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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재상,오리 이원익

efootprint 2020. 3. 31. 14:28

오늘(3.31)의 본문 [26.1 "福生於淸儉(복생어청검)하고 德生於卑退(덕생어비퇴)하고 道生於安靜(도생어안정)하고 命生於和暢(명생어화창)"을 읽으면서 이 문구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조선시대 영의정만 여섯 차례 지냈지만 재산이라고는 초가집 한 채 뿐이었던 청백리(淸白吏) 재상으로 알려진 오리(里) 이원익 선생입니다. 오늘은 이원익 재상의 생애를 통해 명심보감 본문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글의 출처는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입니다.


65년 관직 중 44년간 재상 자리

'안민철학' 바탕 대동법 등 시행
포용의 리더십으로 '국난' 극복
검소하고 소탈한 삶 '칭송 자자'



[이야기 1] 포용의 리더십으로 정국 혼란 극복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시대 대표 청백리이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나라를 튼튼히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백성을 편안하고 잘 살게 해야 한다'는 '안민(安民)' 우선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현장행정을 펼쳤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의 4세 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569년(선조 2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65년 동안 관직생활 중 44년을 재상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을 여섯 번,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 직책인 도체찰사를 네 번이나 지냈지만, 재산이라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뿐이었다.

그가 해낸 일에 걸맞은 부귀, 권력, 명성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조선 중기 사회는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광해조의 정치적 질곡,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이 일어난 혼란기였다. 내부에서는 동서로 갈라져 치열한 붕당정치를 전개하고, 밖으로는 외적이 침입했다. 왕권이 무너지고 관료는 부패하고, 백성은 피폐했다.

나라가 위태롭던 격동기일 때, 그는 국정의 중심에서 '물리침'보다는 '감싸안음'의 리더십을 발휘해 정국을 합리적으로 수습했다. 그는 이이와 유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덕형, 곽재우 등 쟁쟁한 당대 인사들과 교류하며 난세를 헤쳐 나갔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중앙정치의 중심 인물이기 보다는 지방행정의 달인이었다. 질정관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 황해 도사와 안주 목사, 평양 감사를 지냈다. 그는 중앙에 든든한 배경도 없었고, 로비는 물론 이벤트도 할줄 몰랐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하던가.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임진왜란 중에 우의정으로 조정에 들어간 이후 재상의 반열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이야기 2] 율곡, 오리를 알아보다"
이원익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참으로 쓸만한 사람입니다." 율곡 이이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닌 이유가 있다.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에 부임했는데, 이이가 그곳 감사를 지냈다. 율곡이 도지사이고, 오리가 부지사인 셈이다. 율곡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모든 정무를 맡길만큼 신임을 얻고 훌륭한 치적도 쌓았다. 특히 그는 무질서한 군적(軍籍)을 바로 잡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할 정도였다.

그는 율곡의 추천으로 고급관료 인재풀, '홍문록'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 요직인 사관원 정언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그러나 승정원 탄핵사건으로 파면돼 야인 생활 끝에 1587년 안주목사로 다시 등용됐다. 그는 임명을 받자마자, 거창한 부임행차를 거부하고 홀홀 단신 부임지로 떠났다.

굶어죽은 사람이 절반일 만큼 참혹한 안주백성을 위해 곡식 1만석을 긴급 방출해서 기근을 해결했다. 또 1년 중 3개월이던 복무연한을 2개월로 줄여서 군역의 부담을 덜어줘 백성들은 농사에 힘쓸 수 있도록 했다. 백성들이 '토질이 맞지 않다'며 심기를 꺼려하는 뽕나무를 심어 양잠업을 성공시켜 의식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그 때 심은 뽕나무 숲을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불렀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백성을 남겨두고 한양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갔다. 조선은 무력했다. 국토는 순식간에 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병농일치제와 진관체제의 방위체계는 허술했다. 양반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군포로 병역의무를 대신하는 방군수포제는 '유령군인'을 양산하는 등 국방력은 부실하기 그지 없었다. 병력 충원과 운영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왜군은 단숨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도순찰사였던 이원익은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평안도를 보존함으로써 조선의 명맥을 지켜냈다. 그가 안민(安民)행정을 펼치다가 떠나자 평양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공덕을 기렸다.
그는 철저한 현장행정을 펼쳤다. 솔선수범해서 발로 뛰고, 현지 사정을 헤아리고, 문제점을 해결했다.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린 안주백성들이 마음으로 키작은 '꼬마' 사또에게 승복했다.

[이야기3]백성이 근본이고 나머지는 군더더기
그는 '안민=국방'이라고 생각으로 국난 극복에 기여하고, 조선 최대의 납세 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의 세금부담을 완화시켰다.
임진왜란이 휩쓸고 간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는 피폐했고, 바닷가 마을은 유령마을로 변했다. 백성들은 짊어진 세부담이 크다보니, 왜적이 물러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슬퍼하고, 왜적이 머무른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뻐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한다. 그 밖의 일들은 전부 군더더기일 뿐"이라고 선조에게 비장한 마음을 담아 보고했다.특히 그는 옥에 갇힌 이순신을 구해내고, 한산도까지 내려가서 군사를 지원했다.
이순신은 "장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음을 돌보지 않고 적진 깊숙히 쳐들어가서 큰 공을 세우게 한 것도 실은 이상국의 덕"이라고 탄복했다. 이순신이 실제 바다에서 나라를 구했다면, 이원익은 민심의 바다를 장악해 조선을 구해낸 것이다.

