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雜同散異)/온갖 법칙과 현상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 , 徑路依存性)

efootprint 2022. 3. 17. 08:15

법률이나 제도, 관습이나 문화 그리고 과학 지식이나 기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는 한번 형성되어 버리면 그 후 외부로부터의 다양한 쇼크에 의해 형성시에 존재한 환경이나 여러 조건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부터의 내용이나 형태가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이 과거의 하나의 선택이 관성(inertia) 때문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상을 ‘경로의존성’이라고 한다.

경로의존성에서 자주 인용되는 예는 영문 타자기의 키 배열이다. 오늘날에도 표준적인 키 배열은 좌측 상단에 QWERTY로 배열되어 있지만 이것은 타자기가 수동이었던 시대에 활자를 치는 기계의 팔이 뒤엉키지 않게 타이핑의 속도를 일부러 늦추도록 설계된 것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술이 진전되어 전동 타입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대에 QWERTY가 보다 효율적인 키 배열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오랫동안 익숙하고 친숙한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키 배열을 보급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때문에 QWERTY라는 배열은 그 비효율성이 인지되면서도 현대까지 남아 있으며 이것이 경로의존성의 고전적인 예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로의존성 : 마차는 어떻게 미래를 결정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눈치를 챘겠지만 승용차들은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사이즈가 커진다. 이건 만국 공통이다. 왜 그럴까?

우선 과거에는 없던 많은 기능과 안전장치들이 차량에 더해지고 있다. 과거 차량의 문짝은 지금 보면 충격적일 만큼 얇고, 범퍼는 빈약해 보인다. 그 정도로는 현재의 높아진 안전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넓고 조용하고 편안한 실내를 선호한다. 새 모델이 이전 모델보다 더 편안하고 쾌적하려면 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은 차종인데 새 모델이 작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 과연 차량은 무한히 커지게 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도로와 차선의 너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차가 커진다고 차선 간격을 넓혀 4차선을 3차선으로 줄이지는 않는다. 결국 현재의 차선의 너비는 자동차의 크기를 제한하는 한계선이다. 그렇다면 차선의 크기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그 너비는 마차가 정했다고 보는 게 맞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도로에 차선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답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에 있다.

 



철도(railway)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1807년 영국 웨일스에 처음으로 승객이 요금을 내고 철로를 따라 이동하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철도 위를 달렸던 건 말이 끄는 마차였다. 증기기관차가 승객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약 2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초기에 사용되던 승객용 열차의 디자인이다. 초기의 열차는 <사진1>에서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마차들을 줄줄이 연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왜 긴 박스형 열차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를 본 적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기술과 설비다. 마차는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만들고 발전시켜 왔던 익숙한 기술이다. 마차를 만들던 공장에서 바퀴만 조금 개조해서 철로 위를 달릴 수 있게 하고, 마차끼리 앞뒤로 연결하는 장치를 부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긴 박스형 객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디자인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기술과 설비, 자재가 필요하다.

게다가 초기 증기기관은 작고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관 자체를 개선해서 키우기 전에 큰 객차를 만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증기기관차가 크고 강력해졌을 때는 이미 곳곳에 철로가 깔린 후였다. 즉, 훨씬 더 크고 넓은 객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객차를 말이 끌던 시절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철도의 너비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해진 거다.

에어버스 380이라는 초대형 여객기가 등장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워낙 큰 비행기라서 두 개 층으로 나뉜 객실에서 승객이 나오기 위해서는 보딩 브리지(boarding bridge)도 2층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주요 공항들의 일부 시설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철도 다시 놓는 건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마차의 폭이 현대 열차의 폭을 결정하게 된 셈이다.

 

마차의 미래 결정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용되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추진 로켓의 폭은 4피트 8.5인치인데, 이는 고대 로마제국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의 폭과 똑같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철도의 폭이 마차를 기준으로 정해졌고, 그걸 기준으로 철도가 지나는 터널의 크기가 정해졌는데, 철도를 이용해 로켓을 이동하려니 터널보다 폭이 넓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궁극적으로 로마제국,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크기는 우주로 가는 로켓의 사이즈까지 결정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호사가들의 과장이 조금 섞였을 수는 있지만 인류가 충분히 더 나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전통적인 생각과 습관, 도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익숙한 것을 계속 쓰게 된다는 의미의 경로의존성 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컴퓨터 자판(QWERTY 키보드)은 타자기를 사용하던 시절에 타자기의 오작동을 막기 위해 속도를 강제적으로 늦추도록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불편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쓰기 시작한 후에는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판을 익히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데 어느 순간 바꾸자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도 다르지 않다. 2016년에 도널드 트럼프는 2000년의 조지 W 부시와 마찬가지로 국민들로부터 더 적은 표를 얻고도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일반유권자들이 선거인단을 뽑고, 그렇게 뽑힌 선거인단을 누가 얼마나 확보하느냐로 대통령이 결정되는 간접선거제도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간접선거를 폐지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자고 주장하지만 240년 넘게 사용한 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이미 그 제도에 익숙해졌고,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는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로의존성을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이미 인류역사에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던 군주제라는 ‘경로’를 이탈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제도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웨덴의 ‘다겐(Dagen) H’다. 원래 영국처럼 차량들이 좌측통행을 하던 스웨덴은 우측통행을 하는 주변국가들과 방향을 통일하기 위해 1967년 9월 3일, 일제히 교통시스템을 바꿨다. 그날 스웨덴에서는 전국에서 <사진2>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난 교통대란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좌측운전을 하던 운전자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려니 사고가 속출했고, 변화한 제도를 지키는 차량들과 그렇지 않은 차량들이 얽혀서 꼼짝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웨덴 사람들은 해냈고, 지금은 문제없이 많은 나라들처럼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첫 직장이 성고의 반을 결정한다: 경로 의존성 법칙
 

