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樂水/에베레스트 트레킹

高行, 苦行, 考行의 길(7) 딩보체(4,410m)-추쿵(4,780m)-딩보체(4,410m) : 고소적응

efootprint 2020. 12. 28. 19:20

7일차 : 딩보체-추쿵(4,780m)-딩보체(고소 적응)

 

20081228() 맑음~흐림

 

오늘의 여정은 숙소가 있는 딩보체에서 쿰부의 또다른 장관을 조망할 수 있는 추쿵(4,780m)까지 왕복하는 것으로 내일의 5,000m를 오르기 위한 고소적응 코스다. 컨디션이 허락한다면 그 이상까지도 갔다 올 수 있겠지만 모두가 고소증을 느끼고 있다. 조교수는 많이 호전되었으나 이교수는 하산을 스스로 호소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전 8시, 밤새 바람이 불더니 아침 하늘은 밝고 맑고 푸르다.

하지만 아직 어둡고 차거운 기운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마을 전체를 덮고 있다.

마을 주변이 온통 높은 산이니 하늘이 밝아진 후에도 한참 후에야 따뜻한 햇살을 받을 수 있다.

 

아마다블람이 호위를 하고 있는 위풍당당(?)한 출발 모습

이교수의 배낭은 포터가 대신 짊어진다.

 

걷기, 말하기가 힘들고 숨 조차 벅찬 느낌.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 성공의 열쇠는

높이가 아니라 속도라고 했던가? 보폭은 짧아지고 보속은 느려진다.

눈 앞에 펼쳐지는 히말라야는 같은 듯 또 다른 선경(仙景)을 연출하고 있다.(9시 35분)

 

완만한 오르막 길을 계속 걷다가 주변 설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의 휴식 겸 사진을 찍는다.(9시 55분)

배경의 설산은 높체와 로체인 듯, 로체는 거의 항상 흰 구름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오르막길 꼭대기 쯤에 허름한 집 1채가 있는데 문은 겨진 상태다.

하절기에는 야크 방목 등을 위해 주민들의 숙소로 쓰이다가 동절기에는 마을로 내려간다고...

'셀파'인 파상과 우리 일행 3명이 따스한 햇살을 반기고 있다.(11시 20분)

 

8,000m급 설봉이 파란 하늘아래 우뚝 솟고...

 

부채살처럼 펼쳐진 암푸라차의 얼음 파노라마가 눈길을 붙잡는다.

 

멀리 추쿵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펌)

 

이윽고 추쿵 롯지에 가까워진다.(12시 3분) 추쿵은 두개의 시냇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설산 아래로 쭉 뻗은 여러 빙하가 여기저기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빙하지대를 만들어 놓고 있다.

로체늪, 로체사르, 임자체, 암푸라차, 아마다블람 빙하가 추쿵으로 다 모여든다고 한다.

 

이교수와 조교수는 우리가 도착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섰다.

그 만큼 오늘이 힘들었던 하루였을 겻이다.

 

암푸라차(5,633m)의 파노라마는 추쿵이 보여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어느 트레커의 표현처럼 하늘에 떠 있는 나이아가라 얼음폭포를 보는 듯 하.

 

로체 연봉은 아무리 보아도 눈이 지겹지 않고...

 

농사 짓는 밭 인줄 알았는데 야크 집(?)이란다. 출입문이 있고, 돌 울타리도 있다.

 

도착하자 마자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며

햇볕이 드는 양지발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아마다블람의 북벽

 

점심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침묵의 예배를 드렸다. 오늘이 주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한 인쇄물을 꺼내 찬송가 502(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시편 02편을 조용히 입으로 읽고 기도를 드렸다. 무사 귀국과 가족의 안녕을 기도했다.

 

오늘 중식은 마늘 Soup이 식사의 주를 이룬다.

먹기가 무섭게 모두가 눕거나 잠을 청한다.(1시 17분) 전교수는 코까지 골며 피로를 쫒는다.

 

롯지 마당에서 주인 부부(?)가 감자를 건사하고 있다.

감자는 이 지역의 소중한 먹거리인데 척박한 환경 탓인지 알맹이가 아주 작다.

 

야크 똥을 말리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야크는 히말라야 고지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선물한다.

무거운 짐들을 운반해주고 배설물은 땔감으로, 죽어서는 털과 가죽 그리고 고기까지

 

하산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보기 어려운 추쿵을 사진으로 남긴다.

