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心寶鑑/동네글방(火金通信)

신사임당, 현모양처를 넘어서

efootprint 2020. 10. 30. 09:03

오늘(10.30) 힉습은 부행편(婦行篇) 8조(條)로 본문과 풀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 오늘 글을 마지막으로 블로그를 통한 동아리 학습을 마칩니다. 이후의 '동네글방' 동아리 활동에 대해서는 10.21(수)에 단톡방에 공지한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본문과 풀이

賢婦(현부)는 和六親(화육친)이요 佞婦(영부)는 破六親(파육친)이니라.
"현명한 부인은 육친을 화목하게 하고, 간사하고 말재주나 피는 부인은 육친의 화목을 깨뜨린다."

賢婦(현부) 덕성과 행실이 뛰어난 아내

和(화할 화) 화목하다, 온화하다

親(친할 친) 친하다, 가깝다, 어버이, 친척

六親(육친) 父母. 兄弟. 妻子. 또는 父. 子. 兄. 弟. 夫. 婦.를 말함. 가까운 친척/모든 친척을 두루 칭하는 말로 쓰임.

和六親(화육친) 육친을 화합하게 하다 ← 和가 목적이 六親을 취하여 사역형으로 사용됨

佞(아첨할 녕/영) 아첨하다, 간사하다, (말을) 잘하다

佞婦(영부) 말만 잘 하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아내

破(깨뜨릴 파) 깨뜨리다, 부수다

 

오늘 본문은 한 집안의 화목은 부인(婦人: 결혼한 여자)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어찌 가정의 화목만이겠습니끼? 여성은 오래 전부터 자금까지도 아내의 역할 만이 아니라 엄마로, 며느리로,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으로 살아가기에 그녀가 가정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부인을 현부(賢婦)와 영부(佞婦)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현부(賢婦)는 덕성과 행실이 뛰어난 아내를, 영부(佞婦)는 간사하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아내를 말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부(佞婦)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영부(佞婦) 이야기는 TV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더구나 오늘은 '동네글방' 동아리 학습의 마지막 글인 만큼  현부(賢婦) 이야기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현부(賢婦)와 통하는 요즘 말은 현모양처(賢母良妻)입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다음은 인물을 알아맞히는 문제입니다. 역사적 인물 중에 현모양처를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너무 쉬웠나요? 아마 문제를 다 말하기도 전에 이구동성, 만장일치로 한 사람을 꼽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입니다. 이제는 5천원권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로서 보다는 5만원권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으로 당당하게 자리 매김한 그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사임당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아래에서는 그녀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살펴 보겠습니다. 

 

▣ 일찍이 롤 모델(Role Model)을 정하다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며, 당호란 자신이 거처하는 방이나 집에 특정한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호는 집에 대한 호칭인 동시에 특정인의 아호가 되기도 합니다. 삼가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의 정약용의 여유당(與猶堂), 매사에 선을 다한다는 체제공의 매선당(每善當),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란 법정 스님의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 모두 각자가 머물던 자리였으며 아호였지요.

 

그렇다면 당호는 왜 지을까요? 이름은 의미(meaning)이며, 자기 정체성(identity)을 나타냅니다. 즉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확인이고 선언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은 15세의 나이에 자신의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태임은 신사임당이 본받고 싶은 모범 인물이요, 사표(師表)였습니다.  요즘 말로 롤모델(role model)이었던 것이지요.

 

신사임당이 롤 모델로 삼은 태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태임은 앞서 언급했듯이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였습니다. 문왕은 3600년 이전 사람으로 「주역(周易)」을 전했다고 전해지며,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문왕의 어머니에 대해 "평소 태임은 성품이 단정하고 한결같으며 성실하고 장엄하여 오직 덕을 행할 뿐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태임은 현명하였으며,의로움과 자애로움까지 갖춘 여성으로 중국은 물론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추앙되는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문왕을 임신했을 때 행하였다는 태교(胎敎)는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조의 태교로서 그 본질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기록에 남은 그녀의 태교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눈은 사악(邪惡)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은 오만스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 있을 때는 발을 헛딛지 않고, 다닐 때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고기도 바르게 잘린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밤이면 소경으로 하여금 글을 읽고 시를 외우게 하여 마음을 화락하게 하였다."

