鷰頷鷹眼(연암응안)
鷰;제비 연, 頷:턱 함, 鷹:매 응, 眼:눈 안.
어의: 제비의 턱과 매의 눈이란 말로, 장차 큰 인물이 될 비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신라의 거칠부의 처음 인상을 보고 장차 장군이 될 인물임을 알아본 데서 유래되었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44권 거칠부>
신라(新羅)시대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이라고도 함)는 내물왕(奈勿王)의 5대손으로 성은 김(金)씨이며,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며, 아버지는 이찬 물력(物力)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뜻이 있어 스님이 되어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법사 혜량(惠諒)에게로 가서 법경 강론을 들었다.
그를 본 혜량법사가 물었다.
“사미는 어디에서 왔느냐?”
“예, 신라에서 왔습니다.”
“네 용모를 보니 범상치 않구나,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
“아니옵니다. 저는 신라의 변방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아직 불교의 진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스승님께 참된 도리를 배우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니 거절하지 마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오늘 너를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가 작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능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가 네가 신라에서 온 것을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이 말을 듣고 거칠부가 돌아가려고 하자 법사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너의 인상이 제비턱(鷰頷.연함)에 매의 눈(鷹眼,응안)이라, 장래에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장차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오게 되면 그때 나를 해치지 말아라.”
“네, 만일 스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 진흥왕(眞興王) 6년, 545년에 왕명을 받들어 국사(國史)를 편찬했으며, 그 공로로 파진찬(波珍湌)으로 승진했다. 진흥왕 12년, 왕은 거칠부 및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角粲),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그리하여 백제의 군사가 먼저 평양에 진입하자 거칠부는 죽령 밖 고현(高峴) 안의 10개 군(郡)을 빼앗았다. 그때 혜량법사와 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거칠부는 즉각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깎듯이 걸하고 그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옛날 유학하던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으니 나는 그대의 나라로 가서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거칠부는 혜량법사를 모시고 돌아와 왕에게 사실을 아뢰니, 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삼아 백좌강회(百座講會)와 불교의 의식인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게 했다.
거칠부는 진지왕(眞智王) 원년(元年)(576년)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나라의 중요한 군사, 정치 임무를 수행하다가 78세에 별세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裂起之勇(열기지용)
裂;찢을 열, 起:일어날 기, 之:어조사 지, 勇:날랠 용.
어의: <열기>의 용기라는 말로, 남들이 어려워 기피하는 일을 자원해서 용기있게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7>
열기(裂起)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661~681) 때의 무관이었다.
문무왕 원년, 당나라의 소정방은 고구려 정벌에 나서 평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군량이 떨어지자 함자도 총관 유덕민을 시켜 신라의 국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해 쌀 4천 석과 벼 2만 2250석을 수송하게 했다. 그 행렬이 장새(獐塞. 수안.遂安)에 당도했는데, 눈바람이 휘날리고 날씨가 몹시 추워 말과 병사들이 많이 얼어 죽는 바람에 조달되지 못했다. 그러자 이를 안 고구려 군사들이 길목을 막고 공격해왔다. 당황한 김유신은 멀리 덜어진 당나라 지휘관에게 서찰을 보내려 했으나 거리가 멀어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이때 보기감(步騎監)으로 있던 열기가 나서며 말했다.
“장군님!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구근 등 군사 15명과 함께 말을 달리니, 고구려 군사들이 그 용맹에 놀라 감히 막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이틀 만에 소정방에게 명을 전달하니, 소정방은 크게 기뻐하며 답장을 써주었다. 열기가 다시 이틀 만에 돌아오니, 유신은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왕에게 상신했다.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임시로 급찬(級湌) 위를 주었으나 공로에 맞지 않으니, 사찬(沙湌)으로 위를 높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 사찬이면 좀 과하지 않은가?”
이에 유신은 두 번 절하며 말했다.
“벼슬과 녹봉은 공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온데 어찌 과하다 하십니까?”
그제야 왕이 흔쾌히 허락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禮成江曲(예성강곡)
禮:예도 예, 成:이룰 성, 江:강 강. 曲:굽을 곡.
어의: 예성강의 노래라는 말로, 송나라 장사꾼에게 속아 아내를 빼앗기게 되자 부부가 이별을 하며 불렀던 슬픈 노래를 말한다.
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고려는 거란(契丹)의 1차, 2차, 3차에 걸친 침범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조공(朝貢)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고려가 이를 거절하고 국교를 단절하자 무력으로 침범해 왔다. 그러자 강감찬(姜邯贊)은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군사로 흥화진(興化鎭)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축하연으로 연등회를 열었다. 그리고 11월에는 30년 만에 팔관회(八關會)를 다시 가졌다. 팔관회는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모시는 풍속으로 술과 다과를 베풀며 가무 등으로 천신(天神)을 위로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그 무렵 고려는 송(宋)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었으나 거란의 간섭이 심해 송나라와 교류를 할 때에는 거란의 눈을 피하여 명주선로(明州船路)를 택하였다.
