鑷拔白髮(섭발백발)
鑷:족집게 섭, 拔:뽑을 발, 白:흰 백, 髮터럭 발.
어의;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다. 늙지 않고 오래 살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욕구를 이르는 말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늙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머리털을 염색하고, 주름살을 펴는 성형 수술을 한다. 또 오래 살고 싶어서 지렁이나 뱀 같은 혐오식품도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려고 불로초(不老草)를 구했던 것도 다 이런 뜻이었다.
우리 역사의 고사 중에 연안 이씨 이호민빈(李好閔. 1553~1634)은 호가 오봉(五峯)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며, 조선 선조(宣祖)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선비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명나라에 가서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가 늘그막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항상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았다. 이것을 본 이덕형(李德馨)이 물었다.
“벼슬도 이미 높은 지위까지 누리셨는데 더 이상 무슨 소망이 있어서 흰 털을 뽑아내십니까?”
“허허! 한(漢)나라의 법이 비록 관대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듯이, 백발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까닭으로 하는 수 없이 뽑아 버리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를 관장하였는데 166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광해군(光海君)의 즉위를 도왔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들어가 예부(禮部)에서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장남을 세우자는 주장을 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歲流果變(세류과변)
歲:해 세, 流:흐를 류, 果:실과 과, 變:변할 변.
어의: 세월에 따라 과일도 변한다. 삼국시대에는 밤(栗.율)이 컸으나 지금은 작아졌다는데서 유래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에도 변화가 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삼국유사해제(三國遺事解題)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일연(一然.1205~1289) 스님은 속명이 김견명(金見明)이며 경상도 경산 출생으로 김언필(金彦必)의 아들이다. 견명은 9살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로 출가하였고, 1227년 승과에 급제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74세(1259년)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81년에는 운문사(雲門寺)에서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으며,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연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삼국유사 중 <원효불기(元曉不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효 스님의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이미 만삭이었는데 불지(佛地)라는 골짜기를 지나다가 급하게 산기(産氣)가 있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그 아래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 나무는 사라수(娑羅樹), 열매는 사라율(娑羅栗.밤)이라고 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한 절에서 잡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일꾼들이 양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니 관리가 그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다. 그런데 밤톨이 워낙 커서 한 알이 밥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 후부터 그곳을 밤나무골, 즉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원효는 출가하자 자기가 살던 집을 절로 고쳐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가 있는 곳에도 절을 세우고 사라사(娑羅寺)라 했다.
이처럼 밤과 인연된 사건이 많은 것은 밤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기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인 흐름 때문이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에 나타난 밤나무나 그 나무에 열리는 밤의 크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고려도경(高麗圖經)> 23권 <토산(土産)>편에는 밤이 복숭아 만하고, 맛이 달아 좋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밤 크기가 호두알 만한 것에 비교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우나 당시의 기록이 그러하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신라시대에는 밥그릇에 가득 찼던 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려 때는 복숭아만 해지고, 요즘에는 호두알만 해졌다는 것이다.
<한국문화상징사전>의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마한(馬韓)에서 배(梨.이)만 한 크기의 밤이 난다.’는 기록이 있으며, <후한서(後漢書)>와 <수서(隋書) 북사(北史)>에도 ‘백제에서는 큰 밤이 나온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삼국시대 무렵에는 오늘날의 밤보다도 훨씬 큰 밤이 있었던 듯하다.
혼례식의 폐백(幣帛) 때 신부의 치마에 대추와 밤을 던져 주는 것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뜻에서 행하는 의식이다. 제사 상(床)에서 조율이시(棗栗梨柹)의 순서로 상에 오르는 것도 밤이 그만큼 귀중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밤나무가 오래 전부터 신물(神物)을 만드는 신성한 재료가 되었던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밤은 임신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주머니에 여러 개의 밤톨이 의좋게 들어 있어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고, 자식과 동기간, 형제를 뜻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世俗五戒(세속오계)
世:세상 세, 俗:풍속 속, 五:다섯 오, 戒:경계할 계.