1927년 미국의 서던 회사는 세계 최초로 편의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46년에는 ‘7-Eleven’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매장의 영업시간이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라는 것을 뜻했다. 1974년 이토요카도는 편의점을 일본에 도입해 영업시간을 365 24시간으로 바꿨다. 이후 이러한 24시 편의점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365일 영업하는 상점은 일반 슈퍼마켓보다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조명, 저녁 교대근무 직원의 급여, 재고 관리자의 초과 근무 수당 등으로 인해 실제 이윤율은 일반 슈퍼마켓보다 낮았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상점들은 왜 여전히 새벽 운영을 유지하는 걸까?

이것은 심리학에서 의존성 법칙과 관련이 있다.
의존성 법칙은 인간 사회의 기술 발전이나 제도의 변화가 물리학의 관성처럼 일단 어떤 경로로 들어가면, 이 경로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물리 세계처럼 인류 사회에도 수익 증가와 자기 강화 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면, 마치 돌아오지 않는 길을 걷는 것처럼 관성의 힘은 이 선택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24시간 편의점은 의존성 법칙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일상용품을 살 때 자기가 제일 익숙한 가게에 가고 자신의 요구에 맞는 가게를 한 번 선택하면 바꾸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상점들은 저녁 10시면 문을 닫고 다음 날 아침 8시쯤 문을 연다. 이때 만약 한 가게가 영업시간을 24시간으로 바꾼다면 저녁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물건을 사는 고객들의 유일한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여러 번 이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한 고객들은 이 가게의 진열 방식에 익숙해지고, 이 가게로 가는 길에도 익숙해진다. 무엇보다 이 가게와 편리를 쉽게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의 쇼핑 경로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고객들은 낮 동안에도 이 가게에서 쇼핑하는 데 익숙해지고 이는 곧 의존성 법칙이 형성된 것이다.

의존성 법칙은 최초로 경제 제도의 발전을 상세히 해석하는 데도 이용된 적이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Douglass Cecil North)는 서양 근대경제사를 정밀히 관찰한 후 한 나라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도 변화에는 의존성 법칙 현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도 변화에 대한 경로 의존 개념을 창안했다. 경로 의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데도 발전된 경로는 각기 다른지, 왜 어떤 국가는 항상 경제적 낙후나 제도의 비효율적인 괴리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해석할 수 있었다.

이 연구 성과는 1993년 노스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겨 주었고 의존성 법칙 또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사람들은 우리 삶의 다양한 선택적 의사 결정을 상세히 설명할 때 의존성 법칙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크게는 국가와 민족에 이르는 경제 제도의 발전부터 작게는 개인의 소비 전략에 이르기까지 의존성 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우리의 모든 선택은 의존성 법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로부터 과거의 선택은 현재 선택 가능한 것들을 결정짓고, 현재의 선택은 다시 미래의 선택을 결정짓게 되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직장 생활이다. 한 사람의 직업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주 많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첫 직장이라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일찍이 이를 형상화하여 비유했는데 직업 발전에는 우리가 옷을 입을 때처럼 첫 단추가(첫 직장처럼)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만약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 또한 커진다. 이는 한 직업에 오래 종사할수록 경로 의존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고정된 경로에서 보수가 증가하고 자기 강화 심리가 강해질수록 경로 변경(직업 계획의 변경)의 비용도 커진다.

객관적으로 말해 첫 직장의 선택은 단지 두 가지 경우로만 나타난다. 하나는 성공한 선택으로, 자신의 발전에 적합한 시작점을 찾아 이 길을 따라 계속 성공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패한 선택으로, 일에 깊게 들어갈수록 자신의 발전에 부적합한 길을 걷는다.

그 후의 상황은 사실 직장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어떤 일의 상태나 직업 환경에 익숙해졌을 때, 그에 대한 의존성은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하면, 크게 기득권을 상실하고 심지어 다시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바로 직업 컨설팅전문가들이 첫 직장은 반드시 자신의 취미, 개성, 능력 및 전문 지식을 모두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유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 도전적이면서도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경력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노력해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의존성 법칙이 가져오는 자아 강화는 비로소 긍정적인 피드백 역할을 하며 순조롭게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일수록 의존성 법칙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 한다. 고유한 경로를 버리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동시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더욱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확고하게 경로를 전환하고 새로운 직업 계획 경로로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다시 성공의 궤도로 돌아가는 유일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