명주선로는 예성항(禮成港) 벽란도(碧瀾渡)에서 출항하여 황해 연안을 거쳐 전라도의 흑산도(黑山島)를 지나 다시 서남쪽 큰 바다로 빠져 나가는 항로였다.
고려의 무역은 왕족과 귀족들이 하는 관영무역과 일반 장사치들의 사무역(私貿易)으로 나뉘었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는 사신이 오가는 배와, 장사치들의 상선의 왕래가 끊임없었다. 그리고 송나라를 비롯하여 거란, 여진, 일본 등의 외국 장사치들이 이용하는 예성강(禮成江) 하구에는 객관(客館.여관)과 다관(茶館.다방), 기루(妓樓.기생집), 술집 등이 즐비하게 있었다.
여기에 송나라 장사치에게 속아서 마누라를 빼앗길 뻔한 한 사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성강 하구에 한 젊은 부부가 금슬 좋게 살았다. 남편은 뱃사람이었고, 아내는 항구에 드나드는 뱃사람과 장사치를 상대로 음식을 팔았다. 그런데 그 부인의 음식솜씨가 뛰어난 데다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하루는 송나라에서 온 하두강(賀頭綱)이란 장사치가 고려 장사치들과 함께 찾아왔다가 그 부인을 보고는 미모에 단박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배에 싣고 온 물품들을 팔고 고려의 물건으로 바꿔 실을 때까지 그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하두강은 배에 있는 시간은 밤에 잘 때뿐이고, 하루의 대부분을 밥집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두강이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여러 날 이곳에 와 있었는데 주인아저씨를 좀 만나고 싶소이다.”
그리하여 주인과 마주앉은 하두강이 말했다.
“주인장! 오늘은 비도 오고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잘 둘 줄 모르는데요.”
주인이 한 발 뒤로 빼자 하두강이 말했다.
“나두 뭐 별로 잘 두지는 못합니다.”
하두강이 몇 점을 놓아보니 주인의 바둑 실력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보였다. 그러나 하두강은 일부러 져주기도 하고 적당히 이기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주인장! 바둑을 잘 두시는군요? 그런데 그냥 두는 것은 심심하니 우리 내기바둑을 둡시다.”
“무엇을 걸구요?”
“비단을 겁시다.”
이렇게 하여 내기 바둑을 두었는데 두는 대로 하두강이 져서 배에 있던 비단이 몽땅 밥집에 쌓이게 되었다.
“하, 큰일났네. 주인장! 난 이젠 비단이 한 필도 없는데 뭘 걸었으면 좋겠소?”
“배가 있지 않소? 배를 거시구려.”
“그렇지만 주인장이 가진 비단의 몇 백 곱절을 줘도 내 배를 살 수 없는 건데…….”
“그러면 내 집과 비단을 함께 걸리다. 그래도 안 되겠소?”
하두강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으로는 모자라고, 걸만한 게 꼭 하나 있기는 하오만…….”
“그게 뭐요?”
‘나는 비단을 다 주고, 이제 한 척 남은 배마져 걸었으니 주인장은 부인을 거시오, 내가 지면 나는 빈 몸으로 송나라로 돌아가고, 당신이 지면 내가 주인장의 부인을 데리고 가겠소, 어떻소?“
주인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면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게 되겠지만 이기기만 하면 큰 배의 선주가 되어 내기에서 딴 비단을 가지고 무역을 하면 임금님 부럽지 않은 큰 부자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욕심에 눈이 먼 주인은 호기롭게 말했다.
“좋소! 내가 지면 주인장 배의 사공 노릇이라도 하겠으니 좀 써주시구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내기 바둑이 벌어졌다. 그러나 바둑은 하두강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주인장! 오래간만에 내가 이겼소. 이번 밀물에 배가 떠야 되니까 약속대로 부인을 불러 주시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밥집 주인은 눈앞이 깜깜했다.
“아뿔사! 내가 속았구나! 이놈이 내 아내를 빼앗아 가려고 일부러 져준 게 틀림없어, 바보! 내가 바보지, 결국 비단을 받고 사랑하는 아내를 판 꼴이잖아!”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한 후 지금까지 싸움 한 번 안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아내를, 그것도 외국 사람의 집으로 바다를 건너 멀리 보내게 된 것이 진정 슬펐다.
비단을 도로 가져가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눈물로 사정하였으나 하두강은 듣지 않았다.
