僧之虛夸(승지허과)
僧:중 승, 之:어조사 지, 虛:빌 허, 夸:자랑할 과.
어의: 스님의 허풍이라는 말로, 옛날 해인사의 스님과 석왕사의 스님이 서로 자기 사찰의 솥과 뒷간의 크기를 부풀려 자랑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사실보다 크게 과장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한국설화집(韓國說話集)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가마솥은 크기로 유명하고,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釋王寺)의 뒷간은 높기로 유명했다.
석왕사의 뒷간에 대해 소문을 들은 해인사의 한 스님이 과연 그러한지 확인을 하려고 바랑을 짊어지고 나섰다. 그런데 석왕사의 스님도 해인사의 가마솥을 구경하러 가다가 두 스님이 도중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석왕사의 스님이 해인사 스님에게 먼저 물었다.
“도대체 해인사의 가마솥이 얼마나 크기에 소문이 그리 자자합니까?”
“글쎄요. 어떻게 설명해야 그 크기를 짐작하실지……, 아무튼 지난해 동짓날 그 가마솥에 팥죽을 쓸 때 상좌가 팥죽을 짓기 위해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요? 과연 크긴 크군요. 혹시 동해보다 큰 건 아니겠지요?”
“아무려면 동해보다야 크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듣기로 석왕사의 뒷간이 높다고 하던데 대체 얼마나 높기에 그렇게 소문이 요란합니까?”
“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높지요. 소승이 이번에 절을 떠나며 뒤를 보았는데, 그 덩어리가 아직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내가 해인사에 도착할 즈음에나 떨어지려나…….”
“허허! 그래요? 구만리 장천 같겠구려.”
“아무려면 그만이야 하겠소만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외다.”
질세라 허풍을 떨던 두 스님은 서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말씀을 듣고 보니 피차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높은지 잘 알겠구려! 그렇다면 굳이 먼 길을 힘들여 찾아갈 필요가 뭐 있겠소.”
하고는 이내 헤어져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撕書習字(시서습자)
撕:쪼갤 시, 書:글 서, 習익힐 습, 字:글자 자.
어의: 책장을 찢어내어 글을 외운다는 말로, 공부에 전념했던 조선 세조, 성종시대의 학자 김수온의 행동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위해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가리킬 때 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은 본관이 영동(永同)이고, 호는 괴애(乖崖), 시호는 문평(문평)이다. 조선 세조(世祖) 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내고,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학문을 같이 했다.
그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했으며 집현전에 있을 때는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했고, 교리로 있을 때는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했다. 또 해학을 좋아하였다. 그가 일찍이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수하의 좌랑(佐郞)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관상을 보니 수를 많이 할 것 같소.”
좌랑이 기뻐하며 자세히 보아 달라고 매달리자 수온이 말했다.
“그걸 어디 함부로 말할 수 있소? 한턱을 내면 모를까…….”
좌랑은 관상을 보고 싶은 생각에 한턱을 걸게 차려 대접하며 다시 수온에게 청했다.
“제 관상을 제대로 좀 보아 주시겠다 하셔서 이 자리를 마련했으니 한 말씀 해주십시오.”
그러자 수온이 시침을 떼며 말했다.
“당신의 나이가 벌써 쉰을 넘었기에 내가 수 좀 많이 할 상이라고 말한 것일 뿐 얼마나 더 살지 그것은 알 수 없소이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어댔다.
김수온의 기행은 또 있었다. 그는 책을 빌려오면 어김없이 한 장씩 뜯어서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외우다가 확실하게 외우게 되면 아무 데나 버렸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다 떼고 나면 그 책은 없어져 버렸다.
한번은 영상 신숙주가 애장하고 있는 진귀한 고서를 그가 빌려달라고 청했다. 신숙주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빌려주었더니 몇 달이 되어도 가져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수온의 집을 찾아가니 그 책을 모두 찢어 벽지로 발랐는데 이미 연기에 그을려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신숙주가 깜짝 놀라 물으니 수온은 책을 누워서 읽기 편하게 하느라고 그랬다고 했다.
신숙주는 차마 화도 못 내고 입맛만 다시며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에 능동적이고 마음먹었다 하면 완벽을 고집하는 그의 괴벽을 영상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是誰折花(시수절화)
是:이 시, 誰:누구 수, 折:꺾을 절, 花:꽃 화.
어의: 누가 꽃을 꺾어다 주겠느냐는 말로, 신라의 수로부인이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이 갖고 싶어서 했던 말에서 유래했다. 간절한 소망을 표현할 때 쓴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의 아내 수로부인(水路夫人)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되어 가족이 모두 임지로 갈 때였다. 먼 길에 피로해진 일행이 절벽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수로부인은 깎아지른 절벽의 벼랑에 진달래꽃 한 떨기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 아름답구나! 꺾어다가 가까이 두고 보면 얼마나 좋을 까?”
그러나 워낙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있는 꽃이라 감히 누구도 꺾어올 생각을 못했다. 수로부인은 그 꽃이 못내 갖고 싶어 혼잣말을 했다.
“누가 저 진달래꽃을 꺾어 올 수 없을까(是誰折花.시수절화)?”
그때 흰 수염의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그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이 늙은이가 꺾어다 드리지요.”
“위험할 텐데 할 수 있겠어요?”
수로부인이 걱정을 하자 노인은 대답 대신 빙긋 웃더니 성큼 절벽에 매달렸다. 그런데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노인의 동작이 너무도 날렵했다. 노인은 그렇게 하여 수로부인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
일행이 강릉을 향해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바닷가에 있는 임해정(臨海亭)이라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 수로부인의 미모에 반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동해의 용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 수로부인을 낚아채어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편 순정공은 아무런 대책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그 노인이 나타나 계교를 일러주었다.