그는 선조의 유언 덕분에 광해군 초대 영의정에 올라 임진왜란 이후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로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69세에 귀양을 갔다. 이어 인조반정 공신들의 추대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성절사로 중국을 다녀왔을 때 귀국 행장의 간소함은 그가 지청(至淸)한 관료로 인식되는 계기였고, 도체찰사 수행시에는 맑고 투명한 공무 처리로 청렴한 양신의 모범을 보였다"면서 "호성공신에 녹훈됐지만 끝내 사패지를 사양해 삼척동자도 그의 청렴함에 탄복할 따름이었다"고 했다.

[이야기 4] 청백리 기려 '관감당' 집 하사
"2품 이상을 불러 염근한 사람을 가리라 명하니 뽑힌 사람이 이원익·유성룡·허잠·이시언 등 네 명이었다."(<선조실록> 권142, 34년 10월16일)
이원익은 1601년(선조 34년)에 청백리로 뽑혔다. 인조는 "40년 동안 정승을 지내면서 몇칸 초옥에 살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은 고금에도 없는 일이다"고 감탄했다.

그에게 청백은 공도(公道)의 실현이자 충(忠)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또 청렴은 물질을 향한 무욕의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 만큼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했다. 여주 앙덕리 초옥생활 등에서 보듯이 그는 청백을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이와 함께 여주 호장 아내의 치상(治喪)을 치러준 일화는 그가 여민동락의 정신적 청백을 구현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의 청백한 삶은 당대에는 집안 경영의 원칙이었고, 사후에는 오리집안의 가풍으로 발전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상을 치를 염두를 내지 못할 만큼 죽는 날까지 청렴했다.
인조가 궤장을 내리고, 그의 청렴함을 기려 관감당(觀感堂)을 하사했다.광명시는 오리의 삶과 청렴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청백리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오리서원에서 '오리 이원익 청렴·인성교육 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 5]이순신 목숨 살린 명재상 이원익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을 모르지 않지만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한 이원익(1547~1634)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원익은 무려 60여년 간 관직에 있었고 그 사이에 영의정을 다섯 차례나 지낸 명재상이다.

정유재란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직접 심문하는 국청(鞠廳)을 열었다. 국청이란 모반, 대역 기타 국가적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재판정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기거나 심기를 건드렸다. 선조는 이순신이 오만방자하다며 죄를 묻겠다고 별렀다. 이순신은 부산을 향해 진격하는 왜를 막으라는 선조의 출동 명령을 왜군의 거짓정보일지 모른다고 판단해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또, 통영에서 무관시험을 보도록 해달라고 선조에 건의했다. 장수를 뽑는 건 왕의 권한인데 그걸 넘겨달라는 건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원균은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왜군의 머리를 상부에 올렸다. 이순신이 가만히 보니 ‘이상한(?) 머리’가 많았다. 원균은 8세 된 서자의 손자 이름으로 올리기까지 했다.

이순신이 이런 내용의 편지를 좌의정 유성룡(1542~1607)에게 전했다. 그런데 밀직내시가 이 편지를 중간에 입수해 선조에게 보여주었고 선조는 이를 모함으로 간주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이용해 전쟁 통에 휘하 장수를 모략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200여명의 문무백관이 도열해 있었지만 이순신을 편든 이는 오직 이원익 한 사람과 좌찬성 정탁(1526~1605) 뿐이었다. 이원익은 정탁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도록 했고 정탁은 친국(왕이 직접 심문함) 내내 상소문을 소리 내 읽었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을 비롯 모든 이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울부짖듯이 고했다. 오후 6시에 시작된 재판이 8시, 9시를 넘어 밤 11시가 됐지만 도체찰사 이원익은 아무 말도 안한 채 맨 앞자리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도체찰사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가비상대책위원장 쯤 됐다. 당시는 전시 체제였다. 아무리 왕이 죽이고 싶어도 도체찰사가 안 된다고 하면 죽이지 못했다.

참다못한 선조가 이원익에게 “시간이 이리 흘렀건만 도체찰사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요. 가타부타 말을 하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발언하라고 하시니 얘기하겠습니다. (이순신을)죽이는 건 쉽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단 원균만 빼고 얘기 하십시오. 저를 설득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10년을 서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다들 원균 얘기를 하려고 하는 순간 이원익의 말 한마디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선조가 “왜 원균을 거론 못 하게 하는가”라고 묻자 이원익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을 가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저는 그곳에 가서 지휘자가 병사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전쟁 대비를 어떻게 하는지를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과 전쟁수행 능력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얘기다. 이순신을 감싸던 유성룡도 이날 국초에서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며 왕의 편에 섰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이원익의 말에는 반론을 못했다.

문초와 고문이 새벽 6시까지 이어졌지만 이원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선조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역적이 아닌가 보다. 풀어 줘라”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원익은 이순신에게 다가가 “사돈 괜찮은가요. 제가 목숨을 살렸으나 벼슬은 되찾아주지 못하겠으니 백의종군하세요”라고 말했다. 이순신의 서녀와 이원익의 서자가 결혼해 둘 사이는 사돈 관계였다. 산발한 채 초죽음이 된 이순신은 간신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원익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광명으로 내려가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가마니를 짜며 혼자 여생을 보냈다. 인조가 이를 딱하게 여겨 ‘관감당’이란 자그만 집을 지어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 집에서 3년도 채 못살고 눈을 감았다.

이원익은 생전에 “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며 너무 부끄러웠다. 전쟁 예측도 못하고 그저 관리만 했으니 백성 앞에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기념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원익'이나 '관감당(觀感堂)' 등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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