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화엄/ 나태주
꽃 장엄이란 말
가슴이 벅찹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세상이요 우주라지요
아 아 아
그만 가슴이 열려
나도 한 송이 꽃으로 꽝!
터지고 싶습니다.
창포꽃 여인/ 이선
허리를 틀어, 세상을 아득히 멀리 바라보라
꽃 아닌 세상 있더냐? / 꽃 아닌 색깔 있더냐?
언 땅에 발을 담그고 겨울을 견딘 / 그대는 숨죽인 뿌리였다
안으로 안으로 어둠을 삼키고 / 세상을 환히 비출 ‘노랑무지갯빛 꿈’
잠재우며 기다렸다 ― 가슴엔 겨울 물안개 피어오르고
‘노랑 창포꽃’이라 부르랴,
‘보라색 창포꽃’이라 부르랴,
여리고 가여운 내 누이, 나의 뿌리야
돌부리를 헤치고 나온들―그쯤이야, / 발가락이 찢겨진들―그쯤이야,
억새풀 뿌리 사이로, 겨우 발을 내 딛었구나 ― 목을 꺾은 채,
그대여 뿌리부터 다시 웃어보자
햇빛 찬란한 아침을 향하여, 브라보! / 상처받은 저녁을 위하여, 브라보!
새벽을 건너오는 처녀처럼 / 사뿐사뿐, 맨발로 와서
찌든 세상 머리카락을 정결하게 감겨다오
꽃잎 오므리고 가던 그 길로, 고고하게 다시 오라
창포꽃 여인이여, / 창포꽃 희망이여,
‘기쁜 소식’ 아슴아슴 어여쁜, 노랑창포꽃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내 생각):
'그까짓 여자'로 돌 팔매질 당할 줄 알았는데, 까일 줄 알았는데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로 박수 받겠네, 귀여움 받았네
무서운 댓글, 피할 수 없는 감시, 폭압의 세상에 내가 먼저 저절로 길들여졌네
꽃 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우리 산 / 우리 들에 피는 꽃
꽃 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초롱꽃,들꽃,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체꽃, 바위솔,모싯대
족두리풀,오이풀,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 정든 모국어
꽃 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 이름 외우듯이 /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 언제라도 봄
먼 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 나르는 / 향기가 되자.
찔레꽃/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 조금만 더 다가서면 /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 송이 송이 / 흰 찔레꽃을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 아픔이 출렁거려 /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 슬퍼하지 말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 이 계절에 /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목백일홍/ 도종환
피어서 열흘 /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 석 달 열흘을 /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 거듭나는 것이다.
며느리 밥풀꽃/ 송수권
날씨 보러 뜰에 내려
그 햇빛 너무 좋아 생각나는
산부추, 개망초, 우슬꽃, 만병초, 둥근범꼬리, 씬냉이, 돈나물꽃
이런 풀꽃들로만 꽉 채워진
소군산열도, 안마도 지나
물길 백 리 저 송이섬에 갈까.
그중에서도 우리 설움
뼛물까지 녹아흘러
밟으면 으스러지는 꽃
이 세상 끝이 와도 끝내는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꽃
울 엄니 나를 잉태할 적 입덧 나고
씨엄니 눈돌려 흰 쌀밥 한 숟갈 들통나
살강 밑에 떨어진 밥알 두 알
혀끝에 감춘 밥알 두 알
몰래몰래 울음 훔쳐 먹고 그 울음도 지쳐
추스림 끝에 피는 꽃
며느리밥풀꽃.
햇빛 기진하면은 혀 빼물고
지금도 그 바위섬 그늘에 피었느니라.
꽃의 패러디/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개밥 풀, 인동, 환국 등등의
보통 명사나 수 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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