“이 일은 많은 사람이 필요하니 사람들을 더 불러 오시오.”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까?”
“물고기도 아닌데 어떻게 바다 속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옛날에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 바다의 용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의 입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많이 모이게 하시오.”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노인은 노래를 지어주며 큰소리로 부르게 했다.
“거북아! 거북아! 너희나라 용이 잡아간 우리 수로부인을 데려 오너라, 남의 아내를 잡아갔으니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라. 만약 부인을 데려오지 않으면 그 대신 널 잡아 구워 먹겠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장대로 바닷물을 두드리자 용은 할 수없이 수로부인을 거북의 등에 태워 뭍으로 돌려보냈다.
노인은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용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수로부인을 구해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柴積修簷(시적수첨)
柴:장작 시, 積:쌓을 적, 修:고칠 수, 簷:처마 첨.
어의: 장작을 쌓아 부서진 처마를 수리한다는 말로, 어떤 물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문헌: 한국역사대사전(韓國歷史大事典)
영은문(迎恩門)은 조선시대에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세워진 문이었다. 지금의 서대문구 독립문(獨立門) 부근에 있었는데 1537년 중종 2년에 김안로(金安老)가 개축할 때 청와(靑瓦)로 덮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던 것을 명종 때 명(明)나라의 설연총(薛延寵) 칙사가 영은문이라 바꾸어 걸게 했다.
어느 날, 영은문의 추녀 기와 한 장이 깨졌다. 그러자 문을 관리하던 관리원은 그 일을 호조판서에게 보고했다.
“추녀의 기와가 빠져 나가면 나머지 기와들도 잇달아 주저앉을 것입니다.”
“사다리를 댈 자리가 마땅치 않고, 비계를 설치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 되겠다.”
호조판서가 영은문으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기와 한 장만 갈아 끼우면 되는 일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궁리 끝에 돈 2천 냥을 관리원에게 주며 말했다.
“새벽에 장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으면 고양이나 벽제에서 장작을 팔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장작을 모두 사서 영은문의 기와가 깨진 처마 밑에 차곡차곡 쌓도록 하여라.”
관원들은 호조판서의 지시대로 장작을 사서 쌓았다. 장작의 높이가 영은문과 거의 비슷해지자 호조판서가 다시 말했다.
“그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깨진 기와를 바꿔 끼우도록 하여라.”
과연 지시대로 하니 일은 금방 끝났다. 관리원이 호조판서에게 물었다.
“분부하신 대로 수리했습니다. 이제 저 장작은 어떻게 할까요?”
“으음. 조금 있으면 장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니 그때 모두 팔아넘기도록 하여라.”
한낮이 되자 과연 판서의 말대로 장작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영은문 앞으로 몰려왔다. 쌓여 있던 장작은 순식간에 다 팔려 나갔다.
호조판서가 말했다.
“나라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영은문을 수리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나온 돈을 한 푼이라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희는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施粥發福(시죽발복)
施:베풀 시, 粥:죽 죽, 發:나타날 발, 福:복 복.
어의; 죽을 베푸니 복이 되었다는 말로, 스님에게 약간의 죽을 나누어 주었더니 그것이 인연이 되어 복을 받게된 이지광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좋은 일을 하면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이지광(李趾光)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3세손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세자가 되었으나 왕위를 동생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팔도를 유람하며 자유분방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이지광은 남대문 밖에서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서 막노동을 해야 할 딱한 지경에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어느 날, 시주승이 찾아와 먹을 것을 구걸했다. 그는 자신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면서도 먹고 있던 죽 절반을 나누어 주고, 찬 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스님은 크게 고맙게 생각하고, 떠나면서 말했다.
“형편을 살펴보니 선비님도 어렵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집 뒤의 단정한 집은 무슨 집입니까?”
“내개 13대 선조가 되시는 양녕대군의 사당입니다.”
“그러시면 사당 앞의 나무를 베어내 사당이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지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스님의 말에 진실한 데가 있어 그의 말대로 사당 앞의 나무를 베어냈다. 그러자 가려졌던 사당 건물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영조가 헌릉(獻陵. 조산 태종의 능)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지광의 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영조는 그곳에서 허물어져 가는 낡은 사당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저것이 누구의 사당인가?”
옆에 서 있던 승지가 아뢰었다.
“네! 양녕대군의 사당입니다.”
“그래? 한데 많이 낡았구나. 제사를 지내 주는 종손은 있다더냐?”
“네. 있긴 하온데 너무 가난하고 궁색하여 천한 막노동을 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럼 대궐로 들어와서 나를 찾으라고 일러라.”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시주승의 예지 능력 때문이었다. 즉 사당 앞의 나무를 베지 아니했더라면 사당이 영조의 눈에 띄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날, 이지광은 헤진 도포에 부서진 갓을 쓰고 영조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영조는 남루한 형색을 보고 측은해 하며 물었다.
“그대는 양녕대군의 몇 세손인가?”
“13세손입니다.”
“만약 양녕대군께서 왕위를 세종대왕에게 사양하지 아니했다면 네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영조는 그를 남부도사(南部都事)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 양녕대군의 사당을 새롭게 중수하게 하는 한편, 논과 곡식을 넉넉히 하사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지광은 얼마 안 돼서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고, 정사를 잘 펴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또한 그의 증손 이승보(李承輔), 고손 이근수(李根秀)는 판서에 이르러 자손 대대로 부귀를 누렸으니, 시죽발복(施粥發福)이 이같이 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媳婦之德(식부지덕)
媳:며느리 식, 婦:지어미 부, 之어조사 지, 德:큰 덕.