어의: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신라시대에 화링들이 지키던 계율이어서 화랑오계라고도 한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46
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 귀산(貴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간(何干) 무은(武殷)의 아들로 젊어서 학문(學問)과 덕(德)을 기르기 위해 남다르게 노력했다.
그는 추항(帚項)과 깊이 사귀어 서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어진 사람을 찾아 도리를 다하자고 다짐했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귀산도 그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원광법사는 자기를 따르는 수도승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불가에는 열 가지 보살계(菩薩戒)가 있느니라. 그런데 그대들은 이를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여 세속의 5계를 설하겠노라.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사군이충.事君以忠),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며(사친이효.事親以孝), 셋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고(교우이신.交友以信), 넷째는 싸움에 임하되 후퇴해서는 안 되고(임전무퇴.臨戰無退), 다섯째는 생물은 반드시 가려서 죽여야 하느니라(살생유택.殺生有擇). 이의 실행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라.”
이에 귀산이 물었다.
“다른 가르침은 알겠으나 생물을 가려서 죽이라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광법사가 대답했다.
“생명이 나서 자라는 봄, 여름에는 살생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특히 기르고 부리는 것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말, 소, 닭, 개가 그러하느니라.”
이에 귀산은 법사의주선함을 잘 받들어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진평왕(眞平王) 24년(서기602년) 8월에 백제가 대군을 일으켜 아막성(阿莫城)을 포위하니, 왕은 파진간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로 하여금 방어케 했다. 이때 귀산은 소감지(少監職)으로 전선에 나가니 백제가 패하였으므로 찬산(泉山) 늪으로 물러가 잠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군이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퇴각하자 귀산이 큰소리로 외쳤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배우기를 전쟁에서 물러서지 말라 했으니 어찌 달아날 수 있으랴!”
그는 아버지가 부상을 당하여 위태롭자 자기의 말에 태워 보내고 창을 휘두르며 나아가 싸웠다.
이에 군사들이 사기충천하여 추항과 함께 맹렬히 돌격하여 치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말 한 필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귀산도 온몸이 창에 찔려 돌아오는 도중에 전사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消力奪國(소력탈국)
消:사라질 소, 力:힘 력, 奪:빼앗을 탈, 國나라 국.
어의: 힘이 빠지게 한 다음 나라를 침공하여 빼앗다. 즉 적을 공격할 때 미리 상대의 힘을 쇠진하게 한 다음 침공하여 이긴다는 뜻.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금청담(古今淸談)
백제의 제20대 개로왕(蓋鹵王. 455~475)은 비유왕(毘有王. ?~455)의 장자로 비유왕 재위 29년에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안정된 국정을 이끌었다.
왕은 평소 바둑을 무척 즐겨서 수가 높은 사람을 보면 아무나 궁중으로 불러들여 대국을 했다.
그 무렵, 백제는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싸우고 있었다.
어느 날, 개로왕에게 도림(道琳)이라는 한 스님이 찾아왔다.
“소승은 고구려의 승려인데 죄를 지어 백제로 도망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바둑의 수가 높으시다고 듣잡고 한 수 배우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하오니 한 수 가르쳐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첩자로서 백제의 국력을 염탐하러 온 자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자주 침범해오는 백제를 치기 위해 고심하던 끝에 도림의 백제의 궁중으로 들여 보냈던 것이다.
개로왕은 그와 대국을 한 결과 도림의 수에 아주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빈객(賓客)으로 머물게 하며 매일같이 바둑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림이 말했다.
“소승이 다른 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대우(待遇)를 해 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 귀국(貴國)을 위하여 소승이 느낀 바를 간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무슨 말이든지 해 보시오?”
개로왕은 기꺼이 응낙하였다.
“귀국은 산이 험준하여 어느 나라든지 쉽게 침범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베푼 은덕입니다. 그러니 국가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궁궐을 크게 지어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을 받아들여 나라의 모든 장정들을 징발하여 돌을 나르고, 나무를 베어 마침내 위용이 당당한 궁궐을 세웠다. 궁궐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낭비된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그 결과, 노역으로 지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니 왕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도림은 고구려로 되돌아가서 장수왕에게 아뢰었다.