“무슨 소리요? 어서 부인을 불러주시오. 밀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주인이 할 수 없이 아내를 데리고 나오자 하두강이 말했다.
“부인! 이것도 인연인가 보오. 송나라는 매우 호화스러운 곳이오. 이 좁은 어촌에서 고생을 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송나라로 가서 행복하게 삽시다.”
부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음에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겨 배에 올랐다.
밥집 주인은 미친 듯이 따라가며 소리쳤다.
“이 도둑놈아! 비단을 도로 가져가고 내 아내를 돌려다오.”
그러나 한번 떠나간 배가 다시 뱃머리를 돌릴 리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밥집 주인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지는 배를 바라보며 목메어 예성강곡(禮成江曲)을 불렸다.
내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당신을 팔았소.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가면 언제 올 거요?
목메어 울어봐도 임이 탄 배는 아니 오고
예성강 벽란도엔 갈매기만 넘나드네.
남편이 가슴을 치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의 아내 역시 배 안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생겼다.
배가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에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하두강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배 안에 있는 점쟁이를 급히 불러 무슨 변고인지 점을 치게 했다. 점쟁이가 말했다.
“배 안에 정절을 생명처럼 지키는 부인을 감금해 두었기 때문이오. 그 부인을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오.”
“정절을 지키는 부인이라고?, 밥집의 그 부인 말인가?”
“맞소. 틀림없이 그 부인 때문이오! 그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물귀신이 될 것이오.”
“할 수 없지. 뱃머리를 돌려라.”
그러자 신기하게도 맴돌던 물이 잠잠해지고 순풍이 불어와서 배가 삽시간에 예성강 하구에 닿았다.
하두강이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용왕도 부인의 정절에 감복한 것 같소. 못된 나를 용서하시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로 가시오.”
밥집 주인은 뜻밖에 되돌아온 아내를 보자 용서를 빌었다.
“여보! 내가 물욕에 눈이 멀어 당신을 빼앗길 뻔했소. 용서하구려!”
영영 헤어지는 줄 알았던 부인도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임 향한 일편단심 이내 정절 누가 꺾으리.
영영 이별인가 하였는데 다시 만났소.
용왕님이 길을 막아 우리 다시 만났네.
예성강 하구의 당신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
이후 남편이 부른 노래는 예성강곡(禮成江曲) 전편, 아내가 부른 노래는 후편이라고 하였으나 노래는 전하지 않고 고려가요(高麗歌謠)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름에 미친 사람을 일러 ‘예성강곡의 주인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禮以胎敎(예이태교)
禮:예절 례, 以:써(가지고) 이, 胎:아이밸 태, 敎:가르칠 교.
어의: 예로써 태교를 하다. 현숙한 부인이 임신 중에 예에 따라서 태교를 하여 대학자로 키운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5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 강원도 강릉에서 신명화(申命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감찰 이원수(李元秀)와 열아홉 살에 결혼하여 사남사녀를 두었고, 사임당은 그녀의 호이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고, 인품이 고결한 현모양처였다.
어려서부터 경문, 글씨, 그림, 문장, 침공(바느질, 자수) 등을 고루 공부하여 각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세종(世宗) 때의 유명한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적벽도(赤壁圖)를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정묘함으로 포도, 풀 , 벌레 등을 잘 그려 새로운 화풍을 이루었다.
또 그의 <사친(思親)>이라는 시에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이 잘 드러나 있다.
천 리 먼 고향 만첩산 저 너머로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
뵈오러 가고파라. 꿈속에서일망정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한송정 가에 외로이 떠오른 둥근 달 (寒松亭畔雙輪月.한송정반쌍륜월)
경포대 앞에는 몰아치는 거센 바람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자금도 모래톱엔 갈매기 놀겠지. (沙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
바다 위엔 고깃배들 물결 따라 오고가는데 (波頭漁艇每西東.파두어정매서동)
언제나 고향길 다시 밟아보려나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색동옷 입고 엄마 곁에서 바느질하던 때가 그립구나.(綵舞斑衣膝下縫.채무반의슬하봉)
다음은 신사임당이 38세에 지은 시로, 어린 율곡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강릉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읊은 것이다.
학의 머리 어머님을 임영 땅에 홀로 두고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장안으로 나만 홀로 떠나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뒤돌아 북촌을 아득히 바라보니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저문 산 푸른 숲엔 흰구름만 날아 앉네.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백발의 어머니를 학의 머리에 비유하여 홀로 게시게 한 자신의 가슴속의 뜨거운 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애절한 글이다.
신사임당은 시댁에 돌아와서도 고향에 홀로 게시는 어머니 생각을 한시도 놓지 못했다. 밤이면 어머니 계신 곳을 향하여 눈물을 짓는가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자녀 교육에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시문과 시화, 자수에 힘썼다.