 

사임당은 이런 태임을 자신의 롤모델로 정하고 태임처럼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수양을 쌓았습니다. 고전과 경전를 열심히 읽고,고대사 등의 역사서도 읽었습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넓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위의 사임당의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누구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롤모델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롤모델은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사람이지요. 곧 인생의 목표이자 가치 선언입니다. 사임당은 15세에 당대의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짓고, 삶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또한 그녀는 태임을 롤모델로 설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인물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사임당은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자유했던 조건하에서도 일곱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써 주부로써 아내로써 며느리로서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정한 롤모델을 뛰어넘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 율곡이 본 어머니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1551년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때 이이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요. 신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어머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율곡이 쓴 글이 「선비행장()」입니다. 선비란 남에게 세상을 떠난 자기 어머니를 이르는 말이고, 행장이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의 일생의 행적을 적은 글입니다. 내용중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의 어머님은 진사 신공(申公)의 둘째 따님이시다. 어렸을 때에 경전(經傳)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쓰셨다. 또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천성도 온화하고 얌전하였으며 지조가 정결하고 거동이 조용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안존하고 자상스러웠으며, 말이 적고 행실을 삼가고 또 겸손하였다. 성품이 또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안색이 반드시 슬픔에 잠겼다가 병이 나은 뒤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서울로 올라온 뒤 수진방에 살았는데 그때 할머니께서 나이가 많아 집안일을 돌볼 수 없어 어머님이 맏며느리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성품이 활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으셔서 살림이 넉넉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머님은 살림을 규모 있게 하여 웃어른을 봉양하고 아랫사람을 보살필 수 있었다. 모든 일을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할머님께 말씀드린 뒤에야 하셨다.

 

그리고 할머님 앞에서는 희첩(姬妾: 시중드는 여종)도 꾸짖는 일이 없고 말씀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색은 언제나 온화하셨다. 아버님께서 어쩌다 실수를 하시면 옳은 도리로 말씀드려 고치게 하셨고 자식에게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경계하여 타이르셨다. 또 거느리는 아랫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꾸짖으시니 종들도 모두 어머님을 공경하고 받들어 모셨다.

 

짧게 소개한 위 글의 내용만으로도 신사임당의 모습이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네요. 지혜로움과 올곧음에 의로움과 자애로움까지. 한마디로 지덕겸비(知德兼備)며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완성형 여성상(女性像)입니다. 그러니 오백여년 동안을 시대가 달라져도 변함없는 칭송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신사임당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의 「선비행장()」의 기록은 신사임당의 면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위 기록에는 신사임당이 지은 시와 신사임당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내용 등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그녀의 시작(詩作) 중에서 특히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 望親庭: 유대관령 망친정)"라는 시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지요. 시 내용은 아래 주소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blog.naver.com/akekdthkl200/220916317433

 

▣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

사임당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시・서・화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하면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인 분야가 바로 그림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임당이 남달리 노력한 탓도 있겠지만, 사임당의 천재성도 부인할 수 없겠지요. 그녀의 인품과 비범한 그림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전해 오는데, 강릉에서 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잔치가 있어 사임당도 초대를 받아 갔다. 그런데 심부름을 하던 계집종이 음식 그릇을 어느 부인의 비단 치맛자락에 쏟았다. 사실 이 부인의 옷은 이웃집에서 빌려 입고 온 것이라 크게 걱정을 하였는데, 이때 사임당은 그 집 주인에게 벼루와 붓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고는 얼룩진 비단 치마를 펼쳐 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 그림은 싱싱한 잎 속에서 탐스럽게 익어 가는 포도송이를 그린 정교한 그림이었다. 사임당은 이 치마를 부인에게 돌려주면서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그 돈으로 새 비단 치마를 사도록 했다.