어의: 며느리의 덕이라는 말로, 며느리가 불씨를 보존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집안의 아녀자가 일을 잘할 때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설화(說話)
우리나리의 대가집에서는 조상 대대로 불씨를 이어받는 전통이 있었다. 오늘날처럼 불을 얻는 일이 쉽지 않았던 때라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아녀자의 의무이자 큰 덕목이었다.
한 사대부(士大夫) 양반 댁에서 새 며느리를 얻었다. 그녀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부지런한 데다 예의범절이 바른 규수였다.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겨주던 날, 시어머니는 특별히 일렀다.
“새아가야, 너를 맞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구나! 너도 아다시피 우리 집에는 선조(先祖)로부터 이어받은 불시가 있단다. 이제 이 불씨를 너에게 넘겨줄 테니, 너도 웃어른들을 본받아서 꺼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예. 어머니!”
며느리는 불씨를 돌보는 일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며칠 후, 새벽에 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나간 며느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씨가 꺼져 있었던 것이다. 간밤에 불씨를 화로에 담아서 그토록 잘 다독여 놓았건만 어지 된 일인지 차가운 재만 남이 있었다.
며느리는 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노발대발하실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생각 끝에 그래도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줄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생각해 남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걱정하는 아내를 위로하였다.
“너무 걱정 마오. 내가 새 불씨를 만들어 줄 테니 다시는 꺼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남편은 부싯돌로 새로이 불씨를 만들어 주었다. 며느리는 무사히 위기를 넘겼으나 마음속으로는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또 불씨가 꺼져 있었다.
며느리는 기가 막혔다. 한 번 꺼뜨린 것만으로도 어른들을 뵐 면목이 없는데, 연거푸 두 번씩이나 꺼뜨렸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상서롭지 못한 일인 듯싶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어젯밤 늦도록 불씨가 무탈했었는데 밤사이에 꺼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야.”
며느리는 누군가가 일부러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남편도 화가 나서 도와주지 않는 바람에 그날 시어머니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며느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엌 한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씨가 든 화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었다. 며느리는 밤이 깊어지자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종일 고달프게 일을 한데다가 불씨 때문에 마음을 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졸고 있던 며느리는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색 저고리에 회색 바지를 깨끗하게 차려 입은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부엌문으로 들어서더니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불씨가 담긴 화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며느리의 가슴은 놀라움으로 방망이질을 치듯 두근거렸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그 소년은 화로에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이 녀석! 너, 누구냐?”
며느리는 그 소년의 옷자락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소년은 날렵하게 빠져 밖으로 도망쳤다.
며느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년이 가는 대로 내를 건너고 언덕을 지나 가시덤불 속을 지나서 정신없이 쫓아갔다.
약을 올리듯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면서 달려가던 소년은 더 이상 도망갈 힘을 잃었는지 한 나무 밑에 멈춰 서는 것이었다.
“꼼짝마라! 너는 이제 잡혔다.”
그런데 소년은 순식간에 땅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좋다. 네가 땅속으로 숨는다고 못 잡을 것 같으냐? 내 기어이 너를 잡고 말 테다.”
며느리는 분한 마음에 맨손으로 정신없이 땅을 팠다. 바로 그때 한 때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산으로 올라왔다. 시댁 사람들이었다.
“여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남편이 피투성이가 된 아내의 손을 감싸 잡았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구나. 그곳을 더 파보는 것이 좋겠다.”
함께 따라 나온 시어머니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을 비롯한 장정들이 땅을 파고 들어가니 널따란 바위가 나왔다. 그래서 그 바위를 힘껏 젖혔다.
“오 이럴 수가……!”
그곳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있고, 그 속에는 금은보석(金銀寶石)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그 집안에 하늘이 복을 내려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識者殺丈(식자살장)
識:알 식, 者:놈 자, 殺:죽일 살, 丈:어른(장인) 장.
어의: 유식한 자가 장인을 죽이다. 유식한 채하며 거들먹거리다가 되려 큰일을 당하는 경우를 이른다. 식자우환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문헌: 한국해학전집(韓國諧謔全集)
충북 제천(提川) 교동(校洞)마을에 김 참봉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매우 유식해서 한문에 관해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툭하면 이렇게 말했다.
“쳇, 그까짓 언문 나부랭이를 글이라고 쓰나?”
“흥, 암글 가지고 내 앞에서 행세하지 말게나! 나는 진서를 하는 선비일세.”
그는 자기가 남보다 한문(漢文)을 좀 많이 안다는 것을 코에 걸고 툭하면 한글은 여자나 배우는 암글이요, 언문이요, 상놈 글이고, 한문은 진서, 곧 참글이라고 하며 한글을 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자기 생각을 한문으로 말하고, 한문으로 썼다. 즉 ‘아침밥을 먹었다’ 라는 말은 아식조반야(我食朝飯也)! 라고 하고, ‘빨리빨리’ 라는 말은 ‘속거속거(速去速去)’ 라는 식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김 참봉의 장인을 물고 달아나 버렸다. 방 안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김 참봉이 뛰어나와 소리쳤다.
“아심경 아심경(我甚驚 我甚驚)이로다.”
“내가 놀랄 일이다. 내가 놀랄 일이다.” 라는 말을 한문으로 하니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서 장인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다시 소리를 쳤다.
“원산지호(遠山之虎)가 자근래야(自近來也)하여 오지장인(吾之丈人)을 착거착거(捉去捉去)했도다!”
먼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나의 장인을 물어갔다. 그러니 빨리 나와서 얼른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늘그막에 마느라가 아기를 낳았으니 축하해 달라는 것인지, 자기 집에 불이 났으니 꺼달라는 것인지…….