“지금이야말로 백제를 넘어뜨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백제의 백성들은 왕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장수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사를 일으켜 일제히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갑자기 적을 맞이하여 싸우려 했으나 국력이 이미 쇠퇴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도림에게 속았음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화근은 바둑이었다. 한낱 놀이에 불과한 바둑에 빠져 야금야금 국력이 탕진되고,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는 때에 침공까지 당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은 다급한 나머지 궁궐을 나와 도망쳤으나 고구려의 장수에게 잡혀 아차성(阿且城)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이들 장수들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들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燒餠造星(소병조성)
燒:불땔 소, 餠:떡 병, 造:만들 조, 星:별 성.
어의: 호떡으로 별을 만든다는 말로,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행위를 이른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무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일본은 무장한 병사들을 궁궐로 데리고 들어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권은 물론 내정까지 관장하였다. 이처럼 한일 병탄(倂呑) 중이던 1920년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가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장내는 청중으로 가득 차 있고, 연단 옆에는 일본 경찰이 칼을 짚고 앉아 감시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강연회에는 으레 일본의 고등계 형사가 지켜보고 있게 마련이었다.
월남은 연단에 올라 큰기침을 한 후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데 골목에서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생이고, 다른 한 아이는 소학교 학생 같았는데, 소학교 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예쁜 별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빼앗아 조금씩 먹기 시작합디다. 소학생이 울면서 앙탈을 하니까 이번에는 달떡을 만들어 주겠다면서 살살 꼬여 결국 그 호떡 한 개를 다 먹어버리니, 소학생은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구 울기만 합니다.
월남의 이야기가 이에 이르자, 청중들은 벌서 그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서 호떡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소학생은 우리나라 사람, 중학생은 일본인을 비유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있던 일본인 경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야 깨닫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연설을 중지시켰다. 결국 그날의 강연은 계속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끝나버렸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처럼 월남은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듯을 그 짧은 이야기로 충분히 전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小學童子(소학동자)
小:작을 소, 學:배울 학, 童:아이 동, 子:아들 자.
어의: <소학>을 배우는 아이라는 뜻으로 행실이 바르고 도덕관이 확고하여 모든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일컫는다. <소학>은 청소년들이 꼭 읽고 실천해야 할 책이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조선 제9대 성종 때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오현인(五賢人)이라 일컬어지던 김굉필(金宏弼.1454~1504)은 본관이 서흥(瑞興)이며,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고 감명받아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그는 정여창과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지내며 1480년에는 척불(斥佛)을 상소하기도 했는데, 평소 바깥출입을 할 때는 소학동자답게 항상 초립(草笠. 나이가 어린 남자가 쓰는 갓)을 쓰고 다녔다. 또 육경(六經) 연구에 전심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도 통달하여 문하에 조광조(趙光祖),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소학을 좌우명(座右銘)으로 평생토록 가까이 하니, 그로부터 도덕관이 확고한 사람을 일컬어 소학동자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松都三絶(송도삼절)
松:소나무 송, 都;드읍 도, 三:석 삼, 絶:뛰어날 절.
어의; 조선시대 개성에서 뛰어난 세 존재라는 말로,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서화담(徐花潭), 황진이(黃眞伊)를 이른다.
문헌: 소약당집, 고금청담(古今淸談)
황진이는 조선 중종 대 한 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어머니 밑에서 사서삼경과 고시를 탐독햇다. 용모가 출중한 데다가 재주도 탁월하여 시조를 잘 지어 명작을 남겼다. 또 가무에도 능하여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로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의 나이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도의적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기생이 되었다.
그후, 그녀는 10년을 면벽 수도하던 천마산의 생불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다.