사임당에게서 포도송이 그림 치마를 받은 부인이 곧장 시장으로 치마를 팔러 나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포도송이 그림 치마를 유심히 살폈다. 그중 한 부인이 “이 그림은 누가 그린 것입니까?” 라고 묻고 사임당이 그린 것이라는 말에 그 부인은 얼굴에 기쁜 빛을 나타내며 많은 돈을 내고 사 갔다. 그래서 이웃집에서 옷을 빌려 입고 왔던 부인은 그 돈으로 비단 치맛감을 사서 치마 임자에게 새 감으로 돌려주고도 몇 감이 더 남았다.

 

위 일화를 보면 사임당은 이미 그 지역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7살 때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그릴 만큼 타고난 화가였지요. 그의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자, 닭이 와서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사임당은 시서(詩書)는 물론이고 다양한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습니다. 사임당이 그린 초충도(草蟲圖)는 그 정교함과 현실감 있는 필채 등으로 특별한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국한하지 않고 조선시대 최고의 예술인이자 대표화가로 바라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사임당의 자녀 교육법

신사임당은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4남3녀의 자녀교육에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녀는 아홉 번 장원 급제를 한 셋째 아들인 대학자 율곡 이외에도 늦은 나이지만 과거 급제에 성공한 첫째 아들, 최고 화가로 이름을 날린 첫째 딸과 시서화(詩書畵)와 거문고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린 막내 아들 등을 뛰어난 인물로 키워냈습니다. 그녀의 자녀교육법은 무슨 비밀이 있는걸까요? 

 

첫째는 바로 모범입니다. 사임당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의 일과표를 함께 만들고 그대로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일과표대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일곱자녀들에게는 배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사임당이 어느 날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맏딸인 매창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임당이 평소에 하던 일을 자신이 했습니다. 동생들을 씻기고 어머니가 써준 일과표애 따라 동생들을 가르쳤으며,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였습니다. 사임당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먼저 행동으로 본보기를 보여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둘째는 인성에 바탕을 둔 교육입니다. 사임당은 글을 읽다가 아이들에게 유익한 글이라고 생각되면, 그 글을 종이에 크게 적어서 아이들이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붙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글의 뜻을 아이에게 물어서 아이들이 그 글을 다 이해하였으면 또 다른 글을 붙였습니다.

사임당은 인성교육의 하나로 아이들에게 고전을 많이 읽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고전은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뜻이 .'무엇'인지를 묻게 하고, '왜'와 '어떻게'를 질문하게 합니다. 훌륭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써놓은 고전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사임당은 자녀들에게 고전을 가까이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셋째는 맞춤형 교육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지만 성격이나 재능이 각기 다릅니다. 사임당은 우선 성장 시기에 따라서 교육 방법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아이가 태중(胎中)에 있을 때는 태교를 신중히게 했습니다. 유아기 때는 쉬운 글들을 들려 주었고, 성장하면서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가르쳤습니다.

사임당은 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되면서 재능과 성격에 맞춘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건강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둘째 아들은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해서 인성교육에 촛점을 두었습니다. 셋째 아들인 율곡은 집중력과 기억력이 출중하여 난해한 책을 읽도록 하였지요.  큰 딸 매창과 네째 아들은 각자의 재능을 살리는 교육을 통해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와 거문고의 명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넷째는 끈기입니다. 사임당은 일곱 남매를 키우면서 야단을 치지 않는 자애로운 어머니였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율곡이 회상하기를 어머니는 아이들을 책망하는 일 없이 참된 마음으로 천천히 타일러서 스스로 깨우쳐서 바로잡을 수 있도록 기다렸다고 합니다.