그녀가 이원수에게 출가하여 강릉 오죽헌에서 아들아이를 임신 했을 때, 검은 용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출산했으므로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현용(見龍)이라고 했다.
그녀는 임신했을 때 태교로 말은 고운 말로, 행동은 진중하게, 사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고, 항상 마음은 온화하게, 몸가짐은 단정히 갖는데 노력했다.
율곡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태내 교육과 시문을 지으시는 태도와 꿋꿋하게 사시는 생활이 그대로 산 스승이 되었다. 또 강릉 친정집을 생각하며 눈물지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적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다.
이이가 뒷날 해동공자라 칭송받은 것은 모두 사임당이 예이태교한 데에서 힘입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吾鼻三尺(오비삼척)
吾;나 오, 鼻:코 비, 三:석 삼, 尺:자 척.
어의: 내 코가 석 자다. 즉 내게 닥친 일이 더 힘들고 어려워 다른 일을 돌볼 틈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정 저 사정이 앞선다는 말이다.
문헌: 영원(永遠)의 미소(微笑), 아동문학(兒童文學)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정립(鼎立), 즉 솥의 발과 같이 안정을 취하다가 서로 자웅을 겨루던 때, 경주(慶州)에 가난한 형과 마음씨가 고약한 동생 형제가 살았다.
전답이 없는 형은 동네사람에게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뿌릴 씨앗조차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동생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자 심술궂은 동생은 싹이 트지 못하게 씨앗을 삶아서 주었다. 형은 그것도 모르고 씨앗을 뿌린 후 정성껏 물을 주고 가꾸었으나 웬일인지 싹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싹이 안 나오지? 정성이 부족한 걸까?’
형은 더 열심히 물을 주며 정성을 다하여 가꾸었다. 그러자 그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딱 하나의 씨앗에서 싹이 터 올랐다. 그리고 그 싹은 점점 자라 엄청나게 큰 이삭을 맺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이삭을 잘라 물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앗! 거기 서라, 거기 서!”
형은 죽을 힘을 다해 깊은 산속에까지 새를 쫓았지만 끝내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바위 동굴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옷을 입은 도깨비들이 몰려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들이 주문을 외우며 방망이를 휘두르자 신기하게도 금이 쏟아져 나왔다. 또,
“술 나와라, 뚝딱!”
하고 외치니 이번에는 술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그렇게 방망이를 두들겨 필요한 것을 얻어내며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자 도깨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방망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형은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도깨비들이 한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해보았다.
“금 나와라, 뚝딱! 옷 나와라, 뚝딱! 집 나와라 뚝딱!
그러자 금덩어리가 와르르 쏟아지고, 비단옷이 나오고, 대궐 같은 집이 생겨났다. 마침내 형은 큰 부자가 되었다.
형이 큰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생은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에게 쫓아가 세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동생은 당장 그 골짜기로 달려가 동굴에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어지자 형의 말대로 도깨비들이 몰려 나와 방망이를 두드리며 놀았다. 그런데 그때 동생이 ‘뽕’하고 방귀를 뀌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도깨비 중에 험상궃게 생긴 놈이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침내 붙들리고 말았다.
“야, 이놈! 혼 좀 나봐라. 코야 커져라. 뚝딱!”
욕심을 부리던 동생은 도깨비들에게 붙들려 코만 코끼리 코만큼 커져서 돌아왔다.
그로부터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자기 처지가 급하게 되어 남을 도와 줄 여유가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烏鳥洗澡(오조세조)
烏:까마귀 오, 鳥:새 조, 洗:씻을 세, 澡:씻을 조.
어의; 까마귀가 목욕한다는 말이니, 본래 타고난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 또는 어떤 일을 열심히 해도 그 보람이 없다는 뜻.
문헌: 잡기(雜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관직에 올랐던 형재(亨齋) 이직(李稷. 1362~1431)은 세종 때 영의정에 이르렀다.
고려 유신(遺臣)이었던 그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벼슬에 오르면서 양심을 피력하여 아래와 같은 시조를 지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여기서 백로는 고려 말의 세 충신 삼은(三隱)을 비유한 것이고, 까마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인물을 가리킨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조는 겉으로는 결백하고 선량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간사하고 음흉한 위인을 비유하여 꼬집은 것이다.
까마귀가 눈처럼 흰 백로를 보자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저렇게 눈이 부시게 하얄까? 나도 한번 희게 돼 봐야지!”
까마귀는 곧 호수가로 가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씻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허기가 지고 정신만 어지러워서 끝내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본색이 검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본래 검은 천을 양잿물에 삶고, 헹구기를 거듭한다 해도 순백이 되기란 어렵다.
하물며 검은 까마귀가 희어질 수 있겠는가?