그녀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사모하여 어느 날 밤 그의 침소로 들어가 은근히 유혹하였으나 그는 목석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황진이는 지족선사도 자기에게 정절을 바쳤는데 화담만은 부동이니 참으로 성인이라 감탄해 마지않으며 스승으로 모셨다.
또 벽계수(碧溪水) 이창곤(李昌坤)은 왕의 종친이었는데 근엄하고 지조가 있어 기방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호방했다. 그러나 황진이 앞에서는 한낱 장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조 작품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그리는 여자의 진솔한 감정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중에도 다음 두 편은 명편으로 평가되어 두루 회자되고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송도 사람들은 황진이와 박연폭포(朴淵瀑布), 서화담(徐花潭) 이 셋을 합하여 송도삼절이라고 했다.
박연폭포는 개성에서 40리 거리의 경기도 개풍군 천마산(天魔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높이는 20여 미터 정도 된다.
서화담은 이름이 경덕(敬德),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글씨가 명필이었다. 그는 청렴(淸廉)하고, 부귀(富貴)나 영화(榮華)에는 뜻이 없어 벼슬을 하지 않았다. 서경덕은 이기론(理氣論)을 연구하여 우주의 본질은 음양(陰陽)으로 분화(分化)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했다. 또 성리학(性理學)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평생을 도학(道學), 주학(朱學), 역학(易學)에 바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碎骨飄風(쇄골표풍)
碎:부서질 쇄, 骨:뼈 골, 飄:날릴 표, 風:바람 풍.
어의;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 버리다. 대역죄인에게 내리는 극형의 의미로 쓰인다.
문헌: 조선왕조 오백년 궁중사화(朝鮮王朝 五百年 宮中士禍)
조선시대에 정론(正論)을 주장하다가 간신의 모함으로 화를 입은 사화(士禍)는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등 네 번에 걸쳐 일어났다. 그 발단은 공신과 외척 등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저지른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큰 사건 뒤에는 반드시 참혹(慘酷)한 형벌(刑罰)이 다르게 마련이었다. 그 형태를 보면 남자는 씨를 단절시키고, 여자는 종으로 삼으며, 그런 사람의 집은 남이 다시 살지 못하게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팠는데, 이것을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고 하였다.
시형에도 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는 사약(賜藥)에서부터 참수(목베기), 효수(잘린 목을 거리에 내어 거는 것), 팔과 다리와 목을 토막내 죽이는 능지처참, 팔다리 사지를 네 마리의 말에 묶은 후 사방으로 말을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차열형(撦裂刑), 시체를 다시 베는 육시(戮屍),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이미 죽어 장사 지냈을 때는 시체를 파내어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등 끔찍하고 다양한 형태의 형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의 간신,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은 유자광(柳子光), 신수근(愼守勤)과 연계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가 폐비로 쫓겨나 사사(賜死)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했다. 그는 아들 광재(光載. 현숙공주와 결혼)와 숭재(崇載. 위숙 공주와 결혼)가 각각 임금의 부마가 됨을 기화로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쇄골표풍(碎骨飄風)’ 즉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릴 놈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는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으나 중종(中宗) 반정 후 부관참시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壽百又百(수백우백)
壽:목숨 수, 百:일백 백, 又:또 우.
어의: 백 년을 살고 또 더하여 백 년을 산다는 말. 백 살을 먹은 사람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는 데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4대 세종(世宗. 재위1418~1450) 때, 민대생(閔大生)은 벼슬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어느 해 설날, 나이 90이 넘은 그에게 가까운 친족들이 모여 세배를 드렸다. 그 중 한 사람이 공손히 세배를 드린 뒤 무릎을 꿇고 축원을 했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을 수하십시오.”
그러자 그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역정을 냈다.
“내 나이 90이 넘었는데 백 년만 살라고 한다면 몇 해 못 산다는 것 아니냐? 어지 그렇게 박명(薄命)하라는 말을 하는 거냐? 괘씸하도다.”
그러자 다른 조카들은 다른 말로 축원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라옵건대 숙부님께서는 백 년을 수하시고 또 백 년을 더 누리시옵소서.”
