐닉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중에는 왕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이 다수여서 경희궁(慶熙宮)에 따로 수용하였는데, 일제시대 때 궁의 여러 건물이 이축될 때 그런 물건들이 수십 개나 쏟아져 나와 외국인 수집가에게 고가로 팔렸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色漢明堂(색한명당)
色:빛 색, 漢:사나이 한, 明:밝을 명, 堂:집 당.
어의: 색한. 즉 여색을 좋아하는 사내와 명당이라는 말로, 여자의 은밀한 부위를 은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문헌: 태평한화(太平閒話). 어우야담(於于野談)
 

이(蝨.슬) 한 마리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해 지관(地官)과 함께 묏자리를 보러 갔다. 마침 보드라운 여인의 인체(人體)를 두루 살피다가 두 유방(乳房) 사이에 이르자 지관이 말했다.
  “내외용호(內外龍虎)가 비록 분명하긴 하나 앞이 높고 뒤가 낮으니 불가하오.”
  그리고 다시 배꼽 위에 이르더니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옥야천리(沃野千里)에 구멍이 있어 주산(主山)과 용호(龍虎)가 흐려지니 불가하오.”
  또다시 한참을 더듬어 배 밑 두 다리 사이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곳이 명당(明堂)이오. 방서(方書)에 전하기를 토산(土山)의 음(陰)이 무성한 곳이 가위 정혈(正穴)이며, 그 정혈 아래에 무덤을 쓰면 참으로 백자천손(百子千孫)이 만세향화(萬歲香火)한다고 했소이다. 이곳으로 정하시오.”
  그러자 이란 놈이 크게 기뻐하며 일꾼을 사서 무덤을 파려고 하자 벼룩 한 마리가 뛰어나와 얼굴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네 이놈, 어떤 놈이 감히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선묘(先墓)에 암장을 하려 하는고?”
  이가 크게 놀라 그 사연을 물으니 벼룩이란 놈이 사람의 중심부에서 깊게 파인 골을 가리키면서 호통을 쳤다.
  “이놈! 이것이 홍 생원(生員) 댁의 친산쌍분(親山雙墳)이란 사실을 네놈이 몰랐단 말이냐?”
  이란 놈은 벼룩의 호통에 혹시 명상을 잘못 걸었나 싶어 제 아비의 무덤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아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生樂王兄 死後佛兄(생요왕형 사후불형)
生:날 생, 樂:즐길 요, 王:임금 왕, 兄:맏 형,  死:죽을 사, 後:뒤 후, 佛;부처 불.
어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은 뒤에는 부처의 형이다.

양녕대군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신의 팔자가 최 고로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셋째 아우 충녕(忠寧.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주유천하하고 있을 때 스님이 된 둘째 동생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의 초대를 받았다.
  “형님 못 뵈온 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2월 15일은 석가의 열반일이오니 부디 오셔서 마음속의 정한도 풀고 형제간의 우애도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제(小弟) 다소의 음식을 장만해 놓고 기다리겠나이다.”
  양녕은 휘하의 수족들을 거느리고 효령이 수도하고 있는 회암사 부근으로 가서 사냥을 한 후, 잡은 짐승을 사찰의 경내에서 구워먹으며 술을 마셨다. 냄새가 사찰의 경내에까지 진동하자 효령이 형님이 온 줄 알고 마중을 나오니 양녕이 기생들까지 끼고 앉아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형님! 이 아우의 입장을 살펴서라도 경건해야 할 절 경내에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효령대군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양녕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兄佛.형불)이 될 테니 무엇이 두렵겠느냐? 또 왕이니 왕세자니 하는 것은 다 괴로운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 이렇게 자유로이 만날 수 있으니 얼마냐 좋으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마음속은 진실로 기쁨만 충만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書衾一籠(서금일롱)
書:책 서, 衾:이불 금. 一:한 일, 籠:농 롱.