김 참봉은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안타까운 나머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봉자(持棒者)는 지봉이래(持棒而來)하고, 지창자(持槍者)는 지창이래(持槍而來)하여 속거속거(速去速去), 오지장인(吾之丈人) 희구출(希救出) 바라노라.”
이 말 또한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 맨 끝에 구출하라는 말은 겨우 알겠는데 어디서 누구를 구출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장인은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김 참봉은 혼자 분노했다.
“이런 무정하고 괘씸한 사람들 같으니……. 원님에게 일러 혼내 주리라.”
원님이 그의 말만 듣고 그럴 수가 있느냐며 화가 나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의 장인이 죽게 되었는데도 도와주지 않고 가만히들 있었느냐? 한 동네에 사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그러자 동네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랬다고 했다. 원님은 김 참봉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쳤는지 그대로 복창을 해보라고 했다. 김 참봉이 그대로 되풀이 했다.
“원산지호(遠山之虎) 먼산의 호랑이가 자근래야(自近來也)라 스스로 가까이 와서 오지장인(吾之丈人) 우리 장인을 착거(捉去) 잡아갔다. 지봉자(持棒者) 몽둥이를 가진 자는 지봉이래(持棒而來) 몽둥이를 가지고 오고, 지창자(持槍者) 창을 가지고 있는 자는 지창이래(持槍而來) 창을 가지고 와서 속거속거(速去速去) 빨리빨리, 희구출(希救出) 구출해 주기를 바라노라.”
그러자 원님이 격노하여 호통을 쳤다.
“이놈, 김 참봉! 그냥 ‘호랑이가 우리 장인 물어갔소. 어서 와서 구해주시오.’ 그러면 될 것인데, 그리 어렵게 말했단 말이냐?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 원님께서도 그리 무식합니까?”
“이놈! 문자를 쓸 때가 따로 있지, 그 경황에 무슨 문자야? 저 멍청한 줄은 모르고 남까지 바보 만들어? 여봐라! 저 우매한 김 참봉을 형틀에 메고 볼기를 쳐서 다시는 그 따위 문자를 쓰지 못하게 하라!”
김 참봉은 곤장을 맞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야둔야.我也臀也(아. 내궁둥이야) 통야.痛也(아파라!) 차후불용문자호.此後不用文字乎(이후로는 문자를 안 쓰겠노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媳之禮敎(식지예교)
媳:며느리 식, 之:어조사 지, 禮:예도 예, 敎:가르칠 교.
어의: 며느리의 예절교육이라는 말로, 손아래 사람이 어른의 부족한 점을 깨우쳐 주는 것을 이른다.
문헌: 한국해학전집(韓國諧謔全集)
조선 숙종(肅宗) 때 직장(直長) 황손승(黃孫承. 1632~1707)은 예의(禮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만큼 엄격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은 걸음걸이와 앉음새, 음식예절, 말투까지 천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부모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종7품(從七品)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그런 그이기에 해가 떠도 예의, 달이 져도 예의, 그저 예의로 일관하다 보니 제일 딱한 사람은 그 집 아들이었다. 혼기가 닥쳐왔는데도 예의만 찾는 양반집에 딸을 주겠다는 혼처(婚處)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심 학자(沈學子)라고 하는 사람에게 과년(瓜年)한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가정 형편이 어려워 누가 중매를 서려 하지 않았다.
심 학자가 탄식을 하니 부인이 말했다.
“저 황 직장(直長) 댁에 딸을 시집보내면 우리도 살림이 펴질 텐데…….”
옆에서 듣고 있던 딸도 그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요. 그 집에 저를 시집보내 주십시오. 시집가면 최선을 다하여 그 집안의 예의를 따르겠습니다.”
심 학자는 펄쩍 뛰며 말했다.
“얘야. 네가 며칠 굶더니 무슨 헛소리냐? 배운 게 없는 네가 그 집에 시집가면 봉제사(奉祭祀), 접빈(接賓), 음식 장만, 그리고 많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어찌 감당하려고?”
“아버지 이 세상에 완전한 예의는 없습니다. 평소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온 제가 왜 예절이 없다고 하십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저 피나무로 만든 도마 하나와 식칼 하나, 베보자기 하나만 준비해 주십시오.”
“아니, 그것은 어디에 쓰려고?”
“예. 필요한 데가 있을 것 같아 그러하오니 준비가 되거든 그 집에 청혼을 해주세요.”
그리하여 예의만 찾는 양반집에 가난한 선비네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가 치러지고 그 이튿날,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새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아침 사관(仕官:윗사람께 드리는 문안인사)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에햄, 새 며느리가 오면 이런저런 예절교육(禮節敎育)을 시켜야지.’ 하고 잔뜩 벼르고 있던 시아버지가 참다 못해서 소리를 질렀다.
“거, 며늘아이 수모(手母: 수발하는 여자) 있느냐? 아직도 새 아이가 사관을 오지 않는 연고가 무엇인고?”
급하게 새 며느리에게 다녀온 수모가 말했다.
“예. 새아씨가 자기 집 예문(禮文: 예의 법도)은 윗사람이 사관을 받으려면 먼저 사당에 가서 조상님께 예를 올리고 나서 받는 법이어서 시아버지께서 사당에 다녀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음, 옳은 말이다. 대단한 예의가문이로구나. 그럼 내 얼른 사당에 참배를 하고 오마.”