이 말은 타고난 본바탕은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玉堅製鞋(옥견제혜)
玉:구슬 옥, 堅:굳을 견, 製:만들 제, 鞋:신 혜.
어의: 조선의 왕족 <옥견>이 만든 신발이라는 말로, 중요한 사람이 만든 귀중한 물건, 즉 명품(名品)을 가리킨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4대 세종(世宗. 1397~1450)의 아들 한남대군漢南大君)은 그의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밀어내고 왕(세조)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가 들켜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흥안군(興安君)도 왕족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때문에 흥안군의 아들 옥견(玉堅)도 왕손에서 한낱 서민으로 전락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 방도를 찾다가 충청도로 내려가 신발을 만드는 장인(匠人)이 되었다.
‘이왕 신발을 만들 바에야 최고로 잘 만들자. 이것이 나의 자존심이다. 왕손이 신발을 삼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못 만드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자.’
그는 그길로 갓바치(가죽신 만드는 기술자)를 찾아가 큰절을 올리며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부탁했다.
갓바치들은 옥견이 왕족이라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였으나 포기하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매일 찾아와 부탁하는 정성에 감복하여 기술을 전수해주기로 하였다.
옥견은 정말로 열심히 배워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고, 그리되자 그가 만든 신발을 사기 위해 ksg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조가 죽고, 예종에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옥견은 왕족으로 다시 복원되어 전과 같이 종실의 품적을 되찾았다.
그는 귀인(貴人)이 되어 가마를 타고, 담비가죽으로 지은 모자를 쓰고 조정에 드나들 때에도 길에서 옛날의 스승 갓바치를 만나면 진흙구렁텅이라도 내려서 큰절을 올렸다. 타고난 심성(心性)이 착해서 어려울 때 기술을 가르쳐 준 은공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보답했던 것이다.
그의 신발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훗날 사람들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을 보면 ‘옥견이 가죽신 짓던 솜씨’라고 비유하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屋漏庇傘(옥루비산)
屋:집 옥, 漏:셀 루, 庇:가릴 비, 傘:우산 산.
어의: 지붕이 새는 집에서 우산으로 비를 가린다. 평생 동안 학문에만 심취하여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은 청렴한 공직자를 비유한다.
문헌: 조선인물지(朝鮮人物志)
세종(世宗)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 1346~1433))은 호가 하정(夏亭)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소탈한 성격에 학문을 즐겼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집은 한양의 홍인문 밖에 있었는데 초라하여 울타리도, 담도 없었다. 그러자 태종(太宗)이 그 사정을 알고 공조판서에게 명하여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어주게 하였다.
그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태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1418년 세종 때는 참찬, 찬성을 지내기도 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그에게는 청백리답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해 여름, 장마가 한 달이나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의 집에 비가 새어 방에 물이 뚝! 뚝! 떨어지니 우장으로 몸을 가리어야 했다. 미안하게 생각한 유관이 부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우리는 우장이라도 있어 다행인데 그마저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맛비를 무엇으로 견디어낼꼬?”
그러자 부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장이 없는 사람은 다 좋은 집이 있겠지요.”
즉 우장이 필요 없는 좋은 집에 살 거라는 말이었다. 듣고 있던 유관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는 옥루비산(屋漏庇傘)할 정도의 참다운 선비여서 훗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溫井沐樂(온정목락)
溫:따뜻할 온, 井:우물 정, 沐:목욕할 목, 樂:즐거울 락.
어의: 따뜻한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즐거움이라는 말로, 운우지정을 나눌 때의 쾌감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고금소총(古今笑叢) 어면순(禦眠楯)>
아들 다섯을 둔 육부자(六父子) 집에서 오형제가 모여 삿된 의논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다섯 아들을 두고도 만족하지 못하시고 수시로 잠자리를 같이 하신다. 만일 도 다시 아이를 낳게 되면 필경 우리가 업어서 길러야 함은 물론이고, 더러운 오줌 동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번갈아가며 당번을 서 두 분이 서로 합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런 고역을 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다섯이서 번갈아 부모의 침소를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날 당번인 막내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릴 때 부부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누운 채로 껴안아 북합(北合)을 시도하다가 그만 막내에게 들켜 버렸다.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엄마! 아직 깜깜한 밤인데 아빠를 업고 어딜 가려고 해?”
부부는 일도 하지 못하고 봉변을 당했다.
이튿날, 부부는 궁리 끝에 아이들에게 새벽 일찍부터 소를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을 나서는 척하고는 들창 밖에서 숨을 죽이고 방안의 동정을 엿듣고 있었다.
부부는 모처럼의 조용한 기회를 맞아 외설스런 말들을 주고받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남편이 아내의 두 눈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아내가 대답했다.