어의: 40여 년간 높은 벼슬에 있었던 사람의 재산이 책과 이불과 농 하나 뿐이라는 말로, 청빈한 선비정신을 가리킨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34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寶文閣) 학사를 지낸 안성(安省.1344~1421)은 호는 설천(雪泉)이고, 본관은 경기도 광주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작을 少자와 눈 목目자. 즉 소목(少目)으로 불렸다. 어느 날 왕이 그의 이름을 보고 소少자와 목目자를 합쳐 성(省)이라고 작명하여 하사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태종(太宗) 때까지 봉직하며 참찬(參贊)과 평안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그는 고려에서 조선까지 4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했으나 재산이라곤 책과 이불과 장롱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농마저 부서지자 부인 송씨가 푸념을 했다.
  “이제 수리할 종이도 없으니 무엇으로 고칠꼬?”
  “허허! 무슨 새삼스런 걱정이오? 차음엔 그 농조차 없지 않았소?”
  “남들은 10년만 벼슬해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한다는데 40년 벼슬에 이 꼴이라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는 그간 벼슬을 했으나 종이 한 장도 자기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아니했다. 그야말로 책과 이불과 농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 2년에 안성은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宋京留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
  태조는 이런 신하를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내살렸다고 한다.
  안성은 눈은 작았지만 티 없이 맑고 깨끗해 누구도 그에게 견줄 수 없는 백설이었다. 그래서 청백리로 길이길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薯童作謠(서동작요)
薯;참마 서, 童:아이 동, 作:지을 작, 謠;노래 요.
어의; 서동이 노래를 지었다는 말. 백제의 무왕이 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의 변죽을 울려 목적한 바를 이루는 행위를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삼국유사(三國遺事)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재위600~641)의 어머니는 과부로 남지(南池)라는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 장(璋)을 낳았다 그러나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에는 법왕(法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무왕의 아명은 그가 항상 마를 캐다 팔아 생활하였으므로 마 薯(서)자를 써서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들어가서 그곳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친하게 사귀었다. 그리고 한 편의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고 다니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려고
     밤마다 서동을 만나 함께 지낸다네.
  동요(童謠)는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 마침내 대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의 백관(百官)들은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극력 탄핵하여 먼 시골로 유배(流配)시키도록 했다. 공주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후(王后)는 순금 한 자루를 노자로 몰래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자기가 서동이라 말하고 앞으로 잘 모시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를 잘 알지 못하였지만 어쩐지 미덥고 친근감이 들었다. 그래서 함께 백제로 가서 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당장 먹고 살 생활비를 걱정하자 선화공주는 모후가 준 금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러자 서동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황금입니다. 우리 부부가 평생 동안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보물이에요.”
  “이게 그리 중한 것이오? 이런 것은 내가 마를 캐던 흙 속에 많이 있었는데…….”
  공주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입니다. 지금 그곳을 안다면 그 보물을 캐 왕궁(王宮)으로 실어 보내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서동과 공주는 황금을 잔뜩 쌓아놓고 용화산(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로 가서 수송방법을 물었다.
  지명법사는 흔쾌히 응락했다.
  “내가 빠른 시간 내에 당신들이 원하는 왕궁으로 보내주겠소. 그러니 그 금들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선화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지명법사에게 맡겼다. 법사는 황금과 공주의 편지를 신라의 궁궐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진평왕으로부터 부부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서동은 막대한 금을 가지고 사비성(泗泌城)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인심을 얻고 드리어 왕위에까지 오르니 그가 바로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재위600~641)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仙女翼衣(선녀익의)
仙:신선 선, 女:계집 녀, 翼:날개 익, 衣:옷 의.
어의: 선녀의 날개옷이라는 마로,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옛날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 전에는 빠져나갈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이야기 한국사(韓國史), 한국전래동화(韓國傳來童話)

 

  노총각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다급하게 애원했다.
  “아저씨, 나 좀 살려주시오. 저쪽에서 사냥꾼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고 있소.”