그런데 대가 섣달 설한풍이 몰아치는 때여서 노인이 뒷산 중턱에 있는 사당에 다녀오려면 대단한 고행이었다. 더구나 언덕길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칠십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절을 받기 위해서는 빙탄 비탈길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눈길에 자빠지고,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온몸 어디 한 군데 온전한 데가 없었다.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고, 감기까지 걸려 기침도 도져왔다.
간신히 다녀와서 막 따뜻한 아랫목에 누우려고 하는 순간 새 며느리가 어느새 들어와서 아뢰었다.
“아버님, 사당에 다녀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사관 받으시옵소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목소리로 문안을 드리니, ‘아. 과연 선녀 같고 예의바른 우리 며느리로구나! 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온 삭신이 아픈 것은 어절 수 없었다. 그는 어기적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사관을 받았다.
‘오늘은 억지로 사관을 받았지만 내일 아침은 어쩌지? 저 눈길에 그 높은 사당을 또 다녀와야 된단 말인가?’
시아버지는 걱정이 앞섰다. 하여튼 그렇게 겨우겨우 사흘 동안 사관을 받고 난 황 직장은 ‘아이구 사관 받다가 내 명대로 못 살겠구나.’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마누라를 시켜서 당장 사관을 그만두라고 하니까 며느리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관은 석 달 동안 쉬지 않고 드리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응? 석 달? 아가, 내가 제발 빈다.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아니옵니다. 명망 높은 집에서 사관을 사흘밖에 안 하다니요. 자손들에게 부그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이구, 이러다가 내가 지레 죽겠구나.”
“아버님. 예의는 지켜야 하겠지만 죽은 조상보다 살아계신 부모님이 더 소중하니까 그럼 아버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몇 달 후, 황 직장의 아버지 제삿날이 돌아왔다.
“아가, 오늘 저녁에 너희 시할아버지 기고(忌故. 제사)가 있으니 제수를 장만하도록 해라.”
“예. 그럼 어머님! 평소에 쓰시던 도마하고 칼을 주십시오.”
“아니.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저는 제사용 도마와 칼은 평소와 달리 따로 사용하라고 배웠습니다. 평소 쓴 것, 짠 것, 비린 것, 산에 들에 강에 바다에서 난 온갖 것을 썰고, 저미던 잡스런 도마에 어찌 신성한 제사 음식을 썰겠습니까?”
“그도 그렇겠구나. 그런데 아가, 내가 미처 그런 도마와 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지하면 좋겠느냐?”
“이리 될 줄 알고 제가 피나무도마와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희집은 과연 예의가 대단하구나.”
“뭘요. 저희 아버지는 이런 것은 상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런 집안에서 며느리를 데려오다니 가문의 영광이로다.”
그날 밤, 제사 상을 차리는데 진설법(陳設法)이 영 달랐다. 며느리는 조율이시(棗栗梨柹), 홍동백서(紅東白西)가 아니라 빨간 음식은 빨간 것끼리 모아 놓고, 흰 것은 흰 것대로 모아 놓는 것이었다.
“얘. 아가! 이것은 누구의 진설법이냐? 희한하기도 하다.”
“아이구. 아버님 이것도 모르십니까? 주자(朱子) 선생의 진설법 아닙니까?”
“아. 우리는 공자님 진설법으로 해왔는데…….”
“주자님이 공자님의 법도를 고쳐 놓지 않았습니까?”
“음,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 가문도 주자법을 따라야 하겠구나!”
황 직장은 며느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따르는 신세가 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첫 벼를 베려니까 며느리가 말했다.
“아버님. 제미(祭米. 제삿쌀)를 먼저 장만하셔야지요.”
“그냥 한꺼번에 추수해서 나누어 쓰면 되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버님. 저희 집 예문(禮文)에는 꼭 첫 곡식을 따로 추수해서 제미로 씁니다. 사대봉사(四代奉祀)이니, 여덟 번 차려야 되니까 여덟 봉지를 베 보자기에 따로 싸서 보관해야 합니다.”
“과연 예의바른 집이로구나.”
그런데 제미(祭米)를 여덟 번이나 따로따로 말리고 담으려니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며늘아가, 가가례(家家禮)란다. 집집마다 예절이 다른 법이니 지금부터는 너희 집 예문을 들먹이지 말고 우리 집 예절에 따라 사는 것 또한 예의일 것이니라. 그러니 너무 예절을 따지지 말고 편리하게 살자꾸나.”
그 뒤부터 며느리는 예절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申具罰酌(신구벌작)
申:펼 신, 具:갖출 구, 罰:벌할 벌, 酌:잔질할 작.
어의: 신숙주와 구치관이 벌로 술을 마신다는 말로, 세조가 신숙주와 구치관 두 정승들과 술자리에서 희롱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고령사람으로 호는 보한재(保閑齋), 벼슬은 세조(世祖) 때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영의정을 지냈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4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시명(詩名)을 떨쳤으며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세종(世宗)을 도와 한글을 창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은 본관이 능성(綾城)으로 세조가 등극하는데 공을 세워 영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구치관이 새로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신(新) 정승이 되니, 신숙주는 구(舊) 정승이 되었다.
세조가 신(申), 구(具) 장승을 불러 주연을 베풀며 말했다.
“경들에게 물러볼 것이 있소.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지만 잘못하면 벌주를 마시기로 합시다. 먼저 신(新) 정승!”
세조가 새로 임명된 신(新) 정승을 불렀다. 그러나 신(申) 정승이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대답했다.
“예.”
세조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신 정승을 불렀는데 신 정승이 대답했으니 실수요. 자, 약속대로 벌주를 받으시오.”
세조는 신(申) 정승에게 벌주 한 잔을 주었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舊) 정승!”
