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歌

꽃(花)

efootprint 2020. 5. 4. 08:47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화엄/ 나태주

 

 

꽃 장엄이란 말

가슴이 벅찹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세상이요 우주라지요

 

아     아     아

그만 가슴이 열려

 

나도 한 송이 꽃으로 꽝!

터지고 싶습니다.

 

 

 

창포꽃 여인/ 이선

 

 

허리를 틀어, 세상을 아득히 멀리 바라보라

꽃 아닌 세상 있더냐? / 꽃 아닌 색깔 있더냐?

 

언 땅에 발을 담그고 겨울을 견딘 / 그대는 숨죽인 뿌리였다

안으로 안으로 어둠을 삼키고 / 세상을 환히 비출 노랑무지갯빛 꿈

잠재우며 기다렸다     가슴엔 겨울 물안개 피어오르고

 

노랑 창포꽃이라 부르랴,

보라색 창포꽃이라 부르랴,

 

여리고 가여운 내 누이, 나의 뿌리야

돌부리를 헤치고 나온들그쯤이야, / 발가락이 찢겨진들그쯤이야,

억새풀 뿌리 사이로, 겨우 발을 내 딛었구나     목을 꺾은 채,

 

그대여 뿌리부터 다시 웃어보자

햇빛 찬란한 아침을 향하여, 브라보! / 상처받은 저녁을 위하여, 브라보!

 

새벽을 건너오는 처녀처럼 / 사뿐사뿐, 맨발로 와서

찌든 세상 머리카락을 정결하게 감겨다오

 

꽃잎 오므리고 가던 그 길로, 고고하게 다시 오라

창포꽃 여인이여, / 창포꽃 희망이여,

 

기쁜 소식아슴아슴 어여쁜, 노랑창포꽃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내 생각):

'그까짓 여자'로 돌 팔매질 당할 줄 알았는데, 까일 줄 알았는데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로 박수 받겠네, 귀여움 받았네

무서운 댓글, 피할 수 없는 감시, 폭압의 세상에 내가 먼저 저절로 길들여졌네

 

 

꽃 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우리 산 / 우리 들에 피는 꽃

꽃 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초롱꽃,들꽃,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체꽃, 바위솔,모싯대

족두리풀,오이풀,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 정든 모국어

꽃 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 이름 외우듯이 /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 언제라도 봄

먼 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 나르는 / 향기가 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들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체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찔레꽃/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 조금만 더 다가서면 /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 송이 송이 / 흰 찔레꽃을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 ​아픔이 출렁거려  /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 슬퍼하지 말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 이 계절에 /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목백일홍/ 도종환

피어서 열흘 /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 석 달 열흘을 /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 거듭나는 것이다.

 

 

며느리 밥풀꽃/ 송수권

날씨 보러 뜰에 내려

그 햇빛 너무 좋아 생각나는

산부추, 개망초, 우슬꽃, 만병초, 둥근범꼬리, 씬냉이, 돈나물꽃

이런 풀꽃들로만 꽉 채워진

소군산열도, 안마도 지나

물길 백 리 저 송이섬에 갈까.

그중에서도 우리 설움

뼛물까지 녹아흘러

밟으면 으스러지는 꽃

이 세상 끝이 와도 끝내는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꽃

울 엄니 나를 잉태할 적 입덧 나고

씨엄니 눈돌려 흰 쌀밥 한 숟갈 들통나

살강 밑에 떨어진 밥알 두 알

혀끝에 감춘 밥알 두 알

몰래몰래 울음 훔쳐 먹고 그 울음도 지쳐

추스림 끝에 피는 꽃

며느리밥풀꽃.

햇빛 기진하면은 혀 빼물고

지금도 그 바위섬 그늘에 피었느니라.

 

< 산부추, 개망초, 우슬(소무릎)꽃, 만병초, 둥근범꼬리, 신냉이, 돈돌)나물, 며느리밥풀꽃 >

 

꽃의 패러디/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개밥 풀, 인동, 환국 등등의

보통 명사나 수 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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