“그건 팔자문(八字門)이지요.”
남편이 아내의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
“망부천(望夫泉)이지요.”
다시 코를 가리켰다.
“이건 무엇인가?”
“감신현(甘辛峴)이지요.”
다시 입을 맞추면서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
“토향굴(吐香窟)이 아니겠어요.”
이번에는 턱을 가리켰다.
“이건 무엇인가?”
“사인암(舍人岩)이지요.”
다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이건 무엇인고?”
“쌍운령이라 하지요.”
오형제가 방안의 정경을 상상하며 웃음을 참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럼 이건 무엇인고?”
“유선곶(遊船串)이라 하지요.”
아랫배 언덕의 불룩한 곳을 만지며 물었다.
“여긴 어디인고?”
“아니, 옥문산(玉門山)도 모르시유?”
“이 검푸른 숲은 무엇인고?”
“감초전(甘草田)이옵니다.
아버지는 지그시 옥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건 또 무엇인고?”
“온정수(溫井水)이지 무예요.”
이렇게 남편의 질문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의 양경(陽莖)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상시(朱常侍)라고 하는 거요.”
다시 고환을 어루만자며 물었다.
“이건 또 무엇이예요?”
“음, 그것은 홍동씨(紅同氏) 형제지, 요즈음 말로는 쌍방울이라고도 해.”
이때 다섯 아이들이 각기 기침을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놀란 남편이 벌떡 일어나며 꾸짖었다.
“이놈들! 해가 저물 때까지 소를 돌보라 했는데 어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그러자 다섯 아이들은 소를 배불리 먹이고 목욕을 시켜서 쉬게 하고 험한 길을 지나왔는데도 꾸중을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에 아버지가 꾸짖었다.
“너희가 나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디서 풀을 먹이고, 어떤 물에 목욕을 시켰으며, 또 어디다 쉬게 두었단 말이냐?”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 대답했다.
“처음 팔자문(八字門)으로 나가서 망부천(望夫泉)과 감신현을 넘어 토향굴과 사인암을 지나 어렵게 쌍령(雙嶺)을 넘어서 유선곶을 건너 옥문산에 올라 감초전에서 풀을 먹이고, 온정에서 목욕을 시켰지요.”
아버지가 노하여 커다란 막대기를 갖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그걸 본 건 어떤 녀석이냐?”
“어찌 본 자가 없겠습니까? 주상시(朱常侍)와 홍동(紅同氏)씨 형제가 증명해 줄 겁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溫祚之運(온조지운)
溫:따뜻할 온, 祚:복 조, 之:어조사 지, 運:운수 운.
어의: 온조의 운수라는 말로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서 유래했다. 온조왕의 건국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듯 하는 일이 잘 풀릴 때를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백제(百濟)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 ?~28년)이고,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 朱蒙.주몽)이다
주몽이 처음 북부여에서 卒本夫餘(졸본부여)로 왔을 때 부여 왕에겐 딸만 셋이 있었다. 부여 왕은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주몽의 아내로 주었다. 주몽은 그 부인에게서 큰 아들 비류(沸流)와 둘째 아들 온조(溫祚)를 얻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와 태자 자리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오르자 지세를 살피던 지관이 말했다.
“여기는 북으로 한수(漢水)에 접하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거하며, 남으로는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니 도읍에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 경기 광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리고 그 규모가 커지자 곧 백제(百濟)라 개칭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B.C. 18년이었다.
그러나 비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 무리를 데리고 다시 미추홀(彌鄒忽. 인천)로 갔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백성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고 후회하고 있는데 얼마 있다가 온조가 죽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오니 백제의 형세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리하여 원년 5월에는 동명묘(東明廟)를 세우고 국정을 족부 을음(乙音)이 맡아 다스렸다.
기원전 17년 봄, 온조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말갈(靺鞨)이 우리 북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침략이 잦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하라.”
그가 국가의 발전은 전쟁의 승리에서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적대 국가를 정벌, 통합하여 국가를 튼튼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B.C. 5년에는 도읍지를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다.
B.C. 1년에는 마한(馬韓)을 합병하여 국위를 떨치고 성을 구축하여 국가로서의 체제를 굳건히 했다.
온조왕은 재위46년 동안 영토를 널리 확장시켰으며, 이후 왕위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면서 삼한의 옛 땅도 모두 백제에 통합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蛙以求命(와이구명)
蛙:개구리 와, 以:써 이, 求:구할 구, 命:목숨 명.