맏아들 선은 학문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임당은 장남에게 과거 시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대화를 통해 깨닫게 하였고, 학문에는 나이가 아니라 뜻이 중요함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41세에 늦게나마 진사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태교(胎敎)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자녀 교육의 첫 출발점은 태교였습니다. 사임당 역시 태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철저히 지켰지요. 사임당이 태교를 할 때 지침으로 삼은 것은 그녀의 롤모델이었던 태임(太任)의 대교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임당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고결하고 기품이 있는 것을 보려고 노력했고, 앉을 때는 항상 바른 자세를 취하였으며, 옳지 않은 것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태교방법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현대 의학계에서도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상에서 이 시대 어머니들의 우상인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녀의 자녀교욱법은 현대의 교육 이론으로 보아도 탁월함 그 이상이며 그래서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학습 동아리 '동네 글방'의 결성 취지는 '아이 성장에 도움 주는 부모(엄마) 교육'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마지막 학습의 인물이 신사임당인 것은 특별한 뜻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녀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있다면 학교나 학원, 과외가 전부가 아닌 가정교육의 중요성일 것입니다.   

 

▣ 현모양처를 넘어서

흔히 ‘닮고 싶은 한국의 어머니’로 칭송되는 신사임당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렇습니다. 즉 "몸가짐이 정숙했고 자식들을 잘 교육하였으며 남편에게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했다. 또 시부모와 친정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해 잘 모셨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입니다.

 

신사임당은 이렇듯이 현모양처의 표상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는 '화가 신씨’로 알려졌다가 17 세기에는 송시열이 스승인 율곡을 숭상하면서 '성현의 어머니’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근자(近者)에 들어서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더욱 다양한 측면애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임당은 가정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여성이 아니라 그보다는 화가이자 문인으로서의 면모가 더 뚜렷했고 요즘말로 워킹맘이었다는 견해입니다. 무엇보다도 유학(儒學)과 남성 중심의 세계 속에서도 자신의 꿈과 재능을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꽃피운 자기개발의 선구자요, 운명의 지혜로운 개척자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사임당 신화’ 가운데 하나인 자녀교육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즉 사임당은 자신을 모두 희생하면서 자녀를 지원하는 ‘자아상실형 교육’을 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을 이끌었다는 것이지요. 곧 사임당 자신의 자아실현 노력이 자녀들에게 모범을 통한 교육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임당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함과 동시에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흘륭한 교육자인 동시에 독창적인 개성을 표현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녀는 슬기로운 어머니와 아내 역할 그리고 예술과 학문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현모양처를 넘어서는 여성, 시대와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본받고 싶은 선한 영향력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신사임당이 지난 500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듯이 앞으로도 우리들 마음 속에 오래오래 희망의 인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 사임당의 생애(참고)

1504년(연산 10년) 10월 29일. 출생 현재의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나다.

1510년(중종 5년). 7세 외조부 이사온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스승없이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516년(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중종 17년). 19세 덕수이씨 이원수()와 결혼하다. 결혼 후 친정에 머무르던 중인 11월 친정 부친이 별세하여 3년상을 치른 후 서울로 올라왔다.

1524년(중종 19년). 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이 태어나다.

1529년(중종 24년). 26세 맏딸 매창이 태어나다.

1536년(중종 31년). 33세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1541년(중종 36년). 38세 강릉 친정에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다.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다. 네째 아들 우가 태어나다.

1550년(명종 5년). 47세 여름에 부군 이원수공이 수운 판관이 되다.

1551년(명종 6년). 48세 5월 17일 새벽, 병상에서 2,3일 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던 부군과 두 아들은 그날 서강에 도착하여 부인의 별세한 소식을 듣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사 지내다.

 

 - 글 마침

 

이상으로 2020. 2.10 이후로 오늘(10.30)까지 78회에 걸쳐 올렸던 '학이시습(學而時習)' 연재(連載)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