이번에는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구(具) 정승이 대답하니 세조가 말했다.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소. 그런데 구(具) 정승이 대답했으니 또 벌주요.”
하여 구 정승도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신구벌작(申具罰酌)으로 세 사람 모두 대취하며 즐거워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申之婦德(신지부덕)
申:펼 신, 之:어조사 지, 婦:며느리 부, 德:큰 덕.
어의: 신 즉, 신사임당 부인의 덕망이라는 말로, 신사임당에게서 유래했다. 여자가 지녀야 할 모범적인 덕행을 빗대어 쓴다.
문헌: 율곡전서(栗谷全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강원도 강릉(江陵)의 북평(北平) 오죽헌(烏竹軒)에서 신명화(申命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아 진사(進士)에 머물렀다. 사임당의 어렸을 적 이름은 인선(仁善)이었다.
그녀는 경문(經文)과 문장,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두루 뛰어났다. 또 일곱 살 때부터는 안견(安堅)의 화법을 배워 산수도(山水圖)와 포도화(葡萄畵) 같은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성인이 되자 여성적인 섬세함이 무르익어 한시(漢詩)에도 능하여 감히 따를 자가 없었고, 붓글씨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그녀의 화재(畵材)는 주로 꽈리와 잠자리, 수박과 석죽화, 가지와 벌과 나비, 오이와 개구리, 범부채와 매미, 바위와 도마뱀, 도라지꽃과 여치 등 대부분 꽃과 과일, 그리고 풀벌레 등이었다.
신사임당의 나이 열아홉이 되자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에 사는 스물두 살 난 이원수(李元秀)라는 청년을 사위로 맞기로 했다.
이원수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깊은 학문을 익힐 수가 없었다.
사임당은 결혼을 하자마자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관습대로 3년상을 마치고 시집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맏아들 선(璿)에 이어 모두 4남3녀를 낳았다.
그녀는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특히 3남 이이(李珥. 율곡(栗谷)는 세 살 때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여덟 살 때는 한시를 지었다. 13세 때에 진사 초시(初試)에 급제했고, 그 후 아홉 번이나 급제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원수는 성격이 부드럽고 욕심이 없는 효자(孝子)였다. 그러나 쓰고 읽는 일은 아무래도 아내만 못했다. 그래서 사임당은 남편이 보는 데서는 책 읽는 것도 삼갔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조를 지을 때도 한밤을 택했다. 또 자식들이 무엇을 물어보면 으레,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건 너희 아버지께서 더 잘 설명을 해주실 게다.”
하며 남편의 권위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그것이 아무리 급한 일일지라도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내조(內助)도 지혜롭고 현명하게 했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는 덕수(德水) 이(李)씨였는데 그의 문중에는 영의정을 지내고 있는 높은 분도 있었다. 하여 이원수는 혹 벼슬을 얻을까 해서 가끔 영의정 댁을 방문하곤 했다. 이를 눈여겨 본 사임당은 조용히 남편에게 충고했다.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분 댁 방문은 삼갔으면 합니다.”
“허허, 집안 형뻘 되는 분인데, 출입하는 게 뭐가 어째서 그러는 거요?”
“집안 어른 찾아뵙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영감께서 혹 벼슬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 어른이 지금은 높은 자리에 계시지만 아첨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원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그 다음날부터 그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사임당의 말은 사실로 나타났다.
당시 조정은 소윤(小尹), 대윤(大尹)으로 갈려 치열한 당파싸움을 벌이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던 1545년,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 대윤의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느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났다.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과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귀양살이를 갔다. 그러나 이원수는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여 교류를 끊은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이 할 일과 아내가 할 일을 자로 재듯이 엄하게 구별했던 사임당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던 것이다.
그녀는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남편에게는 현숙하고, 자식들에게는 엄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身土不二(신토불이)
身:몸 신, 土:흙 토, 不:이니 불, 二:두 이.
어의: 몸과 흙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로, 우리 땅에서 나는 농작물이 우리 몸에 잘 맞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고 한 가지’ 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되어 같은 기운을 받는다는 뜻이다.
문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조선시대 의서(醫書)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서문에는 ‘기후와 풍토 그리고 생활풍습은 같다.’ 고 했고,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사람의 살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흙과 같다.’ 고 했다.
원(元)나라의 보도법사(普度法師)가 펴낸<노산연종보감>의 게송(偈頌 :부처님 공덕을 찬미한 노래) 중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글에서는 ‘몸과 흙은 본래 두 가지 모습이 아니다.’ 라고 했다. 또 ‘신시불이(身時不二)’라는 말도 있는데, 그 뜻은 ‘사람의 몸과 그 시절에 나는 음식은 둘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제철에 나는 곡식과 채소, 그리고 과일을 먹어야 몸에 좋다는 뜻이다.
조선 인조(仁祖) 때의 학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움직임(動.동)을 주관하고, 땅은 고요함(靜.정)을 주관하며, 사람은 동(動)과 정(靜)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겸할 수 없고, 땅은 하늘을 겸할 수 없으나 능히 겸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사람의 부모요 땅 또한 사람의 부모다. 따라서 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그 몸을 공경하는 것은 하늘과 당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연이 나고, 내가 곧 자연이라는 말이다. 즉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은 정신적인 경지를 이르는 말인 데 비하여 신토불이(身土不二)는 물질적인 상황을 이른다.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지형, 풍토, 인심 등의 자연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자연과 사람과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을 응용한 택리지는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생명체란 살아있는 세포의 거대한 조직체인데 성질이 다른 물체가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익숙한 환경의 물체가 아닌 새로운 이질적인 환경을 만나게 되면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에 방해를 받아 병을 일으킬 수 있다.