어의: 개구리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다. 즉 적은 것으로써 큰 일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행동을 말한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때의 좌의정 김종수(金鍾秀.1728~1799)는 본관이 청풍(淸風)이고, 호가 몽오(夢梧),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가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이방(吏房) 집에서 한 해 여름을 나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난데없이 독사 한 마리가 배 위로 기어올라 왔다. 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본인을 깨우면 필경 몸을 움직일 테고, 그리되면 놀란 독사가 물게 될 것이 뻔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데 이방의 어린 아들이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뱀 곁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던졌다.
개구리는 폴싹폴싹 뛰어 달아났다.
그것을 본 독사는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재빨리 김종수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어린 아이의 지혜가 어른의 생명을 구해낸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缺如蝕(왕결여식)
王:임금 왕, 缺:이지러질 결, 如:같을 여, 蝕:일식 식.
어의: 왕의 결함은 일식과 같아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즉 제왕에게도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속담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 제9대 왕으로 아랫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언로(言路)를 터줌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한 성군이었다.
당시 궁중에서는 날짐승들을 사냥하여 수라상에 올리기 위하여 송골매를 기르고 있었다.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그 송골매를 두고 성종에게 아뢰었다.
“가뭄이 계속되어서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그 대책에 고심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내응방(內鷹房)에서는 송골매를 기르고 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오락과 놀이에 마음을 스시는 것으로 하늘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종은 당장에 송골매를 놓아 주라고 했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과 같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허물을 숨기겠느냐,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고쳐야 하느니라.”
성종은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려 허물이 있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면서 다시 말했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행하고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가 바른 신하이고, 옳지 않은 일인데도 잘한다고 칭찬하는 자는 아첨하는 신하일 뿐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기를 참다운 정치가란 백성이 좋아하면 함께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면 자기도 함께 싫어한다. 이런 사람을 일러 백성의 어버이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종은 신종호의 간언을 듣고 즉각 자신의 잘못을 고친 훌륭한 제왕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命只一(왕명지일)
王:임금 왕, 命:목숨 명, 只:다만 지, 一:한 일.
어의: 왕의 명령은 오로지 하나다. 즉 왕의 명령은 번복되거나 두 개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때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스무 살 전에 이미 학자로서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어 왕이 몇 번을 불러도 사양하고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는 세자를 참형키로 작정하고, 대신들은 물론 초야의 명현(明賢)들을 불러 그 문제를 의논하게 했다. 송명흠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왕의 뜻이 이미 확고함을 눈치 챈 참석자들은 거스르는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송명흠이 홀로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동서고금을 두고 폭군으로 반대의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나이다. 어찌 차마 전하께서 선례를 남기려고 하시나이까?”
영조는 크게 노하여 즉시 송명흠을 내쫓았다. 그러고는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며 명령했다.
“저 자의 뒤를 밟다가 그가 곧장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도중에 다른 집에 들르거든 그와 그 집 주인의 목을 베어 오너라. 만일 곧장 집으로 가거든 그대 또한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원망(怨望)하는 기색 없이 형을 받으려고 하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변명을 늘어놓거든 목을 자르도록 하라.”
왕이 송명흠의 행동을 알아보라고 한 것은 그가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송명흠은 쫓겨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무사하지 못 할 것임을 직감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왕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선전관이 들이닥치더니 왕을 비방한 죄로 참형을 내린다고 했다. 이미 각오하고 잇던 송명흠은 순순히 죽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
“전하의 명령인데 신하된 자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어명에 따르고자 할 뿐이외다.”
선전관은 칼을 거두며 비로소 왕의 듯을 이야기했다.
송명흠은 듣고 나더니 몸을 바로 세우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籠絡)하는 일이오. 아무리 군왕이라도 신하를 농락해서는 안 되며, 왕명은 지엄한 것이므로 한번 말이 떨어지면 돌이켜서는 아니 되오.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세우시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不食言(왕불식언)
王:임금 왕, 不아닐 불, 食:먹을 식, 言:밀씀 언.
어의; 왕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책임 있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꼭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때 온달(溫達. ?~590)은 용모나 겉모습은 대단치 않게 보였으나 마음은 착하고 순박했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동냥을 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는 평소 해진 적삼에 헌 신발 차림으로 다니면서도 항상 웃고 있어 사람들은 바보라고 놀렸다.
한편, 평원왕의 어린 딸 평강공주(平岡公主)는 울기를 잘해서 그때마다 왕이 농담으로 말했다.
“네가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분명 사대부의 아내 노릇은 못하겠구나, 그러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공주는 울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라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공주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번복하십니까? 필부도 식언하면 아니 되는데 하물며 대왕께서 그러하시다뇨?”
왕이 딸의 말을 듣고 노(怒)하여 말했다.
“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로 인정하지 않겠으니 네 맘대로 갈 곳을 찾아가거라!”