  노총각은 사슴이 가엾어 얼른 나뭇단 밑에 숨겨 주었다. 잠시 후 사냥꾼이 쫓아와 물었다.
  “여보시오. 조금 전에 사슴 한 마리 도망가는 것 못 보았소?”
  “아, 예. 방금 저 산 너머로 도망치더군요.”
  사냥꾼은 청년이 가리켜 주는 쪽으로 사라졌다.
  사슴은 죽음을 면하게 되자 노총각에게 거듭 사례를 하며 말했다.
  “고맙소. 나는 이 산 산신령의 아들인데 봄 날씨가 따뜻해서 사슴으로 변장하고 놀러 나왔다가 당신 덕에 큰 봉변을 피했소. 그래서 보답하고자 하니 바라는 것을 말해 주시오.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리다.”
  노총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내가 아직 총각인데 예쁜 색시를 하나 구해주시오.”
  사슴은 잠깐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소. 저 절벽을 올라가면 그 위에 연못이 있을 것이오. 보름날이면 그곳으로 천상에서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할 텐데 그때 마음에 드는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어 두시오. 그러면 그 선녀는 천상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니 그때 그 선녀를 잘 설득하여 아내로 삼으시오. 그러나 자식을 셋 낳기 전에는 결코 날개옷을 보여주지 마시오. 만약 그 전에 보여주면 천상으로 올라가버릴 것이니…….”
  말을 마친 사슴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며칠 후 보름날, 노총각은 사슴이 가르쳐 준 대로 절벽 위로 올라 가 보니 과연 연못이 있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노총각은 살금살금 기어가 한 선녀의 옷을 품속에 감추고 바위 뒤에 숨었다.
  이윽고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저마다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한 선녀가 옷이 없어 당황해하고 있었다.
  노총각은 선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쩌나, 날개옷이 없어졌나보군요. 깊은 밤에 산속에 선녀님 혼자 있으면 산짐승들에게 위험할 테니 우선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렇게 해서 노총각은 예쁜 선녀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부부기 되어 함께 살았다.
  세월이 흘러 부부는 아들 형제를 두었다. 아내는 날개옷은 잊어버린 듯 행복하게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그랗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아, 내 날개옷은 누가 가져갔을까? 한번 입어보고 싶은데…….”
  남편은 아내의 그런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아이들이 셋 되기 전에는 절대 날개옷을 내어주지 말라던 사슴의 당부를 잊고 숨겨두었던 옷을 꺼내주었다.
  아내는 그 옷을 보자마자 얼른 주워 입고, 아이들을 한쪽 팔에 하나씩 각각 안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아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여린 마음이 아내를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先訪貴客(선방귀객)
先:먼저 선, 訪:꾀할 방, 貴:귀할 귀, 客:손 객.
어의: 먼저 방문하는 사람이 귀한 손님이라는 말. 조선 중종의 비, 문정왕후가 간택받은 일화에서 유래했다.
문헌: 국조보감(國朝寶鑑),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이 계비(繼妃)를 간택하고자 교지(敎旨)를 내렸다.
  간택(揀擇)하는 날, 윤지임(尹之任)도 딸을 응모시키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병이 나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경쟁자는 파성군(坡城君) 윤금손(尹金孫)의 딸이었고, 윤금손은 이미 판서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윤지임은 자기의 불운을 한탄하며 점을 쳐보기로 했다.
  한편, 점쟁이는 운세를 보니 귀한 손님이 찾아올 괘가 나오는지라 하인에게 내일 아침 맨 먼저 오는 손님은 귀한 손님(先訪貴客.선방귀객)이니, 잘 모시라고 일렀다.
  다음날 아침, 윤지임이 점쟁이를 찾아가니 융숭한 대접을 하며 딸의 사주를 보고 말했다.
  “국모가 될 사주요. 그리고 당신은 부원군(府院君)이 돌 것이요.”