1시 30분에 하산을 시작

 

저 길을 올랐고 다시 내려왔다. 딩보체의 뒷 길(펌)

올라갈 때는 3시간 걸렸는데 내려올 때는 1시간 30분 소요되었다.

 

오후 3시, 숙소인 아리조나 호텔에 도착. 작은 대야 하나에 담긴 물로 세수와 세족 그리고 양말까지 빨았다. 고지에는 귀한 것이 많은데 공기 중의 산소도 귀하고 (따뜻한) 물도 귀하다. 이교수는 숙소에서 비몽사몽으로 자고 있다. 제 컨디션을 찾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바람이 불고 흐려진다.

 

545분 저녁식사는 만찬, 전교수의 Cooking으로 오랜만에 한국의 맛을 만끽. 내가 한국에서 부터 만약을 생각해 준비한 버너에 ‘파상’이 준비한 가스.(가스는 이전에 왔던 한국 등반대가 남긴 것인 듯) 김치, 고추장, 햄 등을 보급한 조교수, 전교수의 조리 솜씨가 발휘된 종합 찌개. 쌀밥 두 그릇에 마늘 두 그릇이 추가되니 만찬이 따로 없다.

 

8시, 식사 후에 난로 가에 앉아 이런저런 앞으로의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말은 끈에 묶어 난로가에서 말리다. 조교수는 일찌감치 숙소로 이동. 전교수, 이교수와 함께 고스톱을 쳤다. 이교수는 몸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안 좋았으나 오후 이후, 특히 석식 이후에 많이 호전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침에 먹은 비아그라 두 조각(50mg)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8시~ 숙소에 돌아왔으나 쉽게 잠이 들지는 못함. 낮 동안에 수분 섭취량은 많고 배출은 적기 때문에 밤새 화장실을 2~3회 다녀온다. 추위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 오는 것이 최대 난제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약간의 추위와 현기증 말고는 현재 크게 어려운 점은 없다.

 

 

참고로 소설가 박범신 님이 2005년 8월에 딩보체에서 보냈던 소회를 옮겨 봅니다.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 세계일보 2005. 8월 26일

 

크지 않은 나무다리를 건너 얼마 동안 더 나아가자 황량한 분지에 자리 잡은 딩보체 마을이 나타납니다. 너른 보리밭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남체바자르보다 더 낮은 박딩마을이나 조르살레만 해도 푸른 보리밭이 바람에 물결치곤 했는데, 해발 4000m를 훌쩍 넘긴 이곳의 보리밭은 아직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계절은 해발고도를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박딩이나 조르살레엔 봄이 와 있어도 딩보체마을에선 여전히 겨울이 떠나지 않습니다.

딩보체는 꽤 큰 마을입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쪽으로 난 길과 피크38봉이나 아일랜드 피크(Island peak)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요지이니 그럴만하지요. 꽤 여러 개의 롯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머물기로 한 곳은 프렌드십 롯지로서 낡은 이층집입니다. 이제 겨우 점심때지만 날씨도 좋지 않고 고소적응도 해야 하니 롯지에 들어가 쉬기로 합니다.

눈발이 다시 날립니다.

내일 아침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고소적응을 해야 합니다. 다음 머물 예정인 마을 로부체(Lobuche)는 해발 5000m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면 내일 무리하게 로부체로 가지 말고 아일랜드피크봉 아랫마을 추쿵(Chhukung·4740m)이나 다녀오는 게 좋을 것이라고, 롯지 식당에서 만난 독일 남자가 충고를 합니다. 눈이 십리쯤 들어가고 볼이 홀쭉해진 나의 초췌한 면면을 살피고 나서 우정으로 던져주는 충고입니다. 추쿵에선 아일랜드봉과 피크38봉은 물론 멀리 마칼루봉(Makal·8481m)까지 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매년 이곳에 온다는 그 독일남자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춥지 않나요?”

“습관이 돼서 괜찮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겹겹이 껴입고 앉은 내 쪽입니다. 하루하루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이곳에 오면서도 그 남자는 날짜 따위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컴퓨터 전문회사를 운영하는 그 남자는 이미 사흘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보통 사람 걸음으로 나흘이면 올 수 있는 길을 여드레에 걸쳐 왔다는 자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내가 이번엔 부끄러워 고개를 숙입니다. 김형도 알다시피 직장에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써야 할 연재소설이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허랑한 ‘백수건달’인 내가 왜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는 그 남자보다 더 시간에 쫓기듯 걸어야 할까요. 말할 것도 없이, 달리기 경쟁하는 것처럼 살아온 한국사회에서 훈련된 관성이 내 몸 안에 강력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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