그리하여 공주는 얼마간의 패물을 챙겨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온달의 어머니는 장님이었다. 공주가 아들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남루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되오, 지금 당신의 향수 냄새를 맡아 보니 꽃같은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손을 잡아 보니 부드럽기가 솜 같으니 천하의 귀인임에 틀림없소,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산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는 산으로 가서 온달을 만나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온달이 성을 내며 피해버렸다.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공주는 다시 모자를 찾아가 자기가 찾아오게 된 사정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온달이 머무적거리고 있자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이 부족하고, 내 집 또한 몹시 가난해서 귀인께서 살기에 적당치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오.”
공주가 대답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마음이 있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은 제가 가지고 온 패물로 마련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곧 금팔찌를 팔아 집과 우마, 가재도구들을 사들여 살림을 갖추었다. 그리고 온달에게 일렀다.
“무릇 남아라면 반드시 말을 잘 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저잣거리에 나가 말을 사는데, 병들고 여위었더라도 반드시 국마(國馬)를 사 오십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자 공주는 열심히 거두어 말이 날로 살이 찌고 건강해졌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으로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신(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서게 되니 여러 신하와 군사들도 출동했다.
온달도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가했는데 말이 워낙 날쌔어서 그가 잡은 노획물이 제일 많았다. 그래서 왕 앞에 나아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상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에 나아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온달이 선봉이 되어 단번에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아군의 사기가 올라 크게 이겼다.
전공을 논할 때 모두들 온달의 공로가 제일이라고 하니 왕은 그제야 사위로 맞아들이고, 대형(大兄)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지금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갈라 자기네의 군과 현으로 만들었는바 백성이 원통히 여겨 분노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했다.
온달은 계립현(雞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모두 회복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났다. 그러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서울 워커힐 뒷산) 아래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래서 그를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장군! 이제 큰일을 마치셨으니 돌아가 편히 쉬십시오.”
그제야 관이 들려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지휘가 높을수록 정직하여 모범이 되어야 하고,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이 말은 혼탁한 요즈음의 세대에 더욱 요구되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耳驢耳(왕이려이)
王:임금 왕, 耳:귀 이, 驢:당나귀 려.
어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로, 신라 경문왕에 얽힌 고사에서 유래했다. 세상에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861~875)은 이름이 응렴(膺廉)이며, 나이 18세에 국선(國仙) 화랑이 되었다. 아찬 계명(啓明)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화(光和)부인이었다.
응렴은 18세에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물정을 파악했다.
그에게 헌강왕(憲康王)이 물었다.
“응렴은 전국을 돌아보면서 무슨 좋은 일을 보았는가?”
“예. 행실이 바른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 어디 자세히 이야기해보아라!”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겸손하여 백성의 밑에 있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그 첫째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 옷차림이 검소한 이가 둘째였으며, 귀하고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보이지 않는 이가 그 셋째였습니다.”
그 말에 왕은 그의 어진 품성을 알아보고 말했다.
“내게 두 딸이 있는데 너의 시중을 들게 해도 되겠는가?”
“네. 그 일은 중대사(重大事)이니 집에 가서 부모와 상의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응렴이 물러나와 가족과 상의했다.
가족들은 맏 공주는 얼굴이 초라하고 못 생겼으니 예쁘고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맞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때 흥륜사(흥륜사)의 한 스님이 응렴을 찾아와 물었다.
“왕께서 공주를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어느 공주를 선택하려 하시오?”
“부모님께서 둘째 공주에게 장가들라 해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아니오. 맏 공주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응렴은 맏 공주에게 장가를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왕이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신하를 불러놓고 말했다.
“내게 왕자가 없으니 맏딸의 남편 응렴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왕위의 승계식이 끝나자 그 스님이 경문왕이 된 응렴을 찾아와 아뢰었다.
“이제 제가 전에 아뢰었던 세 가지 좋은 일을 다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맏 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이고, 둘째는 전에 흠모했던 둘째 공주에게도 장가들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는 못생긴 맏 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왕과 왕비에게 기쁨을 드렸으니 그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왕은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대덕(大德)이라는 벼슬과 함께 금 130냥을 내렸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놀라운 일이 거듭 생겼다.
그 하나는 밤마다 왕이 기거하는 방에 뱀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내인들이 놀라 쫓아내자 왕이 말했다.
“뱀은 나의 친구이니 쫓아내지 말라.”
그러고는 뱀처럼 혀를 널름거리며 잤다.
또 하나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된 사건이었다. 왕후와 궁인들은 이를 알지 못했으나 복두장(幞頭匠. 관을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복두장은 비밀을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자기만 간직하고 있다가 죽음이 다가오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도림사(道林寺)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뒤로 바람이 불면 도림사의 대숲에서는 그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나왔다.
놀란 왕은 대나무들을 베어내고 대신 산수유를 심게 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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