  그때 윤지임은 6품 별좌(別坐)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간택 일이 되었으나 윤씨 딸의 사정을 전해들은 왕은 간택 날을 연기해 참석하게 해 주었다.
  이래서 윤지임의 딸이 마침내 왕비가 되니, 그가 바로 지금 서울의 태릉에 묻혀 있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일반 시장이나 가게에서도 첫 손님을 개시 손님, 즉 선방귀객이라 하여 중요시하고 있다.
  문정왕후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명종(明宗)이고, 남동생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주도한 윤원형(尹元衡)이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국시였던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에 관계없이 불교의 중흥을 도모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善善及孫(선선급손)
善:착할 선, 及:미칠 급, 孫:손자 선.
어의: 착하고 좋은 일을 거듭하면 그 자손에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말. 김유신의 손자에 얽힌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3권

 

  김유신(金庾信)의 맏손자 김윤중(金允中)은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 대아찬(大阿湌)을 지냈다. 왕이 그의 할아버지의 은공을 못 잊어서 그를 총애하니 왕의 친척들이 몹시 시기했다.
  때는 중추 보름이었는데 왕이 월성(경주) 남산의 꼭대기에 올라 시종관과 함께 술을 마시고, 김윤중을 불러올 것을 명하니, 왕의 친척 중에 어떤 자가 불평을 했다.
  “종실 친척들 중에 사람이 없지 않은데 구태여 가깝지도 않은 사람을 부르시니 어찌 친척들과 친하다 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모두 윤중의 조부 덕이오. 만약 공의 말과 같이 은공을 잊어버린다면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한 의리가 아니오.”
  왕은 윤중을 불러 가까이 앉히고 그의 조부의 훌륭함을 칭찬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善則得福(선즉득복)
善:착할 선, 則:곧 즉, 得:얻을 득, 福:복 복.
어의: 착하면 복을 받는다. 남에게 좋은 일을 베풀면 그만큼의 보답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조선의 제17대 효종(孝宗.1619~1659)이 폐포파립(弊袍破笠:헤진 옷과 부서진 것) 차림으로 잠행(潛行.임금이 남몰래 행동함)을 나갔다. 때는 마침 한여름이어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날이 저물어 그날 저녁을 지낼 마땅한 곳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낭랑하게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여름에 글을 읽다니, 궁금하기도 하고 하룻저녁 잠자리도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찾아갔다.
  그 집 대문에 이르러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부르니까 한 중년 선비가 나왔다.
  “자나가던 나그네인데 날이 저물어 그러하니 하룻밤 유숙하게 해 주시오.”
  “워낙 누추해서…….”
  “한데보다는 낫겠지요. 아무 데나 좋으니 허락해주시오.”
  “정히 그러시다면 들어오십시오.”
  이리하여 방에 들어서니 한쪽 벽에 ‘아독무어(我獨無魚. 나 혼자만 물고기가 없다)’ 라고 쓰여진 글귀가 보였다.
  효종은 그 글을 써 붙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주인장. 저 글이 무슨 뜻이오?”
  “아. 아실 것 없소이다. 그저 장난으로 써놓은 것일 뿐이오.”
  이윽고 밥상을 차려왔다. 그런데 밥이 녹쌀밥(메밀밥)이었다. 거기에다 반찬이라곤 달랑 배추국 하나였으나 시장이 반찬이라 효종은 달게 들었다. 그런데 주인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어보나마나 손님을 대접하느라 밥이 없어 굶는 것이 분명했다. 효종은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물었다.
  “저 ‘아독무어’ 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오?”
  “재차 물으시는 걸 보니 호기심도 많소이다. ‘공부는 했으나 고기가 없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올시다.”
  “허허!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마저 말해 보시구려.”