하고 말했다.
민대생은 그제야 섭섭한 마음을 풀며 말했다.
“오냐! 너야말로 하례(賀禮)를 제대로 하는구나!”
말 한마디로 은공(恩功)을 갚는다는 말처럼 말에 따라 결과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부모님께 오래 사시라고 드리는 축수(祝壽)도 그렇다.
말 속에 말이 들었다는 말은 그래서 아주 철학적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역학에서 천도(天道)의 네 가지를 말한다. 원(元)은 봄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이 형성되고, 형(亨)은 여름이니 자라나고, 이(利)는 가을이니 만물이 영글어 익고, 정(貞)은 겨울이니 만물을 거둔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 이치에 맞게 뜻을 펴나가는 일이 모두 말이다. 물질도 잘게 쪼개고 쪼개면 분자에 이르고, 분자에서 원자, 그리고 그 후에는 음양으로 설명되는데 이 음과 양이 곧 말아닌 말이다. 이 말이 세상을 형성하게 하는 이치이고, 천리(天理)인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隨序成志(수서성지)
隨:따를 수, 序:순서 서, 成::이룰 성, 志:뜻 지.
어의: 순서를 따르면 뜻을 이룬다, 즉 어떤 일의 뜻을 이루고자 하면 그 일의 순서를 차근차근히 따라야 이루어 진다는 뜻.
문헌: 여담천리(餘談千里)
충청도 온양(溫陽)의 온천동(溫泉洞)에 가난한 데다 발까지 저는 노파가 삼대독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노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 아들을 키우는 데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어느덧 아들이 혼기를 맞아 매파를 놓아 사방팔방으로 혼처를 구하게 되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문도, 살림도 형편없는 데다 시어머니 될 사람이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기에 누구도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파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을 측은히 생각한 중매쟁이는 좀 모자라는 처녀라도 그냥 며느리로 맞기로 다짐을 받고는
아랫마을 홀아비 집으로 발걸음을 놓았다.
그 집에는 코가 비뚤어진 장애인 딸이 있었는데 말만 꺼내면 성사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홀아비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런 소리 두 번 다시 하지 마슈! 원 아무리 사윗감이 없기로서니 홀어미에다 절름발이 시어머니에게
딸자식을 보내겠소?”
“영감님두, 그 노인은 그렇지만 아들이야 인물 좋고 부지런하고 어디 나무랄 데 없잖아요.”
“아, 듣기 싫다는데두요.”
홀아비는 크게 역정을 냈다.
“흥! 까마귀 똥도 약에 쓰려니까 칠산바다에 싼다더니 코찡찡이 홀아비 꼴에 꼴값하네.”
화가 난 중매쟁이는 한마디 쏘아 주고는 이번엔 황 영감 집으로 갔다.
그 집 딸은 팔을 제대로 못 쓰기 때문에 노파의 아들이 오히려 과분할 것 같아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황 영감도 대번에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여보슈! 팔을 못쓰는 내 딸이 그 집으로 들어가면 그 집엔 그런 사람들만 모였다고 남들이
얼마나 놀리겠소?”
“그렇게 따지다간 댁의 딸은 시집도 못 가고 환갑 맞겠소. 환갑!”
중매쟁이는 노파를 찾아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했다. 실망한 노파는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기로 작정하고 산사를 찾았다.
“부처님, 하나뿐인 우리 아들 제발 짝을 좀 정해 주옵소서.”
그렇게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 지 백 일째 되던 날, 깜빡 잠이든 노파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났다.
“쯧쯧! 정성(精誠)은 지극하나 순서가 틀렸으니 안타깝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상세히 일러 주시옵소서!”
“그대의 아들이 장가를 못 드는 까닭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어미 된 제가 한쪽 발을 못 쓰는 탓이라고 생각하옵니다만…….”
“하면 먼저 그대의 두 발을 온전히 쓰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오나 무슨 수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니, 지극한 정성을 드리면 될 것이니라.”