신토불이는 전통적인 식생활, 즉 현실적인 물질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자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신토불이의 실행법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信厚眞友(신후진우)
信:믿을 신, 厚:두터울 후, 眞:참 진, 友:벗 우.
어의: 믿음이 두터워야 진정한 친구다. 한 평범한 선비가 자식을 훈육했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진정한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교훈이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전라도 부안(扶安) 단산(丹山) 고을에 김재곤(金在坤)이라는 선비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시원스러워 이름을 용진(容珍)이라고 불렀다.
용진이는 친구 사귀기를 몹시 좋아해서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곤 했다.
아버지 김재곤은 아들이 친구들과 즐기는 것을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나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넌지시 물었다.
“용진아, 넌 오래된 친구가 많으냐, 새로 사귄 친구가 많으냐?”
아들이 대답했다.
“속담에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된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벗을 많이 사귀는 게 좋으냐, 아니면 적지만 깊게 사귀는 게 좋으냐?”
“사귀는 수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벗이 몇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귀는 벗들은 모두 마음으로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실한 벗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야 많을수록 좋겠지, 그런데 이 아비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다. 나에 비해 너는 너무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 같더구나. 작은 고욤(크기가 작은 품종의 감) 일흔이 왕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러자 아들이 자신에 찬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살찌고 빼빼 마른 것은 석수한테 달렸지요. 저는 벗들에게 진심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제게 진심을 주고 있다고 장담합니다. 미덥지 못하시다면 한번 시험을 해보시지요.”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자꾸나!”
아버지는 뒤뜰로 나가 큰 자루에 짚다발을 우겨 넣고는 그걸 지게 위에 얹었다.
“오늘 날이 어둑어둑해지거든 이걸 지고 네가 가장 믿는 친구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보거라. ‘친구. 내가 어쩌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좀 숨겨줄 수 없겠는가?’ 그러고 나서 그 친구의 태도를 살펴보란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했다.
친구는 그 말을 듣자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오래 사귄 벗이니 자네를 관가에 고발하지는 않겠네만 자네를 숨겨 줄 수는 없네.”
그러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꽝’하고 대문을 닫더니 빗장까지 단단히 지르는 것이었다.
돌담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풀이 죽어 있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얘야, 실망할 것 없다. 넌 친구가 여럿 있으니 다음 친구를 찾아가 보자꾸나.”
아들은 허탈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이 친구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쌀쌀하게 거절했다. 아들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숨을 헐떡거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지게를 내려놓게 했다.
“그럼 어디 이번에는 내 친구에게로 가보자.”
별빛이 총총한 그믐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친구 집에 이르러 황급하게 대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한밤중에 자네가 웬일인가?”
“잠을 깨워 미안하네만 내 아들이 말다툼을 하다가 그만 사람을 죽였다네, 좀 숨겨줄 수 없겠나?”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아무튼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친구는 국을 뜨겁게 끓여 음식을 내왔다.
“그 경황에 어디 저녁이나 들었겠나, 우선 따뜻하게 국물이나 좀 드시게, 참. 술 한 잔 하겠는가?”
아버지는 술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서 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느냐?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것이란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버지는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우정을 시험한 꼴이 되어 미안하네. 사실은 내 아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아무나 함부로 사귀는 것 같아 진정한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큰 결례를 해 미안하네.”
그러고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가는 길이 멀어야 타고 가는 말의 힘을 알 수 있으며, 사귄 지 오래되어야 벗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사귀었어도 그 속에 믿음이 없으면 그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벗과 벗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니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失期恥命(실기치명)
失:잃을 실, 期:때 기, 恥:부끄러울 치, 命:목숨 명.
어의: 때를 놓치면 목숨이 수치스럽다. 신라 원술랑(元述郞)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일을 실행하는 시기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말이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660년, 당(唐)나라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여 신라군은 육로로, 당군은 해로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협공으로 7월10일, 수도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는 결국 멸망했다. 그러나 신라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나라는 백제에는 부여륭(夫餘隆)을 도독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660년)를, 고구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668년)를 두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점령하려고 획책했다. 그래서 신라는 전날의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싸워야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고구려 백성들도 국권을 회복하고자 여기저기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670년) 4월에는 고구려의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장수가 고구려의 재건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조카 안승(安勝)을 왕으로 옹립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우리는 당나라를 물리치고자 할 뿐 신라와는 아무런 유감이 없소. 그러니 양식과 일용품을 보내 우리를 도와주기 바라오.”
신라는 즉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더 나아가 전략적 요충지인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방인 금마 땅을 제공했다. 고구려 백성의 환심을 사야 장차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당나라가 그 일을 알고 신라에 항의를 했지만 신라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문무왕은 14년(674년)에 조카딸을 안승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고구려 유민과 신라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나라 황제는 크게 노했다.
“신라가 등을 돌렸으니 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는 곳곳에서 충돌했다.
문무왕은 백제 땅에서 당나라를 쳐 가림성(加林城)을 탈환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옛 도성인 사비성마저 빼앗고 군량미를 운반하는 당나라의 배 70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수장된 당나라 군사가 수천 명이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도 4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대군은 두 패로 나누어 안시성(安市城)과 마읍성(馬邑城) 근처에 진을 쳤다. 신라에서는 선봉장으로 효천(曉天) 대장군을 비롯하여 의문(義文), 산세, 능신, 원술(元述) 등의 장수들을 보내 대적하게 했다. 원술은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둘째 아들이었다.