  “별 뜻 없는 글인데 물으시니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꾀꼬리와 왜가리가 살았는데 서로 자기가 노래를 잘한다고 시비가 붙었답니다. 그래서 제3자에게 판결을 받자고 했죠. 그리하여 하늘 높이 유유자적하며 나는 솔개에게 부탁했읍죠. 그런데 약삭빠른 왜가리는 판결 전날 밤 붕어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솔개를 찾아가 자기를 뽑아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다음 날, 꾀꼬리와 왜가리는 솔개를 찾아가서 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지 가려 달라고 하며 꾀꼬리가 먼저 아리따운 목소리로 한 곡조를 기가 막히게 봅았죠.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 입니까! 솔개가 면박을 주며 말했답니다.
  ‘아니, 그것도 노래라고 불러? 영락없이 돼지 목 따는 목소리지,’ 
  그리고는 왜가리에게 말했죠. ‘다음은 왜가리 선생께서 한번 불러보시지.’
  그러자 왜가리가 쾍! 쾍! 소리를 질러댔죠. 솔개는 무릎을 탁 치면서 ‘허허. 과연 사내대장부 목소리로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구먼!’ 하고 칭찬하더랍니다. 그런 사정을 글로 써 놓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효종이 말했다.
  “주인장! 과거 시험이 있다고 하거든 꼭 올라가서 응시해 보시구려. 그리고 그때 한양에 가거든 종로의 어디어디에서 나와 만납시다. 마침 이번 시험관이 나와 절친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니 도움이 될 것 같소.”
  그리고 효종은 상경하자마자 별과를 본다는 방(榜)을 전국에 내걸게 했다.
  당연히 아독무어 선비도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된 장소에서 그 나그네를 만나니, 나그네가 말했다.
  “이번 시험은 백 보 앞에다 세필(細筆)로 솔개 연(鳶)자를 써놓고 무슨 자냐고 물어서 알아맞히는 것이라고 합디다.”
  선비는 이제 장원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과장에 들어가니 팔도에서 올라온 응시자들이 우글우글했다. 그런데 과거를 마치고 나온 선비들이 모두들 툴툴거렸다.
  “세상에 무슨 놈의 과거가 이래? 시제를 세필로 보일락 말락하게 써놓고 읽으라니 천리안(千里眼)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걸 읽겠어!”
  드디어 선비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과장에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든 생각이 머리에서 싹 달아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과시관이 말했다.
  “저기 쓰인 글자가 무슨 자인지 읽어 보시오.”
  선비는 입이 얼어붙은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묻겠소. 어서 말하시오.
  “…….”
  “이제 마지막이오. 어서 말하시오.”
  선비는 다급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예. 빙빙 연자입니다.”
  효종은 낙심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공부는 많이 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선비도 실망하여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데 그제야 ‘아. 솔개 연자지!’ 하고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지나갔다.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만 것이었다. 억수로 운이 없었다.
  선비는 이제 자신은 틀렸고 누군가에게 일러 주어 좋은 일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에게 자기는 ‘빙빙 연’ 자라고 해서 낙방했는데 ‘솔개 연’자라고 말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 젊은이가 과장으로 들어갔다.
  한편 과시관으로 앉아있던 효종은 이제 흥미가 없었다. 워낙 한 사람만을 위한 과거였던지라 정답을 알 사람도 없을 터여서 어찌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답을 한양음으로 말할까요? 아니면 시골음으로 말할까요?”
  효종은 그 말이 흥미로웠다.
  “두 가지 다 말해 보아라.”
  “한양음으로는 솔개 연이올시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하늘에서 빙빙 돈다고 해서 빙빙 연이라고도 합니다.”
  젊은이는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그 선비에게 보답하고자 순간적으로 재치를 발휘했던 것이다.
  “뭐, 빙빙 연? 그럼 조금 전 그 선비도 맞힌 거잖아. 내가 시골음을 몰랐구나. 여봐라! 조금 전 그 과객을 찾아 들여라! 어서.”
  그리하여 그 선비가 다시 불려왔다.
  “미안하오. 선비가 장원이오. 조금 전에는 내가 시골음을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급제하여 후에 한 사람은 평양감사(平壤監司)가 되고, 또 한사람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