말을 마친 보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꿈을 깬 노파는 다시 불공을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제발 이 몸의 다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또다시 백 일째의 밤, 허공에서 우렁차고 경건한 소리가 들렸다.
“내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소원을 들어주리라. 내일 마을 앞 들판에 다리를 절름거리는
학(鶴) 한 마리가 날아와 앉을 터인즉 그 자리를 잘 살펴보면 다리 고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니라.”
이튿날, 노파가 꿈에 들은 대로 들판으로 나가니 과연 다리 하나가 불편한 학이 논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 학은 앉은 자리 근처를 뱅글뱅글 돌면서 껑충썽충 뛰었다. 그렇게 하기를 사흘,
학은 언제 다리를 절름거렸냐는 듯 두 발로 뚜벅뚜벅 걷더니 힘껏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훨훨
날아가 버렸다. 노파는 하도 신기해서 급히 학이 뛰던 곳으로 달려가 보니 그곳에서는 뜨거운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노파는 얼른 아픈 다리를 그 물에 담갔다. 그러자 점차 몸이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노파는 신이 나서 열심히 발을 담갔다. 그렇게 이레가 지나자 신통하게도 절룩거리던 발이 씻은 듯이 완쾌됐다.
그 후 노파네 집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집안이라 하여 혼인을 원하는 청혼이 빗발치듯 했고, 그 아들은 예쁘고 가문 좋은 색시를 맞아 잘 살았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온양온천(溫陽溫泉)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熟栗自落(숙율자락)
熟:익을 숙, 栗:밤 율, 自:스스로 자. 落떨어질 락.
어의: 익은 밤은 저절로 떨어진다는 말로, 모든 일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자연의 순리를 의미한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조선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이자 유명한 정치가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전라도 창평(昌平)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등을 스승으로 하고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도 교류하며 학문을 쌓았다. 문장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났던 정철은 소장(訴狀)을 시적으로 잘 썼다.
그러나 선조(宣祖) 때부터 동서(東西)의 극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정철은 서인(西人)의 거장으로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살이까지 해야 했다. 그 후 1580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고, 이어서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가 지방관 관찰사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쓰러져 죽었다. 남은 사람은 당연히 의심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황한 그 사람은 정철을 찾아가 상의하였다.
사연을 들은 정철은 다음과 같이 적어 주었다.
‘독한 술이 곁에 있으니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고,
썩은 노끈이 손에 있어도 당기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는다.‘
글을 받아 읽은 의뢰인이 깜짝 놀라 따지듯이 물었다.
“대감, 어째서 저를 죽이고자 하십니까?”
그러자 정철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글을 지어주었다.
‘기름 없는 등잔불은 바람이 없어도 절로 꺼지고,
동헌의 누런 밤은 서리가 안 내려도 가을이 되면 떨어진다.‘
그 사람은 기뻐하며 그 소장을 사또에게 제출했다. 사또는 글을 보더니 바로 판결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구먼. 그러므로 너는 무죄다.”
정철은 써준 글을 보고 따지듯이 달려드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죽음과는 상관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글을 써준 것이다.
정철은 <송강집(松江集)>에서 독서할 때 세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을 지적했는데,
그 하나는 글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궁리하지 않는 것이며, 그 둘은 탐욕이 많아서 빨리 읽고자 하는 것이요. 나머지 한 가지는 전심(專心)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잡시에 끌려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훈민가(訓民歌)> 등이 있으며 가사문학(歌辭文學)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고사성어, 사자성어 > 한국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도사성어13 [阿闍梨判(아사리판)~汝是汝是(여시여시)] (0) | 2022.09.22 |
---|---|
한국고사성어12 [僧之虛夸(승지허과) ~ 心通酒酌(심통주작)] (1)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10 [射琴匣(사금갑) ~ 善則得福(선즉득복)] (0)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9 [夫得怛朴(부득달박)~飛字登天(비자등천)] (0)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8 [文金生員(문금생원) ~覆椀之功(복완지공)] (0) | 202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