신라군은 석문(石門) 평야에서 당나라 군사와 일전을 벌였다. 평야에서의 싸움은 보병보다는 기병의 싸움인데 신라군의 말은 작아서 산악지대에서는 유리하지만 평야에서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당나라 말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신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효천 장군은 당나라 군사가 쏜 화살을 가슴에 맞아 전사하고, 의문과 산세 또한 적군의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능신 역시 적의 칼에 쓰러졌다. 신라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장수는 원술 하나뿐이었다.
원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자고 했으나 그의 부하 담릉(淡凌)이 한사코 말고삐를 놓지 않고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 원술을 석문 싸움에서 패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왕은 다음 기회에 공을 세우게 하여 이번의 수치를 벗도록 하자며 만류했다. 김유신은 끝내 아들을 집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지고 돌아온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원술은 크게 탄식했다.
‘화랑도의 계율에 싸움에 임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고 했거늘,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이 수치스러운 몸을 어떻게 씻는단 말인가.’
원술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문무왕 13년인 서기673년 7월, 신라의 큰 별 김유신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은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 벼 2천 섬, 악사 1백 명을 보내 김유신의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원술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머니 지소(智炤)부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내겐 싸움에서 지고 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러니 집에 들어올 생각을 말아라.”
원술은 가슴을 치며 다시 태백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슬프도다. 내 어찌하여 그때 죽지 못했던고, 나를 말린 담릉이 너무도 원망스럽구나!”
김유신의 장례가 끝난 얼마 후 당나라가 신라의 북쪽으로 침략해 왔다. 원술은 왕을 찾아가 간청했다.
“석문싸움에서의 수치를 벗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무왕은 원술의 뜻을 선뜻 받아주었다. 싸움터로 나간 원술은 성난 호랑이처럼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그 싸움에서 신라는 적으로부터 말 3만 필을 빼앗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무왕은 원술에게 다시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원술은 그를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오고 싶었던 집이던가, 이젠 떳떳이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어머니는 중이 되어 절로 떠나 버리고 없었다. 원술은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흐느껴 울며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해 뒤에 혼자서 슬쓸히 죽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心通酒酌(심통주작)
心:마음 심, 通:통할 통, 酒:술 주, 酌:따를 작.
어의: 마음이 서로 통하면 술을 대작한다. 즉 서로 뜻이 통하면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고려 제16대 예종(睿宗. 재위1105~1122) 때의 윤관(尹瓘. ?~1111)으 북쪽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고, 아홉 개 성을 쌓는 등 많은 공적을 남긴 명장이다.
윤관이 국방을 지키는 군대의 원수가 되어 북정할 때,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16)과는 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할 만큼 마음을 주고받는 평생의 친구였다. 그래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돌아온 뒤에 두 사람은 자녀를 결혼 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고, 함께 대신의 지위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에 들어서는 작은 시내를 가운데 두고 인근에 살면서 종종 만나 전날에 고생하던 회포를 주고받았다.
어ㅡ 날, 윤관이 자기 집 술이 잘 익어 오연총과 한잔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인에게 술을 지워 오연총을 방문하려고 가던 중 냇가에 당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냇물 건너편을 보니, 오연총도 하인에게 무엇을 지워 가지고 오다가 윤관이 물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대감, 어디를 가시는 중이오?”
윤관이 대답했다.
“술이 잘 익어 대감과 한잔 나누려고 가지고 나섰는데 물이 많아서 이렇게 서 있는 중이오.”
오연총도 역시 잘 익은 술을 가지고 윤관을 방문하려던 뜻을 말했다. 그러자 피차에 그냥 돌아서기가 안타까워서 몇 마디 환담을 하다가, 오연총이 윤관에게 말했다.
“우리가 말로 정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술을 한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정말 유감이군요.”
이에 윤관이 웃으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십시다. 대감이 소생에게 한 잔 들라고 하면 소생이 가지고 온 술을 대감의 술로 알고 한 잔 마시고, 소생이 그같이 대감에게 권하면 대감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한 잔 드시면 되지 않겠소?”
오연총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찬동했다.
이에 두 사람이 나무를 베어낸 등걸((査.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편에서 ‘한 잔 드시오!’ 하고 술잔을 들고 머리를 숙이면(頓首.돈수) 저편에서 한 잔 마시고 ‘한 잔 드시오!’ 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밤이 깊도록 가져간 술을 다 마시고 돌아왔다.
이 일이 당시 고관대작들에게 풍류화병(風流話柄. 멋있는 이야깃거리)으로 알려져서 서로 자녀를 결혼 시키는 것을 ‘우리도 사돈(査頓: 나무 등걸에 앉아 깊이 생각하면서 머리를 숙임)을 해볼까’ 라는 말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 말이 오늘날 사돈(査頓. 혼인한 두 집의 부모가 서로 부르는 말)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양가 집안의 여러 촌수를 좀 더 세분해서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가의 부모, 즉 같은 항렬끼리는 사돈, 또는 맞사돈, 아내 되는 사람은 안사돈, 사부인(査夫人), 사돈의 부모, 또는 형님은 사장(査丈), 사돈의 조부모는 노사장(老査丈), 노사부인(老査夫人)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외에 사돈의 사촌형제 등의 친척은 통칭하여 곁사돈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고사성어, 사자성어 > 한국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고사성어14 [鷰頷鷹眼(연암응안) ~ 王耳驢耳(왕이려이)] (0) | 2022.09.22 |
---|---|
한국도사성어13 [阿闍梨判(아사리판)~汝是汝是(여시여시)] (0)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11 [鑷拔白髮(섭발백발) ~ 熟栗自落(숙율자락)] (0)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10 [射琴匣(사금갑) ~ 善則得福(선즉득복)] (0) | 2022.09.22 |
한국고사성어9 [夫得怛朴(부득달박)~飛字登天(비자등천)] (0) | 202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